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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위인들 - 조만식

Written by. 김동길   입력 : 2016-11-29 오후 2:4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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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당 조만식과 악수를 나눈 그런 영광스러운 기회는 내게 없었지만 나는 고당의 음성을 멀리서나마 들을 수 있었습니다. 평남 평원군 영유읍에 있는 괴천공립국민학교에 교원으로 있을 때 해방이 되었습니다.

 평양 기림리에 있던 내 집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소련군이 평양 시내의 교통정리를 하고 평남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적위대(Red Army)도 모집이 되었지만 인민위원회 초대 위원장으로 고당 조만식이 임명되었고 부위원장에 저명한 사진사 공산당원 김유창이 임명되었습니다.

 우리 아버님과 잘 아시던 국민학교 교장을 오래 하시던 어른이 평양시 학무국에 책임자가 되어 그 때만 해도 나를 내가 졸업한 상수국민학교(뒤에 인민학교)에 교사로 임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 상수학교 교사는 소련군이 쓰게 되었으므로 일본인 중학교가 쓰던 교사로 옮겨갔는데 바로 길 건너 조만식이 위원장인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사무실이 마련되었는데 그 건물은 일제 때 일본인들의 소학교(국민학교) 건물이었습니다.

 아침에 고당이 인민위원회의 공무원들을 모아놓고 조례 시간에 확성기를 대고 일장 연설을 했습니다. 말씀 가운데, “앞으로 사람들이 겨드랑이에 무슨 장치를 해 놓고 개개인이 하늘을 날아서 왕래하는 날이 올 것이오”라고 한 그 말씀을 듣고 꼭 7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직 그 날이 오지는 않았지만 그런 가능성은 70년 뒤인 오늘, 누구나가 생각할 수 있는 미래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당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오산학교의 교사가 되었고 소월 김정식이 오산의 학생이던 때에는 고당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J. M. S.’가 그립다는 유명한 시도 한 수 남겼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독립운동을 지휘하였고 1년이나 감옥살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가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한 것은 1922년의 일이었습니다. 요새 말로 하자면 ‘국산품 애용 운동’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조선의 동포들아 이천만민아

두 발 벗고 두 팔 걷고 나아오너라

우리 것 우리 힘 우리 재조로

우리가 만들어서 우리가 쓰자

우리가 만들어서 우리가 쓰자(물산 장려가 2절)

 고당은 오산학교 교장도 지냈고 평양에 있는 숭인상업학교의 교장 일도 보았고 ‘신간회’ 결성에도 참여한 바 있습니다. 그는 해방이 되자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당수가 되었습니다. 김일성이 고당을 평남인민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오래 맡길 리가 없었고, 전하는 말에 의하면 조만식은 곧 숙청되어 ‘고려호텔’에 연금되어 6‧25를 맞았는데 유자들이 “월남하셔야지요”라고 권하면 “나라도 이 땅을 지켜야지”하며 월남하기를 거절하고 거기서 김일성 일당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들었지만 이 어른의 피살 날짜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당 조만식은 인도의 간디같이 ‘고상하고 용감하게’ 살았습니다.

김동길 (www.kimdonggi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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