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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10.1국군의 날''을 국경일로 되살려야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0-10-18 조회 조회 : 21304 

written by. 문영일


''국군의 날이 광복군창설일이 되어야한다''는 논의는 신중하게 고려하되 통일대한민국이후로 순연해 둠이 적절할 것


  금년도 제62회 ''10.1국군의 날''을 보내면서 다른 해와는 다른 감회에 젖는다. 그 무엇보다 바로 최근에 일어났던 ''천안함 폭침사태''가 가슴을 아리게 하고, 그 후유사태와 함께 종북주의자들의 망국행태가 분개함을 억누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금년도 ''10.1국군의 날'' 기념행사가 9.28서울 수복행사에 묻혀버렸기에 안타까움을 변할 수 없다.


그런가하면 국군의 날이 국가공휴일에서도 빠져 국군의 사기 또한 말이 아니다. 일부세력들은 환갑도 훨씬 넘긴 ''10.1국군의 날''을 다른 날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내놓고 있다. 참으로 국군의 사기와 국민의 안보의식이 더욱 훼손되지 않을까 염려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10.1국군의 날''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알아보고 국군의 날이 국경일(법정공휴일)로 반드시 되살려져야 한다는 것을 논해 보기로 한다.
           
 광복군의 발상과 광복전쟁론(독립전쟁론)


 최근에 ''10.1국군의 날''을 임시정부 광복군창설일로 바꾸자는 논의가 있었다. 가부간에 일단 그날을 포함하여 광복군의 역사적인 기념일들을 상기해 본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군대(일명 구식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그 즉시 군인들(1만여명)과 뜻있는 시민들은 왜군에 저항하는 제2차 의병전쟁 즉 최초라 할 수 있는 광복군전쟁을 일으켰다. 1908년 한해만 해도 수백회의 전투와 7만여 명의 참전이 있었다. 그러나 왜군의 무도한 탄압으로 군사력이 소진되자 잔존세력은 소부대로 전국에 분산되어가 게릴라전을 전개하다가 그도 힘이 부족해지자 만주와 러시아령 연해주로 건너가 광복군이 되어 조국해방전쟁을 계속하였다.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해간 이들은 집단별로 자치정착촌과 무장단체를 조직하여 한만국경을 드나들며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909년 10월에 있었던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이등박문 저격사건이었다.  그러나 1910년 8월 22일에 일제는 ‘한일합방조약’을 강제하고 8월 29일에는 순종으로 하여금 양위도 아닌 ‘양국’(讓國)하게 함으로서 이씨조선은 망하였다.


그리하여 그 당시 국민들의 시대정신은 ‘독립전쟁론’이라고 명명된 광복전쟁이었는바, ‘일제로부터 우리민족광복은, 우리민족의 군대가 적절한 시기에 일제와 전쟁하여 승리하였을 때 비로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06년부터 일찍이 조성된 ‘용정’(龍井) 한인 집단마을에 자리 잡고 그곳을 광복운동기지로 간도(間島)-1926년에 간도농토 52% 차지, 당시 중국인가구수보다 5배인 5만 5천여 가구였고, 1944년에는 만주전체 이주민수 백만 여 명중, 이곳 이주민이 63만여 명에 이르렀다-일대에서 광범위하게 광복전쟁을 전개하였다.     
 
  임정의 만주 대한광복군총영설치와 서로 및 북로군정서


   1919년에 2천만동포의 뜻을 모아 성립된 임정은 그해 말에 우선 55개조로 구성된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軍制)를 마련, 만주에 대한광복군총영(大韓光復軍總營)을 설치하고, 만주지대의 70여개 독립군 조직들을 자의로 통합하여 남만주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간도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임정군무부의 직할부대로 하였다. 이어서 군무부 직할로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로서 비록 짧은 기간이었으나 일단은 최초의 광복군이 창립된 것이었다. 
 
