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글씨확대글씨축소스크랩

盧정권의 間諜 지원 사례

間諜을 풀어주고, 도와주고, 뒤를 봐주는 盧정권

Written by. 김성욱   입력 : 2006-12-28 오전 10:56:52
공유:
twitter facebook
소셜댓글 : 0

 盧武鉉 정권은 「간첩(間諜)」을 사면(赦免)하고, 복권(復權)하며 심지어 「국가유공자」로 인정하면서 이들의 反국가활동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해왔다. 전향 여부가 불분명한 간첩 출신들은 사회로 돌아와 다시 親北·反美운동에 투신했고,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은 사상 초유의 정체성 위기를 맞고 만다.
 
 <30여 명 간첩 특사로 풀려나>
 
 金大中-盧武鉉으로 이어지는 좌파정권 10년 간 간첩죄로 복역했다 대통령 특사 등으로 풀려난 인물은 30여 명에 달한다.
 
 여기는 △2005년 민경우(통일연대 前 사무처장) 강태운(민주노동당 前 고문) 이종린(범민련 남측본부 명예의장) 하영옥(民革黨 사건) △2000년 무하마드 깐수(정수일) 심정웅(지하철 암약 간첩) 우용각 등 비전향장기수 19명(잔여형기 면제) △1999년 신광수(요코다 메구미 납치사건 주범) 고영복(서울대 명예교수) 안재구 류낙진(구국전위 사건) 최호경 조덕원(남한조선로동당 사건) △1998년 김낙중 황인오(남한조선로동당 사건) 박노해(사노맹 사건) 서경원 등이 포함됐다.
 
 이 중 통일연대 민경우(閔庚宇)란 인물은 국가보안법상 간첩 혐의로 두 차례나 실형을 받았던 인물이다. 閔씨는 1997년 간첩 혐의로 구속됐다가 1999년 대통령 특사로 석방됐다. 그는 5년 뒤인 2003년 다시 간첩 혐의로 구속됐지만 형기의 3분의 1을 채울 무렵인 2005년 8월15일 刑집행면제 특별사면과 함께 복권을 받았다.
 
 <『고려연방제는 민족자주···』 감옥 안에서도 反국가언동>
 
 再犯간첩으로서 刑집행면제 특별사면 복권이라는 파격적 특혜를 입은 閔씨는 복역 중에도 反국가적 言動을 계속하며, 개전(改悛)의 정(情)을 보이지 않았다. 인터넷매체 「통일뉴스」에 옥중(獄中)기고한 글 중 일부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고려연방제와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 담긴 공통의 문제의식은 통일문제를 민족자주의 관점에서 본다는 점이다...고려연방제와 같은 높은 단계의 연방제이든 6·15선언에 명시된 낮은 단계의 연방제이든 관건은 민족자주의 문제인 셈이다(2004년 7월15 「고려연방제」)』
 
 『北의 입장에서는 미국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을 「억지」할만한 군사력이 필요했다. 先軍정치를 국제 역학의 견지에서 본다면 전략무기 개발을 통해 미국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內的 요구의 산물이다(2004년 10월25일「北의 先軍정치」)』
 
 『통일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에서 주한미군을 해결해야 한다...주한미군이 남북을 포괄하는 우리 민족 전체에 대해 적대적인 지위 또는 상태에 있지 않도록 철수시키거나 조정하는 것이다...북핵은 南을 적대시하고 주변 정세를 전쟁으로 몰아가지 않는 선까지는 도덕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다(2004년 7월25일 6·15공동선언2)』
 
 『자본주의의 근본적 결함은 한국 사회에도 현실화되고 있다...분명한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뛰어 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이다...현 세계 경제에서 가장 심각하고 긴요한 문제는 미국의 군사화와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이다(2005년 2월14일 자본주의에 대하여)』

 
 <출소 후 평양행, 『北지도부는 도덕적·효율적』찬양>
 
 간첩행위로 수감된 후 감옥 안에서도 연방제 赤化통일을 주장하는 등 반성을 하지 않던 閔씨는 2005년 광복절특사로 풀려났다. 그는 이후에도 근신하기는커녕 북한정권을 고무·찬양하는 反국가적 행위를 계속했다.
 
 심지어 출소 후 두 달이 채 안 된 10월8일부터 10일간 「광복60年기념 평양문화유적 참관단」 일원으로 평양을 다녀왔다. 당시 「겨레하나」 기관지에 기고한 기행문에서 그는 북한을 일체 비판하지 않고 찬양과 美化 일변도의 감상을 밝혔다.
 
