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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무요원 체험수기② <우수상> "시간이 주는 의미"

"첫 근무지에서 알게 된 장애아동 위해 쉬운 근무지 사양"
Written by. 김영진   입력 : 2018-09-28 오전 9:3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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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련을 수료하고 음성교육지원청으로 첫 출근을 하는 날, 얼굴을 스치는 바람은 내 마음만큼이나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현역이 아닌 사회복무요원으로 군복무를 해야 한다는 것도 내키지 않았고 어떤 일에 배정을 받게 될지도 불투명한 상황이어서 교육청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우울함이 더해지고 있었다.

 다행히 나는 집 앞에 있는 초등학교로 배정을 받았고 근무지가 다른 곳이 아닌 학교라는 것에 일단 마음이 놓였다. 더구나 초등학교이므로 한참 동생뻘 되는 아이들과 2년을 지내게 된다고 생각하니 조금 설레는 기분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에 다시 나의 우울은 납덩이처럼 더욱 무거워지고 말았다. 내가 맡게 되는 일이 장애학생을 돕는 일이라고 교육청 주무관님이 말씀하실 때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장애 학생이라니....’

 티브이나 거리에서 무관심하게 보거나 그냥 지나쳤던 장애인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나 자신도 잘 관리를 못하는 내가 어떻게 장애를 가진 아이를 돌볼 수 있을까, 장애를 가졌다면 도대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일까, 등등.....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내 머리 속에서는 끊임없는 상상과 질문이 이어지고 있었다.
 ‘몸은 힘들지 않을 거다, 정신적으로 좀 피곤하겠지만 보람 있는 일이 될 거야’
 주무관님의 말씀을 듣는 둥 마는 둥 차에서 내린 나는 터덜터덜 학교 정문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새로운 만남의 시작

 교장, 교감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특수학급 선생님들께 이것저것 설명을 듣는 것으로 나의 첫 근무가 시작되었다. 대소초등학교에는 두 개 반의 특수학급이 있으며 약 10명의 학생이 공부를 하는데 그 중에 M이라는 학생을 집중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M은 ‘뇌병변장애’를 가진 아이였다. 병명도 낯설 뿐만 아니라 나는 아이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가 몹시 궁금했다. 마침 방학 중이어서 아이들을 만날 수가 없었으므로 개학 때까지 나는 M의 모습을 상상 속에서만 그려볼 수 있었다.

 마침내 개학식 날, 아이들을 만난다는 사실에 나는 다소 긴장되고 떨리는 마음이 되어 학교로 향했다.
 ‘드디어 만나는구나, 과연 내가 잘해낼 수 있을까?’

 처음 M을 보았을 때 느낌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왜소한 체격에 짧게 자른 머리, 말은 잘하지만 의사소통이 어려울 정도의 발음..... 내게 주어진 첫 번째 업무는 1교시부터 6교시까지 아이의 수업을 지원하고 식사지도를 하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보통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그 아이가 말하는 것을 제대로 알아들 수가 없어서 나는 종이와 연필을 늘 갖고 다니면서 의사소통을 해야만 했다. 또한 물휴지를 갖고 다니면서 수시로 흘러내리는 침과 콧물을 닦아주는 것은 물론, 점심시간에 급식을 떠먹여 주어야 했다. 입 안 가득 음식물을 넣고 씹던 아이가 재채기라도 하게되면 내 얼굴로 폭탄처럼 음식물이 쏟아지는 일은 다반사였다.

 화장실에 갈 때마다 동행해야만 했고 그 아이의 손과 발이 되어 하교하는 시간까지 그림자처럼 함께 움직여 주어야 했다. 내가 왜 이런 일까지 해야만 하는지, 우리나라의 병역의무 제도를 원망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심정으로 지냈다. 나는 내가 마치 매일 벌을 받기 위해 학교로 출근하는 죄수가 된 심정이었다. 어서 빨리 이 시간들이 지나가 주기를 밤마다 잠자리에서 기도하듯 웅얼거리다가 잠들곤 했다.

짧은 만남과 이별, 그리고 재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게 익숙해진 M은 점점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리기 일쑤, 제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의무감으로 업무에 임하던 나도 차츰 아이에게 지쳐서 급기야 아이에게 미운 마음이 생기기까지 했다. 서로에게 짜증을 부리는 날이 많아질수록 하루해가 더 길게만 느껴졌고 감정의 골이 깊어져갔다. 특수학급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몇 번의 위기를 넘기기는 했지만 그 때 뿐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았다. 그렇게 2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가족들이 이사를 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근무지를 옮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야호! 이 지긋지긋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사 간 곳에서 새롭게 배정된 근무지는 집 근처의 아동센터였다. 일반 학생들이 하교 후에 센터에 오면 숙제를 챙겨주고 그 외의 생활을 돌봐주는 일이었다. M을 돌보는 일에 비하면 이곳의 업무 강도는 1/2에도 못 미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곳에서 근무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나는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매일 퇴근 무렵 M에게서 걸려오는 전화 때문이었다.

 아이는 그 어렵게 잘 되지도 않는 발음으로  “선생님, 잘 지내세요.....?  보고 싶어요.”라고 말하곤 했다.
 ‘웃기시네, 보고 싶긴, 난 네가 전혀 안보고 싶다!’ 난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속의 저 안에서 이상한 감정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무언가 내가 크게 잘못하고 있다는 느낌, 절대로 져버려서는 안 되는 중요한 약속을 어기고 있는 죄책감...형용할 수 없는 불편함이 종일 나를 안절부절 못하게 했고 밤잠을 설치게 만들었다.

