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 기획/특집 글씨확대글씨축소스크랩인쇄

[2016 자원 병역이행 병사 군생활 수기㉒] 내가 이곳에 온 이유

Written by. 조병진   입력 : 2016-09-23 오후 1:06:59
공유:
소셜댓글 : 0
twitter facebook

 본 내용은 병무청이 주관한 「지원 병역이행 병사 군생활 수기 2016」 산문/질병치유·학력변동 부문 ‘장려’ 글이며, 자원입대한 병사들의 계급은 체험수기 응모 당시의 계급임(편집자 주)

 저에게는 특별한 입대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태어나 처음 밟은 땅은 이곳, 대한민국이 아닙니다. 저는 24년 전 인도네시아의 수도인 자카르타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부모님은 한국분이십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서울에서 음식점을 하셨습니다. 그러다 실력을 인정받아 건설회사 요리사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이직하셨습니다.

 조건은 해외지사근무, 좋은 기회였고 아버지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방글라데시에서 근무를 하셨습니다. 그러다 결혼을 위해 한국으로 오셔서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여 친형을 출산하시고 그때 당시 해외 요식업이 바람을 불어 경험을 살려 인도네시아로 이민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식당을 개업하여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저를 낳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려운 환경 속에 임신중독증 증상이 있으셔서 저를 임신 7개월 만에 출산하게 되었으며, 그 이후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결국 제가 세 살이 되던 해에 쇼크로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은 큰 슬픔을 안고 한국행 비행기로 어머니의 시신을 운반하여 아버지 고향인 전라북도 고창에서 장례식을 치르며 산소에 어머니를 묻었습니다.

 저는 많이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의 충격이 컸는지 아직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아직도 어머니를 잃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많이 아프고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아버지는 많은 고민을 하셨습니다. 형과 저는 한창 커갈 나이고, 어머니의 사랑이 가장 필요할 때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서울의 공항에서 일하는 새어머니를 만나고 제가 다섯 살 되던 해 재혼하게 되셨습니다.

 아직도 새어머니의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병진아 엄마야! 병진이가 힘들고 어려울 때 항상 옆에 있어 줄게, 사랑한다.” 그러며 저를 안아주셨습니다. 저에게 어머니라는 존재가 생겨 너무 행복했고 새어머니를 친모라 여기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새어머니는 시간 날 때마다 인도네시아어를 먼저 공부해 한국말을 잘 못하는 저를 가르쳐 주시고 많은 사랑을 주셨습니다.

 형은 저보다 10살이 많았는데 공부를 잘하여 한국에 외국인학교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노력하여 국제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군에 입대할 나이가 되어 군대에 들어갔는데 국방부에서 통역병으로 군복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저는 초등학교를 다니며 한글을 배우고 새어머니를 따라 문화생활도 하며 대한민국을 배워나갔습니다. 그렇게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저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새어머니는 “병진아 아버지랑 형과 잘 지내고 행복해”라는 말과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머니는 아버지와 많은 다툼이 있었고, 성격이 맞지 않아 결국 이혼을 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저와 형을 전라북도 고창에 있는 큰아버지 댁에 맡기시고 다시 인도네시아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큰아버지 댁에서 신세를 지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다니던 도중 아버지가 오셨으며, 형은 독립하고 저는 아버지를 따라 인도네시아로 다시 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인도네시아에서 요식업을 그만 두시고 인도네시아 왕족에게 공급되는 화장품 공장에 공장장으로 자리를 잡아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 저 또한 아버지의 일을 돕고 열심히 살아갔습니다.

 제가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는 “병진아 한국에 가서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어때?”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한국에서 거주할 때 행복한 나날들을 생각하며 저는 다시 한국에 가기를 결심하였고 전라북도 군산에 아버지의 지인 집에서 신세를 지며 일을 도와드리고, 한국어 공부와 영어 공부 등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공부를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에게 한 통의 편지가 왔습니다. 병무청에서 온 신체검사통지서였습니다. 저는 당시에 군 입대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군대에 대한 이야기를 저에게 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이후 인터넷을 통해 병무청 홈페이지에서 입대에 대한 정보를 얻고 지인들에게 조언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많은 것이 저의 머리에 스쳐갔습니다.

 병무청과 국방부 홈페이지에서는 군복을 입은 장병들, 경계와 훈련을 하고 있는 듬직한 모습까지 만약 ‘내가 저렇게 군인이 된다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저는 일정을 계획하고 광주에 있는 병무청을 찾아갔습니다. 저에게는 매우 낯선 환경이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옷을 입고 신체검사를 하고 있고 그들의 표정은 형형색색의 네온사인과 같았습니다. 순서에 맡게 신체검사를 받았고 그 결과 사회복무요원 판정을 받은 것입니다. 이유는 학력이 중학교 중퇴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사회복무요원으로 가게 된다면 고창에 있는 큰아버지 댁에서 출퇴근 하여야 하는데 큰아버지는 연로하셔서 제가 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왕 가려면 현역으로 입대하고 싶었습니다. 국방부 홈페이지에 있는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병사의 모습 또한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습니다.

