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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자원 병역이행 병사 군생활 수기⑯] 바나나와 대한민국 사이에서

Written by. 박정훈   입력 : 2016-09-20 오후 12: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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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내용은 병무청이 주관한 「지원 병역이행 병사 군생활 수기 2016」‘입선’ 글이며, 자원입대한 병사들의 계급은 체험수기 응모 당시의 계급임(편집자 주)

 우리 가족은 미국이란 나라와 퍽 인연이 깊은 편이다. 나의 외할아버지께서는 1972년 공군 대령으로 전역하신 후 당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불안정했던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셨다. 고등교육을 미국에서 받은 어머니께서는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미국 유학을 권하셨고 나는 자연스럽게 중학교 때부터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던 때, 나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도 고전했지만 문화적으로 미국 친구들과 적응하는 데에도 남모를 고충을 겪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나이에 관계없이 서로에게 손을 흔들거나 가벼운 포옹으로 인사를 하는데, 어른들만 보면 반사적으로 고개를 꾸벅 숙이는 나의 모습에 선생님들은 “나에게 절(bow)할 필요가 없다.”며 내게 웃으며 말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또 하루는 한국계 미국인이었던 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이미 숙지하고 있던 단어의 새로운 뜻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바나나’란 단어였다. 흔히 열대과일로만 생각했던 바나나의 인종적 은어의 뜻은 바로 ‘미국인의 사고방식을 가진 아시아인’이었던 것이다. 딱히 비하성의 단어는 아니지만 이 은어의 뜻을 알게 된 후 난 처음으로 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내 정체성에 대한 의문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범주를 넘어서 ‘나는 누가 될 것인가?’라는 것이 좀 더 강했다. 당시 나보다 유창하게 영어도 잘하고 미국 친구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던 한국계 미국인 친구들이 일부분 부러웠기 때문에 내 스스로 자존감을 높이기보다는 내 자신을 주위 환경에 맞춰 흡수되려는 노력을 더 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나는 미국이란 다민족국가에서 나만의 고유한 특색과 독특한 시각을 제공하려는 의지를 가지기에는 내 뿌리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교감이 부족했고 지속적으로 내 자신을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내 모국(home-country)에 대한 의미도 같이 퇴색되어져 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학업과 교우관계에도 서서히 적응이 되어 여유가 생길 때쯤, 나는 학교의 추천으로 한 리더십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프로그램의 필수 일정 중 하나는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내 역사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데만 그치고 있었던 일정에서 뜻하지 않게 내 마음을 움직인 곳이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월남전 추모비 옆에 자리하고 있던 한국전쟁 추모 공원이었다.

 판초 우의를 입은 미군들을 형상화한 공원 옆에는 검정색 비석에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었다.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의 자유를 지키라는 부름에 응한 미국의 아들딸들을 기리며” 라는 문구를 읽는 순간, 내 안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며 울컥하는 감정이 나를 압도했다. 희생정신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을 시작으로 조국과 애국심 같이 머리로만 알아듣던 단어들이 가슴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미국이 자국민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공원 앞에서 역설적으로 나는 지금까지 내가 당연시하며 누리고 있었던 자유와 나의 조국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나의 태생적 권리라고만 생각했던 자유는 내게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세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려가며 수호해온 숭고한 가치이자 유산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깨달음을 얻은 이후 나의 다음 결정이 바로 입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당시 나는 아직 중학생에 불과했고 그 순간에 군 복무를 결정해야 되는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소한 그때 나는 내 조국은 대한민국이고 앞으로도 그 사실은 절대 변함이 없을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뿌리에 대한 확신이 생기자 나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자연스럽게 해답을 찾을 수 있었고, 나는 ‘바나나’가 되기보단 당당한 우리나라의 국민이 되어 세계라는 무대 앞에 서고 싶었다. 시간은 계속 흘러 오랜 미국 생활 끝에 대학교 3학년이 되자 난 영주권을 발급받을 수 있었고, 졸업을 앞둔 2015년 초에는 입대에 관한 확실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당시 나는 진학하고 싶었던 대학원에서도 이미 합격 통지를 받은 상황이었고, 지난 10년 넘게 생활하던 터전을 떠나 군대라는 미지의 조직에 입대할 생각을 하니 마음처럼 쉽사리 결정을 내리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미 입대시기를 놓쳤던 터라 이번 기회에 입대하지 않으면 나이가 많아질수록 상황은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중학교시절 처음으로 조국에 대한 의미를 깨달은 이후 세상 앞에 당당한 대한민국 국민이 될 것이라는 나의 결심을 배반할 수는 없었다.

 또한 나는 후에 내가 어떤 사람이 되든지 내 자신에게 떳떳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모두가 어떤 형식으로든 군 복무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나라의 영주권을 이용하여 우리 모두가 나눠서 짊어져야 할 책임을 합법적이라 하더라도 외면해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미 예비군이 된 친구들에게도 그들의 의견을 물어보았는데, 무조건 군 생활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손쉬운 시간이었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속담인 ‘죽지 않는 이상 강해진다(what doesn't kill you, only makes you stronger)’라는 말처럼 전역 후 이제는 뭘 해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미국 본토에 취업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군 복무 경험이 기업들에게 상당히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주었다고 주장하는 친구들도 여럿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작년 5월, 내 특기인 영어를 살려 어학병으로 육군훈련소에 입소하게 되었다.

