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 칼럼 글씨확대글씨축소스크랩인쇄

38선 봉쇄...북한 단독정권 수립...분단고착 ②

Written by. 양동안   입력 : 2012-11-10 오후 1:50:02
공유:
소셜댓글 : 0
twitter facebook

 대한민국 건국은 공산화통일 저지를 위해 추진되었다.

 소련군과 북한공산세력은 이처럼 한반도를 분단시켜 북한을 공산화하면서, 사회주의화된 북한을 기지로 삼아서 남한마저 공산화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물론 그러한 투쟁은 남한의 공산세력을 비롯한 좌익세력들과 협력하여 전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의 애국세력이 취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하나의 길은 남한을 정부 없는 혼란상태로 방치하여 조만간 공산화되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남한에 정부를 수립하여 우선 남한의 공산화를 저지하고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정권을 공고히 하여 그것을 토대로 북한을 통일하는 것이다. 이러한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이승만이 이끄는 대한민국 건국세력은 남한의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해 남한 지역에서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북한의 공산정권과 남한의 좌익세력 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적극적으로 방해했고, 중간파 세력의 상당수와 우익진영 내 김구세력도 그에 동조했다. 그들 대한민국 방해세력은 최종적으로는 남북협상을 내세우면서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했다.

 한반도 통일정부 구성을 위한 미국과 소련의 협상(미·소공동위원회 회의)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한반도문제를 조속히 결말짓고자 하는 미국은 1947년 9월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했다. 소련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에 반대하면서, 그 대안으로 1948년 초까지 한반도에서 남북한의 미군과 소련군을 철수하고 한국인들끼리 협의해서 통일정부를 구성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남북한의 좌익세력은 소련의 미-소군 조기철수론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 한국문제의 유엔 상정이나 유엔총회의 한국문제 결의를 격렬하게 반대했다. 북한의 정권인 북조선인민위원회는 1947년 가을부터 연말까지 소련의 미-소군 조기철수론을 지지하고 한국문제의 유 엔 상정 및 유엔총회의 한국문제결의를 반대하는 군중 대회를 북한 전 지역에서 개최했다.

 그와 병행하여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은 1947년 10월 초 남북한의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한 자리에 모여 협상을 가질 것, 즉 남북협상을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남한의 중도좌파에 속하는 군소 정당과 한독당 내의 일부세력은 소련의 미·소군 조기철수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남북요인회담(남북협상)에 동조했다.

 1947년 12월 중순까지도 남북협상에 반대하던 김구와 김규식이 1948년 1월 하순 남북협상에 동조하고 나섰다. 양김의 남북협상 동조로 이승만 세력의 대한민국 건국 노력은 큰 타격을 받았다. 이승만은 남북협상으로 이탈한 김구와 김규식을 되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실패했다.

 5·10선거의 양상

 1948년 3월 17일 국회의원선거법이 발표되었고, 3월 29일부터 4월 9일까지 선거인등록을 실시하고, 3월 30 일부터 4월 16일까지 입후보자등록에 이어, 5월 10일에 투표를 실시하기로 정해졌다. 건국주도세력이 이러한 일정에 맞추어 5·10선거를 준비하고 있는 동안, 남한 사회는 내란에 가까운 혼란 상태에 처했다. 그러한 혼란 상태는 좌익세력 및 그와 연대한 중도파세력과 김구세력이 남한총선을 저지하기 위해 무장폭동을 포함한 다양한 방법의 투쟁을 전개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선거인 등록을 저지하기 위해 유권자들을 회유 협박하고 선거인 등록업무를 보는 공무원과 선거인 등록업무와 연관된 시설을 파괴하는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좌익의 극렬한 5·10선거 저지투쟁은 남북 협상에 동조한 중도파와 김구의 세력에 의해 정치적·선전적으로 지원되었다. 김구·김규식과 중도파세력은 훗날 모두 거짓으로 들어난 주장들을 하면서 대중으로 하여금 선거를 보이콧 하도록 유도했다.

 남북한의 좌익세력과 남한의 중도파 및 김구세력은 남한총선저지를 위해 남북협상이라는 카드도 이용했다. 북한 정권의 계획에 따라 남북협상회의(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는 4월 19일 평양에서 개막 되었다. 회의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일방적으로 짜놓은 각본대로 진행되었다.

 평양회의에서는 3개의 중요문서가 채택되었는데, 그것들의 기본내용은 북한지역에서 실시된 소련의 정책과 북한에서 진행된 공산단독정권의 수립과 사회주의화가 옳다고 인정해주는 것인 동시에 남한지역에서도 북한지역에서 전개된 것과 같은 일들, 즉 사회주의화가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촉구하고, 평양회의에 참석한 남한지역 정당 단체들이 5·10선거의 저지를 위해 결사적으로 투쟁할 것을 결의하는 것이다.

 5·10선거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선거를 저지하려는 좌익세력과 남북협상파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남한 국민들의 정부수립욕구가 고조되고, 경찰과 우익진영의 선거보호 노력이 효과를 거두어 성공적으로 진행 되었다.

 4월 9일에 마감된 선거인등록에서 매우 많은 유권자들이 등록했다. 유권자들의 선거인등록률에 관하여 선거감시활동을 전개한 유엔위원단은 79.7%(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96.4%)라고 발표했다.

