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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자원 병역이행 병사 군생활 수기⑬] 나의 나라, 대한민국

Written by. 성승현   입력 : 2016-09-19 오전 9:4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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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내용은 병무청이 주관한 「지원 병역이행 병사 군생활 수기 2016」‘입선’ 글이며, 자원입대한 병사들의 계급은 체험수기 응모 당시의 계급임(편집자 주)

 “너는 군대 갈 마음이 있니?” “당연하지! 나도 남자인 걸!” 어릴 적 식사하던 중 아버지와 어머니가 장난스럽게 나에게 한국으로 돌아가 군대에 입대할 의향이 있는지 물어보신 때가 있다. 부모님의 이러한 장난 섞인 물음을 나에 대한 도발로 생각한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고, 부모님은 이런 내 모습을 보고 귀엽다는 듯 웃으셨다. 사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건, 부모님은 처음부터 내가 한국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가길 원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의기야양하게 대답하는 나를 보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던 것이었다.

 약 3년 전, 나는 태어난 곳이자 내 고향인 과테말라를 떠나 부모님의 뜻대로 대한민국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색다른 문화와 환경 속에서 나는 정체성을 빼앗긴 것만 같았고, 온갖 불만과 악감정을 키워가며 이 모든 것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부모님을 원망하기시작했다. 늦게 찾아온 사춘기 덕에 뭐든 뜻대로 안되고 나면 남들과 ‘부적합한 환경’을 탓해야지만 직성이 풀렸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 중 나는 대한민국이 아닌 과테말라에서 태어난 재외국민이라 소개하자 동기들과 교수님은 엄청난 호기심과 함께 관심을 가져주기 시작했다. 영어와 스페인어에도 능통한데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가야만 하는 21개월의 병역의무를 지지 않아도 되는 특혜를 부러워하던 친구들과 수강생들의 반응을 들으며 나는 어리석게도 기분이 좋기만 했다.

 출생지를 떠난 후에 처음으로 존중과 환영을 받은 것 같아 짧지만 값진 순간이었다. 그렇게 등교를 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해 주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어떤 행복한 꿈을 꾸어도, 그때 그 현실이 더 행복할 것만 같았다. 처음 대한민국이라는 땅을 밟았을 때 아무도 날 기다려주지도, 필요하지도 않았던 그 외롭던 시절과는 다른, 내게 친절하고 다정다감하게 다가오는 대한민국을 만끽하면서, 나의 다른 조국, 대한민국을 비난하고 싫어서 부모님을 절망했던 과거에 대한 반성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크나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서는 내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러워 용기 내어 부모님께 전화로 용서를 빌었다. 집 나간 자식을 찾은 마냥 당연하게도 기쁘게 반겨주실 줄만 알았던 어머님은 억지의 슬픈 웃음소리를 자아내며 나에게 힘없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적응이 돼 가고 있다니 기쁘구나. 공부는 잘 되가니? 나는 점점 한국말을 까먹고 있어 큰일이다.” 뭐라고 대답을 하지 못하고 나는 그저 조용히 뜨거운 눈물을 글썽거렸다.

 예상치 못한 어머님의 반응에 나는 아직까지도 그때 왜 그렇게 슬퍼했는지 기억하고 있다. 차라리 어머니가 큰소리로 이제야 깨달았냐며 혼을 내주었으면 했지만 나의 어머니는 몹시 울적해 하고 지쳐 있었다.

 어머니도 25년 전 대한민국을 떠나 낯선 과테말라에서 외로움, 언어장벽과 싸워가며 나와 누나 둘을 키우셨다. 바쁜 일상생활로 인해 고향을 자주 찾아가지 못했던 어머니의 “한국말이 점점 잊어져 간다.”는 한숨 섞인 말이 입에서 나오는 피눈물로 들리기 시작했다. 조국과 그의 국민들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던 우리 어머니는 25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생활하면서 고향과 그곳의 향기를 매순간 그리워하고 돌아가고 싶으셨던 것이었다. 칭찬과 위로를 원해서 걸었던 전화는 또 다른 고민을 나에게 안겨주었다.

