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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하이난섬 학살 현장을 말하다

고복남 옹, “그 곳은 말 그대로 생 지옥... 그곳에서 우리 국민들은 굶어죽고, 맞아죽고, 찢겨져 죽었다”
Written by. 이영찬   입력 : 2012-04-01 오전 9: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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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에 4〜5구의 송장 배달을 했다. 내손으로 묻은 인원만도 5〜6백 명은 족히 될 것이다. 아는 사람은 깊이 묻어 주기까지도 했다. 배가 너무 고파 사자밥도 몰래 먹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일본 사람들은 대만, 중국 사람은 감시를 안했는데 유독 한국 사람에 대해서는 감시를 심하게 하고 일을 못하거나 하면 곡괭이 자루로 무자비하게 폭행까지 일삼았다. 심지어는 굶어죽고, 맞아죽고, 찢겨져 죽었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3〜1944년 일제가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조선인 죄수 2000여명을 ‘조선보국대’라는 명분으로 중국 하이난섬(해남도)으로 끌고가 강제로 노역을 시키고 태평양 전쟁에서 패한 후에도 조선인들에게 광복된 사실을 속이고 대거 학살한 사건이 있었다.

▲ 인천 남구 주안동 용주사에서 중국 하이난섬 '천인갱' 영령 추모행사에 참석 후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는 고복남(95) 옹. ⓒkonas.net

 지난달 27일 오전 인천시 남구 주안동 용주사에서 이 사건으로 학살된 영령들의 영가 천도를 기원하는 ‘일제징용 국인 1천명 사해자 등 제 7주기 영가 천도제’ 행사가 거행됐다.  당시 학살현장에서 생존한 고복남(95) 옹은 이날 행사에 참석해 그때의 상황을 설명하며 가슴속에 쌓인 한을 토했다.

 고복남 옹은 2004년 시민단체인 태평양유족회가 하이난도 ‘천인갱’의 진상을 파악할 당시, 강제 징집돼 노역을 했던 사실은 인정되고 있으나 그 사실을 확실히 뒷받침할 수 있는 명단에는 누락되어 있어 그에 따른 피해 지원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 하이난섬으로 끌려가게 된 이유는?

 “나는 평양에서 자랐다. 모친은 세탁소에서 일을 했고 나는 극장 홍보 깃발을 들고 다녔다. 친구 3명과 길을 가다 우연히 일본 순경하고 시비가 붙어 ‘폭행상해 치사죄’로 평양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형무소 생활 중 일본인 간수가 나에게 와서 해남도에 가서 일을 하면 형량을 감해 주겠다고 제시해서 고민 끝에 가게 되었다. 평양 형무소에서는 약 50여 명의 인원이 착출된 것 같다. 우리들은 해남섬으로 출발하기 전에 서울에 있는 총독부에 들렀는데 간부로부터 6개월 단위로 교대를 시켜주겠다는 소리도 들었다”

 “이 후 우리는 ‘조선보국대’라는 완장을 팔에 차고 부산항에서 일반인들과 함께 배를 타고시모노세끼로 이동했다. 그 때  ‘조선보국대’로 이동한 인원이 약 800명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시모노세끼에서는 대만인과 일본인도 탔는데 약 보름동안 이동해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그동안의 배멀미로 인한 후유증으로 속에 있는 똥물까지 다 쏟아냈다”

 ▲ 하이난섬에서의 생활은?