‘ 내가 왜 이러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마음이 불안하고 편치가 않은 걸까?’
 나를 대신해서 근무할 사회복무요원을 아직 배정받지 못했을 특수학급 아이들이 겪을 어려움과 특수반 선생님들의 노고를 생각하니 내가 정작 있어야 할 곳이 아닌, 엉뚱한 곳에 와 있는 것만 같았다.
 ‘ 다시 대소초등학교로 가야하나?’
 아마 나는 그 때까지의 내 삶 속에서 가장 힘든 결정을 내려야만 했던 것 같다.

다시 대소초등학교로...

 대소초등학교로 돌아와 M과의 전투적인 날들이 다시 시작되었다. 나 때문에 가족들도 한 달 만에 이사를 해야 하는 불편함을 겪었다. 선생님들의 배려로 다른 장애 학생을 지원하는 시간이 주어져서 아이와도 하루에 잠깐씩은 떨어져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재회의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아이를 보면서 나는 내가 선택한 결정에 스스로 기특한 생각마저 들었다. 모든 것이 원래의 자리를 찾은 듯 했지만 결코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고달프고 피곤한 일의 연속이었고 퇴근하면 완전히 녹초가 되어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달라진 것은 있었다. 현재의 상황이 예전처럼 지옥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느 책에서 읽었던 카뮈의 말이 생각났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건 적응하게 되어있다’
 ‘어차피 삶이란 버텨내는 것이다’

 그렇다. 2년간의 복무가 아무리 힘들지언정 앞으로 내 인생 어딘가에 놓여있을, 아직 내가 모르는 수많은 장애물과 어려움만큼이야 하겠는가, 이 정도도 견뎌내지 못한다면 나는 나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조용히 나는 조금씩 내 속에서 커지고 있었다.

 여름 방학이 지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 드높게 하늘이 푸른 가을 운동회가 열리던 날, 나는 계주 경기에서 M을 휠체어에 태우고 운동장 필드를 신나게 달렸다. 왠지 모르게 의기소침해져 화장실에서 하염없이 울던 아이의 아픔을 알게 되던 날은 온 마음으로 아이를 안아주었다. 6학년이 된 아이가 에버랜드 현장학습을 갔던 날은 그렇게 타고 싶어 하던 바이킹을 같이 타기도 했다.

 작년부터 곤봉던지기와 포환던지기를 시작한 M은 충북장애인체육대회에 나가서 작년에 이어 올해도 금메달을 2개나 따서 전국장애학생체육대회에 충북대표로 출전하게 되었다. 장애 등급 중에서도 중증에 속하는 아이가 전국대회에서도 금메달 2개를 다시 따서 3일 만에 학교로 돌아왔을 때는 마치 내가 메달을 딴 것처럼 좋아서 펄쩍 펄쩍 뛰기도 했다. M외에도 역도 종목으로 출전한 특수반 아이들 J와 S도 각각 은메달과 동메달을 안고 돌아와 기쁨이 배가되었다.

 더구나 대회를 준비하면서 장애인식개선 그림 공모전에 출품한 작품들이 모두 등위에 들어 특수반 아이들 전원이 수상을 하게 되는 경사가 겹쳐서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학교 전체 교직원 선생님들의 축하와 격려를 한아름 받는 영광을 누렸다. 월요일 조회 시간에 전교생 앞에서 M을 부축하고 상을 받기 위해 조회대에 올랐을 때 뒤쪽에서 들리는 ‘와~’하는 함성소리에 가슴 한 쪽이 울컥하기도 했다. 학교 개교 이래 특수반 전원이 상을 받는 일은 처음이라고 했다. 상을 왜 받는지도 모르면서도 싱글벙글 웃는 아이, 상을 받지 않겠다고 떼를 쓰는 아이,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표정에 저절로 웃음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 날처럼 아이들이 고맙고 위대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보이지 않는 특수반 선생님들의 엄청난 수고와 노력이 화려하게 결실을 맺는 날이기도 했고 미약하나마 나의 적은 힘이 보탬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새삼 나 자신이 이 세상에 쓰임이 있는 중요한 사람인 것 같아 기분이 우쭐해지기도 했다. 그 날 환하게 웃는 특수반 선생님들을 보면서 군복무를 하는 나는 2년이라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임무를 다할 뿐이지만 교육현장에서 장애를 가진 아이들과 하루 종일 고단한 업무를 수행하는 특수반 선생님들이 보통의 사명감이나 희생정신을 가진 분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존경스럽게만 느껴졌다. 이렇게 M과 특수반 아이들과의 추억을 쌓아가면서 나의 복무기간도 채워져 가고 있었다.

 사람은 인생에서 살아가는 동안 자신을 믿어 주고 인정해 주는 한 사람만 있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견뎌낼 수 있다고 한다. 나는 내게 M이, M에게는 내가 그런 존재로 기억되길 바란다.

 정리되지 않은 복잡한 현실에서 사회복무요원이라는 생소한 업무를 하게 된 내가, 거짓 없이 적나라한 나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정신적인 담금질을 통한 성숙의 길로 반걸음쯤 나아갈 기회를 갖게 되었다. 또한 M은 절실한 도움이 필요할 때 진정으로 자신의 손을 잡고 일으켜줄 그 누군가가 이 세상에 한 명쯤은 존재하고 있으므로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살아가도 된다는 것을 나로 하여금 알아냈기를 바란다.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 지금까지 내게 생겨났던 모든 일들과 또 앞으로 생겨날 그 어떤 일들도 모두 의미가 있는 일이라는 것, 그러므로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했던 이 시간들이 영양분이 풍부한 자양토의 역할을 톡톡히 해줌으로써 아직은 미완성인 나의 삶이 더욱 견고하고 온전한 것으로 완성되어 가리라고, 그것이 시간이 주는 의미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konas)

대소초등학교 김영진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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