 그날 밤, 평소와는 다른 기분으로 대학수업을 끝마치고 모두가 잠든 새벽 2시에 귀가하여 현관문을 열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방에 들어섰다. 불을 켜는 순간 익숙한 구조와 형태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정리가 안 돼 있던 책상, 악취가 심해 닫혀있던 옷장, 그리고 작고 불편한 침대. 다 그대로였지만 낯설었다. 다른 사람의 집에 쳐들어온 것만 같은 느낌이 가시질 않아 잠을 설쳤다. 

 그리고 그날은 나의 가치관에 변화를 준 지중한 시간이었다. 내가 대한민국을 내 집과 내 조국으로 받아들이고 대한민국 남자로서 희생을 해야지만 부모님도 나에 대한 당당함과 함께 편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겠다는 생각에 나는 자원입대라는 큰 결심이란 것을 하게 됐던 것이다.

 예상대로 주변에서는 반대가 심했다. “왜 굳이 시간을 낭비하려 하나”, “군대 안 갈려고 너처럼 영주권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평생 후회할 짓 하지 마라.” 그렇게 듣기 싫은 말이 이어졌다. 애국가도 아직 다 못 외운 나보다도 더 한심한 사람들의 얘기들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정해졌고 그렇게 4월 6일, 나의 입대일은 달력에 동그라미로 쳐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다시 새로운 환경의 시작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나는 육군훈련소에 도착했다. 나와 같은 짧은 머리를 하고 있던 청년들, 이제는 내 전우가 될 사람들과 그들을 떠나보내기 싫어하는 그들의 가족을 보니 왠지 모르게 뒤늦은 후회가 되면서도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차마 안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 한번 내 의지로 왔다는 다짐을 기억하며, 용감하게 연병장으로 향해 군인이 되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27연대 5중대 1소대 1분대 10번 훈련병. 훈련소에 도착하자마자 내 소속과 번호를 머릿속에 반복하면서 주문처럼 외웠다. 성승현이라는 내 이름은 이미 내 이름이 아니었다. 모두가 훈련병이라는 이름아래 본격적인 진짜 사나이가 되기 위한 훈련과 생활이 시작되었다. 날이 거듭될수록 서먹함은 사라졌고, 전우애라 부르는 그 무언가의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기쁜 일이건 슬픈 일이건 모든 감정을 내 옆의 나와 같은 훈련병들과 공유했다. 처음은 고되기만 했던 훈련들도 전우들과 함께하면 할수록 더 힘이 났고 마지막엔 웃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딱딱한 환경과 모든 명령에 복종하고 ‘해야만’ 하는 그런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반감이 들기보다는 옆의 전우들과 써가는 하루하루의 추억이 너무 소중했다.

 처음엔 좁고 불편했던 침상이 이제는 늠름한 전우들과 함께라면 웬만한 고급 침대보다 훨씬 달달한 꿀잠을 주었다. 마지막 훈련이 끝나고 뒤돌아보니, 그렇게 느리게만 느껴졌던 5주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제는 나의 형들로 느껴졌던 동기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현실이 무척 섭섭하고 안타까웠지만, 서로 의지하면서 다함께 건강하게 수료를 할 수 있어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흩어진 후에도 각자 부대에서 주어진 임무를 맡아 멋지게 수행해 나갈 모습들을 생각하며 설레었다. “충성! 신고합니다. 이병 성승현은 국군수송사령부로부터 제1철도수송지원대로의 전입을 명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이렇게 나의 군 생활 다음 챕터를 힘찬 목소리와 함께 시작을 했다. 부족하고 배울 게 많은 막내 생활로 시작했고, 조금씩 후임들이 생기자 든든한 사나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반복된 일상이 너무나 무료해 나는 지쳐버리고 말았다. 처음에 새겼던 다짐이라든지, 줄기차게 세웠던 계획들이 하나하나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홈페이지에 올라온 ‘한빛부대 6진 파병 선발’이란 글을 보았을 때 예전의 열정 가득했던 나의 모습이 갑자기 떠오르며 뭔가 모를 두근거림을 느꼈다. 훌륭하고 탁월한 지원자들 속에서 선발이 된다는 것은 매우 힘든 것임을 알았지만, 평생 후회할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지원서를 작성했다.