 “우리가 도착한 곳은 비행장 건설장이었다. 우리들은 중대별, 분대별로 조편성이 이루어 졌다. 구루마 1개에 5명씩 조가 편성되어 흙으로 비행기 방공구를 만드는 작업을 했다. 일을 잘 못하면 곡괭이 자루로 심한 구타를 당했다”

 “일본인들이 말했던 6개월 후의 교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머리 좋고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그래도 고생을 덜했다”

▲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혀 몰매를 맞고 손목을 뒤로 결박당한 채 메달려 있다 손목 뼈가 튀어나왔던 상처가 아직도 남아있다. ⓒkonas.net

 “세월이 지날수록 매맞아 죽고, 병들어 죽고하는 인원들이 속출했다. 그래서 많은 인원들이 도망을 감행했다. 붙잡히면 본보기로 죽을때까지 두들겨 맞았다”

 “나도 탈출을 시도하다 2번이나 붙잡혔다. 수많은 구타를 당했다. 맞다가 혼절하면 찬물을 끼얹져 정신이 돌아오면 또 다시 매질을 했다. 탈출을 시도했던 동료 두명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 그런데 나는 운이 좋아서 인지 생명을 부지했다. 당시 두 손목을 뒤로 결박당한 채 오랫동안 메달려 있어서 그때 손목 뼈가 튕겨져 나왔는데 지금도 그 상처가 남아있다”

 “이 후 3번째 탈출을 시도해 산에서 약 3개월 동안 뱀 잡아먹고 화전민이 일궈놓은 감자를 몰래 캐먹으면서 생활하다 1954년 초여름 쯤 중국인 마을로 내려왔다”

 “그곳을 탈출하기 전에 송장 배달과 매장하는 일도 한 적이 있었는데 하루에 4〜5구의 송장 배달을 했다. 내손으로 묻은 인원만도 5〜6백 명은 족히 된다. 아는 사람은 깊이 묻어 주기까지도 했다. 배가 너무 고플 때는 사자밥도 몰래 먹었다.

 ▲ 본국 귀국 후 생활은?

 “광복 후 부산으로 들어왔는데 그때 같이 온 사람들은 500여 명이 되는 것 같았다. 이 사람들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위안부, 광복군, 독립군들도 있었다고 주변의 얘기로 들었다”

 “부산에서 고향으로 가는 여비로 천원을 받고 갔는데 집에 도착하니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하이난섬에 갔다온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남쪽으로 내려와 생활하다 6·25전쟁에 참여했다. 지금은 6·25참전 국가 유공자로 나오는 생활비를 가지고 근근히 연명하고 있다.

 ▲ 올해 처음으로 영관장교연합회와 용주사 주관으로 실시하는 ‘일제 강제학살 천인갱 영령 추모제’에 참석했는데 소감은?

 “우리나라에서 일반 시민단체에 의해 학살당한 그들의 영령을 위한 ‘추모제’가 7년 동안 실시되고 있는 것을 처음 알았다.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우리를 생각해 주는 시민단체가 있다는 것에 그 감사한 마음을 이루 표현할 길이 없다”

▲ 일본의 한 시민단체가 '천인갱' 사건을 저지른 일본의 만행을 조사하여 용주사 혜월 스님한테 보낸 하이난섬 '해군부대최종배치' 자료. ⓒkonas.net

 “오늘 행사 하는 것을 보니 국가에서의 지원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권오강 영관장교연합회 회장님의 말을 들어보니 2005년 하이난섬 현장 확인 이후 정부에 보고서도 제출하고 정부차원에서 행사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해 온 것 같은데 진척이 없는 것이 마음 아프다”

 “정부는 하이난섬 강제 징용에 따른 희생자 조사를 면밀히 해서 이곳 용주사를 임시영령 안치소로 지정해 주고 위령제 행사를 국가에서 주관해 주었으면 한다”

 이날 인터뷰는 행사에 참석했던 혜월 스님, 권오강 회장, 최갑석 예비역 장군, 박상준 유격군 전우회 총연합회장 등이 자리를 함께 했다.

 또 이 자리에는 일본의 한 시민단체가 ‘천인갱’에 대한 진상 규명 위원회를 만들어 그간의 조사 내용을 용주사 혜월 스님에게 보낸 자료가 공개되었는데 여기에는 ‘海軍部隊最終位置’라는 일본군의 배치와 연명부가 명시되어 있다.(Konas)

코나스 이영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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