 그 이후 우리 모두 잘 아는바와 같이 만주지역의 광복군은 청산리대첩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뒤 일제 토벌대의 예봉을 피할 겸 안정된 군사기지를 찾아 연해주로 이동하였으나 자유시참변 등 소련 공산주의 적군과 한국계 소련공산주의자들의 배신으로 다시 만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래서 광복군단체들은 다시 안정된 생활기반구축과 군사력배양을 위해 교민 거주 지역별로 군사정권을 수립하게 되었는데, 1923년 8월에 남만주 즉 서간도(압록강 대안)에 주만참의부(駐滿參議府)를, 1924년 7월에 하얼빈과 액목현을 경계로 700여명의 군사력과 1만 5천여 호를 관장하는 정의부(正義府 ), 북만주지대, 목릉현지방의 부여족통일회에 의해서 신민부(新民府)가 성립되어 500여명의 군대와 함께 지역교민정권을 성립시켰다. 
 
1932년에 3월에 괴뢰국가인 만주국(滿洲國)이 발족하자 만주한국독립당은 이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한국독립군’을 조직, 중국인에 의한 항일군과 함께 연합작전으로 점령군인 관동군과 만주국괴뢰군을 공격하였다. 1933년 1월 중순에는 만주 중국 길림구국군(救國軍)과 연합하여 ‘한중연합토군’(韓中聯合討軍)을 구성하였다. 한편 남만주의 조선혁명군도 1932년 3월에 혁명군 총사령 양세봉장군(참모장에 김학규)이 지휘하는 1만의 혁명군과 2만여 명의 중국자위군이 연합작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군사적 압박은 가중되고, 중국군은 믿을 수 없고, 동포공산주의자들과의 대립은 더욱 심해지고, 밀정은 날뛰고, 마적단과 토비(土匪)들조차 거세어지자, 드디어는 부대가 분산되고 간부들도 신상에 위기를 느낄 정도가 되었다. 때마침 임정의 김구(주석)의 요청으로 이청천장군을 비롯하여 군관학교지원생들을 포함한 다수요원들이 관내(내륙)로 이동(1933)하게 되었다. 또한 남만주의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도 ,토벌작전에 밀리고 밀려 1936년에 이들마저 소멸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안타깝게도 만주에서 민족주의계열에 의한 광복전쟁은 이것으로 일단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임정의 한국광복군창립 


김원봉이 좌익단체중심으로 1938년 10월 10일에  ‘조선의용대''(Korean Volunteer)를  지나의 국공합작정부 즉 국부(*國府 중 좌익세력)로부터 지원을 전제로 한 승인을 받아 국부군에 편입되어 활동하는 부대로 창설하였다. 한편 김구 영도하의 임정은 윤봉길 의사의 거사이후 일군에 쫓겨 1932년부터 이국땅 중국대륙의 오지를 전전하다가 1940년 9월에 비로서 중경에 정착하였다.


때마침 일제의 태평양전쟁이라는 호기를 맞이하여, 1940년 8월에 ‘한국광복군총사령부’(The Headquarter of Korean Independence Army)를 구성함으로서 임시정부의 정식 광복군이 창설되었는데, 총사령은 이청천(원명 池大亨), 참모장은 이범석이었다. 동년 11월에는 김구를 주석으로 하는 통수부(統帥府 즉 大元帥府)를 설치하였다.  


 그런데 국부군은 우리 광복군을 중국군 예하부대로 종속시키려했다. 당시 임정은 우리군대를 조직해 놓고도 사실은 국부의 승인(국부의 통치영역에 소속되어 있음으로)과 재정지원 없이는 작전활동은커녕 아사(餓死)할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1941년 10월에 만부득이 임정은 이를 승인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광복군공약’과 ‘한국광복군 서약문’을 제정하여 광복군의 자주국방군으로의 발전을 추구해 나갔다. 그 후 김원봉(若山)을 한국광복군 부사령 겸 제1지대장으로 하면서 광복군(영어명칭변경 ; Korean National Army)을 확대 재편하였는데 1942년 5월 현재 450명의 군세였다. 물론 여기에는 미국동포들이 정성으로 보내준 4만 달러의 독립자금이 효자역을 하였다.