 선발 결과 공지를 기다리며 나는 매일같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태극기를 달고 아프리카에서 땀 흘리고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너무나도 간절했는지 운 좋게 선발의 소식을 들을 수가 있었다. 기분이 너무 좋아 떠나가려는 나를 보며 아쉬워하던 선후임들 앞에서 난 눈치도 없이 뛰어다니며 승리의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3일 뒤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소집 장소인 국제평화지원단으로 향했다.

 그러고 3개월 동안 정신과 체력을 단단히 단련시키며, 소집교육과 파병준비기간을 마치고 우리는 남수단에서 희망과 평화를 심기 위해 비행기에 올라탔다. 20여 년의 내전 끝의 독립한 남수단의 첫인상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파병을 드디어 시작하게 되어 들떠있고 신나 있던 나는 남수단의 열악하고 험악한 현장을 보는 순간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버렸다. 주어진 직책과 임무 선 안에서만이 아닌 최선과 헌신을 다해 재건지원에 임할 것을. 처음에는 무식하게 할 수 있는 건 다 하려고 달려들었다.

 그러자 난민보호소에 급수지원을 나가 죽어가는 목숨들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무력함을 느꼈고 의지가 떨어져 갔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희망을 주는 것, 그뿐이었다. 사탕을 쥐어주기만 해도 행복해하는 현지 어린이들을 보면서 나는 인간은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소유하였을 때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깨닫고 반성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는 자원입대도, 파병도, 무엇인가를 이뤄내고 성취감을 높이기 위해서 결정한 것들이었을까? 행복의 대한 정의를 다시 고민해 보며 나의 남은 파병생활을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기로 했다. 내가 진실로 행복을 느낀 순간은 현지인들과 다양한 국가에서 파병을 온 군인들과 서로 다른 문화를 서로가 공유하며 상대방과 나의 마음이 통하였다고 느끼는 아주 찰나 같은 순간들이었다. 3년 전 대학교에서 친구들이 처음 생겼을 때처럼 말이다. 

 누군가가 내게 감사할 때, 내가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마음을 알아주었을 때나 서로를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눈빛을 서로 교환할 때의 행복은 그 어떤 물질적이거나 육체적인 쾌락보다도 훨씬 아름다웠고, 아프리카의 무더위를 잊게 해주는 활력소였다.

 이 ‘행복’은 나의 군 생활이 중점이자 나를 커다란 마음을 갖도록 성장시켜준 힘이다. 이 행복함이 쭉 간다면 앞으로 남은 5개월의 파병생활도 뜻 깊을 것 같다. 한빛부대의 헌신적이고 성공적인 활동상을 널리 알리는 부대원인 것이 너무나 영광스럽고 감사하기만 하다.

 자원입대를 결심했던 그 때에 그토록 원했던 보람찬 군 생활을 준 한빛부대는 그야말로 최고의 선물이다. 대한민국의 찬사와 남수단의 발전을 위해 그 누구보다도 값진 땀을 흘리는 우리 한빛부대가 진정한 ‘태양의 후예’이다. 끝까지 열정과 힘을 다해 임무수행을 마칠 그날까지.

 “한빛부대 열정을! 남수단의 평화로! 우리가 바로 대한민국!” 이렇게 나도 대한민국 남자인 것을 부모님과 모든 분들께 자신 있게 알리고 증명한다.(konas)

남수단재건지원단 상병 성승현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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