 인도네시아 국적을 가지고 있어 인도네시아에서 생활을 한다면 군대를 가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군대 갔다 오면 바보가 된다.”, “군에서 복무하는 시간에 차라리 공부를 하여 열심히 사는 것이 더 낫다.” 등등 부정적인 말이 많았고 그러한 말들이 저에게 많은 고민을 낳게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공장운영으로 인도네시아에서의 생활이 넉넉하지 않지만 인도네시아에서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아 생활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행복하고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비록 서울에서의 짧은 생활과 전라북도에서의 생활이 고작지만 사계절 푸른 날씨와 좋은 생활여건, 친척들과 친구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저를 낳아주신 어머니가 이곳에 묻혀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너무 어렸을 때라 기억은 없지만 제가 숨 쉴 수 있도록 해주시고 많은 사랑을 주신 어머니의 무덤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현역으로 입대를 결심하였고, 현역 입대에 필요한 자격을 만족시켜야 했습니다. 우선 학력미달로 인해 보충역 판정이 났기 때문에 중,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합격해야 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오전에는 아버지 지인분의 일을 도와드렸으며, 오후에는 검정고시 공부에 매진하였습니다.

 하지만 한글은 저에게 쉬운 언어는 아니었습니다. 인도네시아어와는 많은 차이를 보였기 때문에 이해하기도 힘들었고 학교를 다니지도, 어느 누구에게 배우지도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모르면 다시보고 알아도 반복학습을 하며 부족한 부분을 하나씩 채워갔습니다.

 몇몇 친구들은 힘들어하는 저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였지만 저는 단 한 번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었고, 어머니의 묘 또한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검정고시는 어려웠지만 그동안 많은 노력을 한 덕에 합격했습니다.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하니 뜻 깊었고, 현역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더 좋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정말 잘 생각하였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하고, 자식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도록 하라.” 라고 말하셨습니다.

 입대 후 신병교육대에서 “외국에 오래 살았으면 안와도 되는데 왜 굳이 군대에 들어왔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저에게는 남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있기에 그저 웃으며 흘려보냈습니다. 처음에는 두려움과 걱정을 안고 입대하였지만, 막상 입대하고 나니 사회에서 말하는 것들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힘들다, 춥다, 배고프다.” 하지만 저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힘들어도 간부님들과 동기들, 선후배 전우들과 함께 이겨냈습니다. 춥고 배고픈 것도 없었습니다. 항상 따뜻한 생활관과 보급품으로 겨울인지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전우애로 배고픔도, 추위도 잊은 채 열심히 군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일병입니다. 앞으로 군 생활이 많이 남았습니다. 몇몇 전우들은 빨리 이 시간이 가기를 원하고 힘들다고 투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좋은 말로 조언을 해주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간부와 선배 전우들도 있습니다. 그동안 인도네시아와 대한민국을 오가며 힘든 점도 있었지만, 입대하면서 많은 것이 정리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환경들과 전우애를 느낄 수 있었고, 어려움에 직면하여도 전우들과 함께 이겨내어 행복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 전역을 하면 대한민국에서 어머니의 묘를 지킬 수 있으며 아름다운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행복합니다. 심한 고민에 빠졌었지만 떳떳한 삶을 살 수 있기에 즐겁습니다.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충과 효를 다할 수 있게 돼서 정말 행복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이곳에 온 이유입니다.(konas)

39사단 118연대 일병 조병진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관련기사보기
facebook twitter 인쇄하기 책갈피저장 메일보내기
소셜댓글
로그인선택하기 트위터 페이스복
원하는 계정으로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여 주십시요.
입력
    • 입력 된 100자 의견이 없습니다.
1
    2017.3.24 금요일
핫클릭 뉴스 더보기
포토 & 동영상 더보기
쓴소리/단소리 더보기
2017년 3월 26일~31일까지 글쓰기 기능..
2017년 3월 26일~31일까지 글쓰기 기능을 제한.. 
네티즌칼럼 더보기
2017년 3월 26일~31일까지 ..
2017년 3월 26일~31일까지 글쓰기 기능을 제한합니다... 
깜짝뉴스 더보기
한국 여권 소지하면 170개국 무비자 여행 가능
한국 여권 소지자가 별도로 비자를 받지 않고 입국할 수 있는 ..
세상사는 이야기 더보기
그래도
코나스 웹진 구독하기
  • 성명서/행사정보
  • 관련사이트
  • 기사제보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