 이것이 바로 광복군창설과 그 약사이다. 이상에서 보시다시피 이들 광복지시들의 위국헌신을 우리 후세들은 결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40여 년간의 ''광복의 시대정신 시대''는 이제 잊어야 할 시기도 되었다. 일제강점시기에 대한 회상은 민족적 굴욕감도 함께 하기에 이제는 그 악몽에서 벗어날 때도 된 것 아니겠는가. 뿐만 아니라 지금은 대한민국에 의한 남북통일이 더욱 미래지향적인 민족의 시대정신으로 부과되어 있다 할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10.1국군의 날''이 반듯이 광복군창설일이 되어야한다는 논의는 신중하게 고려하되 통일대한민국이후로 순연해 둠이 적절할 것으로 생각된다.
        
 ''10.1 국군의 날''의 역사적 의미


 6.25전쟁당시, 유엔군이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으로 승승장구 북진을 개시하여 38선으로 다가감에 따라 미국전쟁지도부가 한국전쟁을 낙관하게 되고, 유엔에서도 한국의 통일독립을 지지하는 분위기가 성숙되어가고 있었다. 더욱이 현지 사령관인 맥아더는 9.28서울완전수복후, 38이북 북진계획과 유엔군의 대동강선 정지안-그리고 그 이북작전은 한국군으로 만 실시하겠다는 계획-을 본국에 타전하면서 9월29일에는 예하부대에 북진(38선 돌파)을 일단 정지시키고 있었다.
 
 한편 9월 29일, 동부전선의 한국군장병들은 38선에 도달하여 38선 돌파명령을 기다리며 흥분하고 있었다. 지난 3개월간 북괴침략자에 의해 그 얼마니 많은 희생과 고생을 하였던가. 따라서 이제 우리 국군 자주적으로 앞서서 북괴응징의 기회는 물론 침략의 근원인 북한공산괴뢰정권을 멸망시키고 북한에 있는 우리민족을 해방시켜서 대한민국 통일을 이루기 위해 이 원한의 38선을 한시바삐 돌파하려는 마음에 불타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지체 없이 38선을 불문하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섬멸하는 것이 한국군의 역사적 과업임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사실이지, 그동안 이승만대통령과 한국군은 "이 전쟁의 궁극적인 목적은 국토통일⋅민족통일이어야 한다"는 전략사상 일념으로 여기까지 이르고 있었다. 이에 이승만은 9월 30일 오후 한국군 참모총장과 군 수뇌부를 임시수도 부산으로 불러 유엔군의 명령을 기다리는 한국군 지휘관들에게 그동안의 북진통일지론 즉 ''멸공통일, 북괴타도''를 재강조하고 그들의 각오를 재확인한 뒤 자주국방정신을 발휘하여 "국군은 즉각 북진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한국군은 멸공통일을 위해 북진을 결코 중지할 수 없다"고 대내외에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중/동부전선의 한국군은 10월 1일에 ''원한의 38선을 돌파하여 정치⋅군사적 북진을 계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맥아더의 북진전략계획을, 트루먼은 미국국가안보회의의 ''결의안 81호(NSC-81/1)''로 승인하고, ''유엔군의 작전목적이 침략군의 군사력을 무력화하는 것이기에 필요하다면 38선 이북으로 전진해서라도 이 목적을 달성하라''고 명령하였다. 유엔안보리(安保理事會) 또한 유엔군의 작전목표를 북한의 군사력무력화에 둔다고 결의하고, 유엔총회는 한반도의 통일독립과 민주주의정부수립이 유엔의 전쟁목표라고 10월 7일에 결의 하였다.


그리하여 유엔군은 한국군에 뒤따라 10월 9일에 38도선을 지우고 새로운 의미의 북진을 계속하였다. 이래서 한국은 이날 이후 ''북진통일⋅멸공통일''의 국시를 구현하기 위해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하고, 온 국민에게 ''민족자주통일의 시대정신을 강조하고자 국경일로 제정하여 기념하게 되었다. 그러기에 ''10.1국군의 날''은 오늘날에도, 참으로 뜻 깊고 시대정신에도 부합하는 온 국민적 기념일이라 할 수 있다. 
 