 5·10선거에는 통상 알려진 것과는 달리 다양한 정치성향의 많은 후보자들이 입후보 했다. 입후보자 총 수는 948명이었으며, 5·10선거의 평균경쟁률 4.7 대 1은 그 이후의 한국 국회의원선거에 있어서의 지역구 평균경쟁률 4.6대 1보다 높다. 5·10선거 입후보자들의 소속 정당과 단체는 48개나 되었고, 무소속 출마자도 417명이었다.

 입후보자의 소속 정당에는 한독당 청우당 등 남북협상에 참여한 정당도 있었고, 민중당과 민족사회당 등 중도파 정당도 있었다. 무소속 출마자 중에는 조봉암(인천)·김약수(부산) 등 중도파 정치인들이 매우 많았다

 투표율도 높았다. 유엔위원단의 통계에 따르면, 선거인등록자 대비 투표율은 89.8%(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발표한 투표율은 95.5%)였다. 이날의 투표에 의해 당선된 198명(당시 국회의원 정원은 인구 10만 명당 1인씩 계산하여 총 200명이었으나, 제주도의 2개 선거구에서 좌익의 무장폭동사태로 인해 투표를 진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선자는 198명이 된다)의 당선자들을 정당·단체별로 분류하면, 무소속 85, 독촉국민회 54, 한민당 29, 대동청년단 12, 기타 군소 정·당 단체 소속 18명 등이다.

 5·10선거의 분위기는 5·10선거를 감시했던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5·10선거에 관한 보고서가 선거준비 기간 및 투표일에 상당히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되었고, 선거인등록율과 투표율은 높았으며, 투표결과는 선거인들의 자유의사의 표현이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실에 의해 확인된다.

 5·10선거에서 당선된 제헌의회 의원들은 5월 31일 국회를 개원했으며, 이승만을 국회의장으로 선출했다. 제헌의원들은 7월 17일 헌법을 제정했다. 이 건국헌법의 내용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와의 조화를 도모하는 정신에 따라 작성된 것이었다. 건국헌법은 대통령중심제 정부형태를 채택했다.

 헌법에 따라 7월 20일 국회에서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어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며, 이승만은 8월 4일까지 행정부 구성을 완료했다. 이승만 행정부는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을 거행했으며, 이로써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이 완료되었다.

 친일파는 건국세력에서 배제되었다.

 친일파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지지했다. 남한이 공산화된 것보다는 자유민주주의체제를 가진 국가가 건국되는 것이 자기들에게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건국주도세력은 친일파를 건국주도세력에서 배제했다. 친일파를 건국주도세력에 포함시키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당성을 훼손할 것이기 때문이다.

 친일파가 대한민국 건국세력에서 배제되었다는 것은 두 개의 법률에 의해 명확히 입증된다. 그 하나는 5·10선거를 위한 선거법이다. 이 선거법 제2조는 고위 친일파들의 선거권을 박탈했다. 이 선거법 제3조는 하위 친일파들의 피선거권을 박탈했다.

 좌익분자들의 주장처럼 친일파들이 대한민국 건국을 주도했다면, 선거법에서 자기들의 피선거권과 선거권을 박탈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다. 건국을 위한 국회에 들어가지 않고 건국을 주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른 하나는 제헌국회가 제정한 건국헌법이다. 건국 헌법의 부칙 제101조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서기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 반민족행위(친일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못을 박았다.

 대한민국의 건국을 친일파가 주도 했다면, 자기들이 만든 나라에서 자기들을 처벌할 법률을, 그것도 현대 형법의 금기인 소급입법을 통해서 제정할 것을 헌법에 못박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대한민국 건국주도세력은 헌법에서 천명한대 로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 첫 번째 법률로 친일파 처법법을 제정했다.

 대한민국에서 친일파의 숙청이 제대로 안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건국을 친일파가 주도했다고 말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당성을 훼손하기 위한 거짓 선전에 불과하다.(Konas)*본 칼럼은 충호지10월호에도 게재되었음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현대사상연구회 회장)

*국보법개정서명바로가기 : http://konas.net/event/signature.asp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관련기사보기
facebook twitter 인쇄하기 책갈피저장 메일보내기
소셜댓글
로그인선택하기 트위터 페이스복
원하는 계정으로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여 주십시요.
입력
    • 입력 된 100자 의견이 없습니다.
1
    2017.6.26 월요일
핫클릭 뉴스 더보기
포토 & 동영상 더보기
쓴소리/단소리 더보기
트럼프 미국대통령의 10억달러 대금..
트럼프 미국대통령의 10억달러 대금청구를 바라보.. 
네티즌칼럼 더보기
6.25 67주년 10만 인파 사드..
6.25 67주년 10만 인파 사드배치촉구 대수천 및 일반국.. 
깜짝뉴스 더보기
日 야쿠자도 고령화…50대이상 조직원 40% 넘어·80세 두목도
일본 폭력조직인 야쿠자도 고령화 사회의 그늘은 비켜가지 못한 ..
세상사는 이야기 더보기
이래서 소통은 일방(一方) ..
코나스 웹진 구독하기
  • 성명서/행사정보
  • 관련사이트
  • 기사제보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