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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기 전에 북한 도발과의 연관성부터 분석해야

Written by. 김성만   입력 : 2015-01-09 오전 9: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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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최고위급회담’ 가능성을 언급한 이후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논의가 연일 우리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류길재 통일부장관은 지난 8일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려면 상당한 정도로 남북 간 사전 대화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류 장관은 이날 국회 외교통일위에 출석해 “정상회담이 열리면 획기적인 획을 긋는 그런 정도의 의미를 가져야 한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다만, 류 장관은 “2015년 1월1일 제가 북한의 신년사에 대해 긍정 평가를 하면서 이산가족이나 최고위급회담을 포함해서 모든 현안을 다 논의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면서 사전 협의과정을 통해 정상회담 문제도 논의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류 장관은 남북정상회담 등을 위한 남북 비공개 접촉 필요성에 대해서도 “여건이 마련되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 당시 DJ정부의 대북밀사로 나섰던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의원은 2015년 1월5일 “노무현 정부가 임기 첫해(2003년)에 남북정상회담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2007년에야 정상회담을 열어 왕창 합의했으나 제대로 실천이 안됐다”며 “박 대통령도 일할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기회인 올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리고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청와대비서실장으로 정상회담을 총괄 준비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의원이 최근 캠프 내부회의에서 “노무현 정부 때는 남북정상회담이 임기 말에 성사되면서 남북관계 발전에 지속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고 단절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며 “박근혜 대통령도 정상회담을 한다면 임기 중반인 올해가 가장 적절한 시점이다. 그래야 이후 가시적이면서도 영속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하면서 “이를 위해 야당도 진심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언급을 했다고 측근이 8일 전했다.

 그런데 북한은 1990년대 후반부터 우리 정부가 대북지원, 남북정상회담 추진 등 화해협력정책을 추진할 경우 도발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몇 가지 사례만 살펴보자.

  사례1 : 2차 정상회담 추진과 북한 제2연평해전 도발(2002)

  우리 대통령 특사(통일부장관)가 2002년 4월 3일~6일 평양을 방문했다. 김정일과의 회담에서 ‘2차 남북정상회담과 국방장관회담 개최, 개성공단 건설, 남북철도·도로 연결 등’을 김정일에게 요구했다. 김정일이 대부분 우리의 요구에 합의했다. 정상회담의 개최 장소에 대해서만 서로 이견이 있을 정도로 진척되었다. 김정일이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정상회담을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김정일의 서울답방을 고수하다가 2002년 4월22일에 “조기에 정상회담을 갖자는 데 동의하며, 개최시기는 2002년 6월 하순에서 7월 중순 사이가 좋겠으며, 장소는 판문점 우리 측 ‘평화의 집’으로 하자”고 북한에 제안했다.

 북한은 이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의 회신을 보내왔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그렇게 경색된 것은 없었다. 2002년 4월 말 금강산에서 제4차 이산가족(849명) 상봉이 실현되었고 대북 비료지원(20만 톤)도 5월 말까지 제공됐다. 그리고 금강산 관광사업, 제주도 도민 250여 명의 방북(5.10~15), 한민족복지재단 대표단 방북, 6·15 공동선언 2주년기념 남북공동행사(금강산) 등의 민간교류와 북측에서도 경수로 안전통제요원 25명의 방한교육(7.2~28) 등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었다(임동원,『피스 메이커』(서울 : 중앙북스, 2008), pp.592-635). 북한은 2002년 6월29일 우리해군 참수리357정을 기습 공격하여 격침했다.

  사례2 : 3차 정상회담 추진과 북한 대청해전 도발 및 천안함 폭침(2009/2010)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8월15일 8·15 경축사에서 “언제, 어떤 수준에서든 남북 간 모든 문제에 대해 대화와 협력을 시작할 준비가 돼 있다”고 선언했다. 약 1주일 뒤 김대중 前 대통령 조문차 서울에 온 북한조문단(김기남 비서 등)은 청와대를 방문하고 이 대통령에게 “정상회담을 할 수 있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2009년 10월 임태희 당시 노동부장관과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의 싱가포르 비밀접촉은 이런 분위기 속에 성사됐다. 이때도 北은 식량·비료 지원을 당연한 일처럼 요구했고 이것을 들어주려면 5억 달러, 우리 돈으로 5천억 원 이상이 필요했다.

 2009년 11월7일과 14일 개성 모 여관에서 열린 남북 당국 간 후속 비밀회담은 최종 결렬됐다. 소식통은 “당시 북측 원동연 통일전선부 부부장(차관급)은 정상회담 합의문 초안까지 내밀었는데 정상회담 대가로 수십 만 톤의 쌀과 비료를 내놓으라는 내용이라 도저히 받을 수 없었다”고 했다.

 다른 소식통은 “만약 北의 식량·비료 지원 요구를 받아들였다면 정상회담까지 가는 단계마다 ‘현금’ 같은 뒷돈 요구도 나왔을 것”이라고 했다.

 북한은 2009년 11월10일 대청해전을 도발했다. 북한은 2010년 1월초 ‘보복 성전(聖戰)’을 거론하며 1월 27일~29일 서해5도 우리수역에 대량의 해안포·방사포를 사격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10년 1월28일 영국 방문 중 B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조만간이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없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연내에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본다”고 언급했다. 북한은 2010년 3월26일 천안함을 폭침(爆沈)했다.

  사례3 : 3차 정상회담 추진과 북한 연평도 포격(2010)

  북한은 2010년 7월 우리 정부에 정상회담 추진을 타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명박 대통령은 2010년 9월10일 러시아 방문 중 국영TV과의 인터뷰에서 북한 후계구도와 김정은에 대해 언급하면서 “김정일 위원장하고 만나게 될 때 옆에 같이 있으면”이라고 언급했다. G20서울정상회의(2010.11.11~12) 성공을 위해 우리 정부가 제18차 남북 이산가족상봉을 성사(2010.10.30~11.5, 금강산)시켰다.

 이명박 대통령은 2010년 11월14일 일본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남북정상회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는 질문에 대해 “한반도 평화가 전제이며, 다음이 경제협력이다. 그렇게 하면 자연히 통일문제가 될 것이다. 한반도 평화를 유지하고 북한의 비핵화라고 하는 큰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언제라도 정상회담이 가능하다고 취임 이래 일관되게 언급해왔다.

 그러나 국내정치적 목적으로 (회담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북한은 2010년 11월23일 연평도를 무차별 포격했다.

 그 외에도 북한은 1차 남북정상회담(2000.6.15) 전해인 2009년 6월에 제1연평해전 도발, 9월에 서해NLL을 부정하고 새로운 ‘해상분계선’ 설정(서해5도 주변 우리수역을 북한수역에 포함), 2000년 3월에는 ‘서해5도 통항질서’(서해5도 출입선박은 북한이 설정한 항로대 이용 강요)를 선포했다. 그리고 북한상선단(10여척)이 2001년 6월 2일~15일간 우리 영해·제주해협·NLL을 침범하고 유린했다.

 이같이 북한은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는 과정의 전후(前後)에 과감한 대남도발을 감행하고 있다. 우리 군은 기습을 당하고 있다. 면밀한 분석을 통해 대북정책 수립에 참고할 필요가 있다. 국방부의 조치를 기대한다. (Konas)

김성만 예비역해군중장(재향군인회 자문위원, 전 해군작전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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