 ''10.1국군의 날''은 멸공통일시대 정신의 상징


 특히 2010 금년 ''10.1국군의 날''에는, 북한의 무제한 전쟁위협과 천안함 폭침사태를 당하여 군사적으로는 주적의 강조로, 국민들에게는 안보의식을 강조하는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실용정책''이라는 구실(?)아래 그동안 각각 실시하여 국민안보의식과 역사적 의미를 강조해 왔던 두 행사를 그나마 통합해 축소하고, 간소화된 행사로 만들어 <서울수복기념국군의 날 행사>로 치러버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더구나 군의 사기를 북돋우어주는 것이 상례인 ''국군의 날 경축의 자리''에서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축하빈객으로 온 세계 참전 군인들과 그리고 국민들이 귀담아 듣는 자리에서, 국군을 책망도 하였으니, 앞으로는 더욱 국군의 사기는 물론 국민들의 군대에 대한 인식도 덩달아 안보의식마저 더욱 희석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한편 서울에서 ''축소통합국군의 날'' 행사를 하고 있던 그 시점에 북한은 무모하게도 유엔에서 ''빈곤속의 핵국가''를 선언하며, 20대의 아들과 누이에게 대장이라는 군사칭호를 주어가며 세계역사상 유례가 드문 최빈곤의 3대 세습 김씨왕조 구축의도를 광고하였다. 지금 우리의 심정은 착잡하거니와 북한인민들의 심경과 처지는 어떠할까. 동족으로서 동정심이 솟구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 대한민국국민은 더 이상 북한당국과 체제간 공존이나 ''우리민족끼리의 협력''을 논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러하기에 한시라도 빨리 북한정권을 타도하고 북한인민들을 해방시켜야하는 것이 민족적 사명임을 명심하고, 이를 시대정신으로 재인식해야 할 것이다.


 ''10.1국군의 날''을 국경일로 다시 세워 기념해야


 국경일이란 국가에서 정한 법정 공휴일로서, 이날은 온 국민이 하루를 쉬면서 대소행사 등을 통해 그 날의 의미를 되새기는 날인 것이다. 이미 본바와 같이 ''10.1국군의 날''은 1956년부터 정식으로 국가공휴일 즉 국경일로 제정됨에 따라 그동안 국민들의 안보의식을 고취하는데도 큰 몫을 해 왔다.


그러나 국민안보의식이 해이되기 시작하던 1990년에, 뜻있는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정 공휴일축소로 산업발전에 기여한다''는 명분으로 공휴일에서 제외됨으로서 군대내부행사마저 축소와 간소화로 국군의 사기저하는 물론 국민들의 안보의식은 잠식되었으며, 급기야는 멸공통일과 민족통일에 대한 국가안보의식마저 빛을 잃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나라와 국민의 살림이 풍요하다보면, 제3공화국의 ''광화문''을 시멘트로 만들었다하여 부수고 큰 돈 들여 몇 백 년 묵은 나무를 구해다 光化門을 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민간인 정권들의 군사정권에 대한 시비로 보일 수도 있다. 이는 오히려 ''광화문''의 시대정신을 망각하게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엄중한 한반도의 새로운 정세를 인식하여 과거를 대오각성하고, 정부와 국민 그리고 군사가 일치하여 ''북한해방⋅민족통일''을 이 시대의 시대정신으로 삼아 이를 성취하기 위해 민족역량을 다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망각해가는 ''10.1국군의 날''을 국경일로 다시 되살려 기려야 한다. 국민과 함께하는 국군의 날이어야 군이 국민으로부터 신뢰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konas)
          
문영일(예.중장, 한국국가안보전략사상사학연구회 대표/www.ikons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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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남기는 말씀
조지 오웰 지금은 대한민국에 의한 남북통일이 더욱 시급한 문제인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전쟁이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까?특히 같은 민족끼리 하는 추악한 전쟁을 국군의 날로 잡는 것은 말그대로 치욕이라고 생각됩니다   2010-11-17
    2018.10.17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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