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로 변한 시위문화, 무력한 공권력
1970년대 말, 필자가 하버드대학에 객원교수로 가 있을 때의 일이다. 오후에 열린 어느 문학 세미나에 참석하던 도중, 갑자기 시끄러운 재즈 음악소리가 강의실 안까지 들렸다. 밖으로 나가 보니, 학생들이 데모를 하기 위해 대학광장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남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돈을 번 광산업자로부터 대학 측이 기부금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학생들은 그렇게 한 시간 남짓 구호를 외친 후 스스로 조용히 해산했다.
강의실을 지킬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학생 데모로 유명했던 당시 국내의 상황에 비춰볼 때, 이들의 시위문화는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소란스러운 가운데서도 너무나 질서정연한 집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한 학생에게 시위를 계속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더니, 그의 답변은 너무도 간단했다. 학교 당국에 자신들의 반대 의견을 분명히 전달했으니 더 이상 캠퍼스를 소란스럽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과거 암울했던 시기, 독재정권에 맞서 거리로 나섰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은 분명히 우리의 민주화운동에 커다란 기폭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데모라면 당연히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는 폭력시위를 연상할 만큼 처절한 시위문화를 가지게 됐다. 그토록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어낸 민주화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에도 시위 현장에서는 무정부상태의 폭력사태가 빚어지고 있다.
최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시위 과정에서 아들 같고 동생 같은 전경들을 죽창으로 찌르고, 도청을 파괴하는 일이 일어났다. 화물연대의 파업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여러 화물차가 불타기도 하는 등 게릴라식 테러가 거침없이 일어났다. 이것은 민주적인 법치국가에서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될 반(反)문명적인 범법행위이자 테러다.
데모는 의사전달의 한 수단이다. 따라서 다원화된 민주사회에서 이해 당사자들 간의 협상과정에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정당하고 평화적인 시위는 허용돼 마땅하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고 모든 것을 오직 힘으로만 해결하려는 극단적인 자세는 역설적으로 시위를 통한 의사전달의 본질을 그 즉시 훼손시킨다. 한미 FTA 반대 시위의 경우만 해도, FTA 반대 집회가 폭력사태로 치닫는 순간, 지나친 미국 중심의 불평등 협상을 반대한다는 시위대의 명분은 사라졌고 그들 주장의 본질은 폭력에 대한 비판으로 흐려졌다. 실제로 당시 협상테이블에 앉은 우리 협상 대표단은 시위대의 폭력사태가 전해지자마자 급격히 위축돼 충분한 협상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시사하기도 했다.
이처럼 법을 집행하고 치안을 유지해야 할 공권력이 폭력시위로 인해 무너지게 되면 우리 사회는 곧 자멸하고 말 것이다. 더욱이 불법적인 폭력시위는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수출 3000억달러의 실적을 올리면서 국제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대기업의 국제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힘겹게 생계를 이어가는 영세 자영업자들을 고단하게 만든다.
모든 것을 힘으로 해결하려는 풍조가 만연하는 사회에는 더 큰 폭력과 또 다른 독재적 권력이 등장할 위험이 크다. 그럼에도 정부는 불법 폭력 시위에 대해 단호한 법적 대처를 못하고 있다. 심지어 불법폭력 전과가 있는 일부 단체에 국고 보조금을 지원해 준 일도 있다. 정부가 정권 유지나 정치적 목적 때문에 공권력 행사를 주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민주사회에서 적법한 평화시위는 반드시 보호돼야 하지만 사회 전체를 파괴하는 불법적인 폭력과는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 정부와 공권력이 지금처럼 스스로 무기력해져 우리의 시위문화가 이성적인 자제력을 잃고 한계를 넘어 앞으로도 계속 폭력적으로 방치된다면, 우리는 ‘잃어버린 10년’을 영영 회복하지 못하게 될 뿐 아니라, 과거 남미의 여러 나라가 경험했던 극도의 혼란과 퇴영의 길을 걷게 되고 말 것이다. 우리가 더 늦기 전에 올바른 시위문화를 정착시켜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태동 / 문학평론가·서강대 명예교수
** 이 글은 12월5일자 문화일보 <포럼>으로 실린 칼럼입니다.
- 관련기사보기
-
- 입력 된 100자 의견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