 입대한지 1년째가 되는 지금, 내가 훈련소에 처음 입소하고 나서부터 전입하게 된 1철도대에 오게 되기까지 지금도 군대에 관해 내가 가장 높이 사는 부분 중 하나는 부대가 보여주는 병사들 개개인에 대한 관심이다. 솔직히 나는 입대 전, 말로만 듣던 군대 문화를 극단적으로 폐쇄적이고 수직적인 문화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의 의견은 늘 묵살될 것이고 철저한 계급 중심의 사회로서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수동적인 집단일 것이라고 짐작하곤 했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훈련소에서부터 나는 군대가 놀라울 만큼 개개인을 위해 배려해주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각지에서 오는 만큼 각자의 몸 상태나 사연이 다 다르다는 것을 조교나 간부들이 이해하고 있었고, 형평성에 어긋나는 처우는 해 줄 수 없지만, 최대한 규율 안에서 개개인이 군대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예를 들어, 육군훈련소에서는 매일 아침 고혈압이나 저혈압이 있는 친구들의 혈압 측정을 해 주었고, 디스크나 고관절 같은 질병이 있는 병사들에게는 행군 시에 단독 군장을 허용하는 등 사회에서 생각했던 건 보다 훨씬 더 합리적으로 병력관리를 하고 있었다. 신병이 임무수행을 못한다고 무조건 윽박지르거나 얼차려로 위협하지도 않았고, 서로를 존중하며 훈련에 임하는 문화가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1철도대로 전입한 이후에도 간부님들은 나의 고충을 무시하지 않으셨고,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필요한 조치를 해주시는 모습을 보았다. 언론이나 인터넷으로 명확한 사실 확인 없이 퍼지는 몇몇 부조리한 사건들이 군에 대한 이미지를 너무 더럽히고 있지는 않은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가끔씩 발생하는 부조리나 부당한 처사를 겪고 있는 병사들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도 본인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장치인 헬프콜이나 감찰실 등이 항상 마련돼 있다는 것도 군에 대한 나의 인식을 바뀌게 해준 요소들이다.

 더 나아가서, 내 군 생활을 얘기할 때 전우애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사회에서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친구 사귀는 것이 거래처럼 여겨진 적이 많았다. 잘 모르는 사람이 내게 호의를 베풀면 감사하기보단 그의 의도를 의심했었고, 학교나 취업전선에서 무한 경쟁을 하며 남을 눌러야만 내가 유리해지던 관계들과는 달리 군대에서는 나라를 위해 만난 사람들과 같이 먹고 자며 공통의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여정에서 느끼는 말로는 형용하기 힘든 끈끈함이 전역 후에도 내게 큰 힘을 주리라 믿고 있다.

 혹한기 훈련 때 서로 추운 것을 참아가며 몇 개 안되는 핫팩을 함께 나눠쓰던 기억과 당직 근무 후 고생했다며 선임병이 컵라면이라도 하나 챙겨줄 때의 고마움은 사회에서 느꼈던 그 어떤 정보다 진실 되게 느껴졌다. 서로 고마움이 쌓이며 의지하게 되는 과정은 누구나 한번쯤은 겪어봐야 하는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군대를 통해 배울 수 있었던 가장 귀중한 가치는 바로 관점의 중요성이다. 간식 같은 건 별로 입에 대지 않던 내가 훈련소 시절 초코파이 하나를 위해 참 많은 노력을 했었다. 행복이란 주관적인 것이다. 똑같은 환경에서도 누구는 감사하고 누구는 불평한다. 긍정적인 마인드가 중요하다는 말은 입대 전에도 수차례 들었던 얘기지만 한 번도 가슴으로 공감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지금 불안정하고 불행한데 긍정적으로 생각만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결국 나의 선택인 것이다. 나는 오늘 하루를 시작할 때 군대에 있는 내 처지를 비관하며 불평하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고, 또는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행복에 근접해지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내가 군대에 와보니 사회에서 군 생활이 낭비이고 허비하는 시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본인들 스스로 자신들의 군 생활을 낭비했던 것이다.

 군대에서도 내가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자기계발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최소한 우리 부대에서는 내가 공부한다는데 눈치를 주거나 허락하지 않은 간부님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결국 관점의 차이인 것이다. 군 생활을 족쇄라 생각하는 이들에겐 낭비하는 21개월이지만 어떤 이들에겐 분명 멀리 내다보고 내 꿈을 향해 전진하는 도약의 21개월이기 때문이다. 나만의 편협한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세상을 부정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 자신의 잠재성을 스스로 제한하는 것임을 군대에 와서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군 복무가 국방의 의무라는 표현보다 대한민국 국민의 본분이라는 말이 더 맞지 않나 싶다. 상병이 된 지금 나는 의무적인 시각에서 내 군 생활을 바라보지 않는다. 다만 나는 내 스스로 대한민국 국민이 될 것임을 선택했고 그 선택에 맞게 내가 마땅히 지켜야 할 직분을 이행하고 있는 것뿐이다. 더군다나 그 과정에서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성숙해지고 있음을 느끼기에 내가 한 선택에 절대 후회는 없다.

 아직도 같은 민족끼리 38선을 앞에 두고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슬픈 일이지만 현실을 회피할 수는 없기에 우리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당신은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나라를 위해 함께 싸울 것인가? 오랜 기간 타지에서 생활했지만 ‘바나나’가 되지 않기로 선택한 내 자신에게 진심으로 큰 자부심을 느낀다. 그리고 군대가 아니었다면 쉽게 경험해 보지 못할 귀한 배움에 오랫동안 감사할 것이다.(konas)

수송사 1철도수송지원대대 상병 박정훈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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