 『내가…베네주엘라에서 볼리바리안 혁명을 지지하는 민중의 한 사람의 입장에서 北을 바라보면 어떨까? 초강대국 미국과 일진일퇴하며 각축을 벌이는 모습이 경이롭지 않을까? 통쾌해하지 않았을까? 6자 회담의 진전 상황이 마치 내 일인 것처럼 흥미롭지 않을까?』
 
 『北이 세상과 닫혀 있고, 가난하다고 말하는 것은 미국이나 선진부국의 입장에서 본 北의 한쪽 모습이다. 사물의 다른 쪽에서 北을 보게 되면 가난하지만 존엄(尊嚴)과 긍지(矜持)를 중히 여기는 北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 면에서 보면 평양은 세상으로부터 많이 열려 있다』

 
 출소 직후인 8월22일엔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제로 한 토론회에 참석, 「국가보안법 피해 사례에 대한 발제」 토론을 했고 『편파적인 국가보안법 적용 사례』를 폭로하기도 했다.
 
 9월24일「시민의 신문」 인터뷰에선 『北에서는 核을 미국에 대한 自衛的 수단으로서 민족자주권으로 생각한다. 이를 남측에서 뭐라고 문제 삼을 수는 없다』며 北核을 비호했다.
 
 閔씨는 심지어 300만 명의 동족을 굶겨 죽인 金正日 정권에 대해 2005년 11월28일 「진보정치」 기고문에서 이렇게 옹호했다.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면서도 北이 잘했던 것은 지도부와 대다수 중·하부 대중이 결집하여 고통을 폭넓게 분담함으로써 아프리카 등에서 볼 수 있는 대참사를 막아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北지도부는 효율적이고 도덕적인 면모를 보여 주었다』
 
 金正日 정권은 식량이 모자라자 평양시민·군대·노동당간부·사회안전부와 국가안전부 요원, 즉 정권유지세력에게만 식량을 공급하고 나머지 약 1800만 명에겐 식량공급을 중단하는 인류역사상 최악의 신분차별, 지역차별을 했고 그 결과 아프리카에서도 볼 수 없었던 대규모 아사자가 발생했다.
 
 金正日 정권 상층부는 이런 대기근 속에서도 호화로운 생활을 누려왔다. 그럼에도 閔씨는 이런 북한 지도부를 「효율적이고 도덕적」이라고 美化한 것이다.
 
 <閔庚宇를 사면·복권시킨 盧武鉉·千正培>
 
 반성 없는 再犯간첩에 대한 한국 行刑사상 유례없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閔씨에 대한 刑집행면제 특별사면 복권의 주역은 盧武鉉 대통령과 千正培 前 법무장관이었다.

 사면법(赦免法)에 따르면, 특별사면은 법무장관이 대통령에게 상신(上申)하고, 국무회의가 심의(審議)한 뒤, 대통령이 시행(施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사면법상 閔庚宇 사면을 최초 상신(上申)한 인물은 千正培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다. 千장관은 閔씨 사면 이후 사상 최초의 수사지휘권을 발동, 북한정권을 고무·찬양해 온 강정구(姜禎求) 동국大 교수를 검찰이 구속수사하지 못하도록 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盧대통령은 千 장관의 상신을 받아들여 閔씨에 대한 특사를 최종결정했다.
 
 <朴勇 북한 명령 받아 閔庚宇에 지령>
 
 閔庚宇가 특별사면을 받은 2005년 8월15일, 공교롭게도 사법부에 의해 閔씨의 상부선(上部線)으로 확인된 조총련 거물간첩 박용(朴勇)이 소위 8·15 민족대축전 행사 차 공식 입국했었다.
 
 朴勇은 2004년과 1997년 국가보안법상 간첩 등 혐의로 실형을 받은 閔庚宇 통일연대 前 사무처장을 지휘 및 조종한 인물이다. 당시 재판부가 인정한 閔씨의 공소사실에 따르면, 朴勇은 이메일과 팩스를 통해 閔씨에게 지령을 내리고 17회에 걸쳐 총 3300여 만 원의 자금을 주면서 국내 상황을 보고받았다. 재판부가 인정한 閔씨의 공소사실 중 朴勇의 주도적 역할을 입증해 주는 한 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
 
 《2001년 5월3일 閔庚宇는 朴勇에게 전화로 범민련 10년사 책자, CD와 테이프, 배지, 3大 헌장 기념탑 모형 등을 만들어 보내는 데 500만원, 메모지·만년필 등을 새로 제작하는 데 500만원이 든다고 재정지원을 요청했다.
  閔庚宇는 「민족의 진로」에 대한 재정지원도 요청했고, 朴勇은 『권당 가격을 1000원으로 쳐서 月 200부 값 20만원을 예산에 책정했다』고 대답했다. 그는 『책값이 권당 2000원일 경우는 한 달 100부로 하고, 운송비는 보장해 주겠다』고 했다.
 이 약속에 따라 朴勇은 그 후 2000년 통일대축전 제11차 범민족대회 기념 티셔츠 400벌 대금과 재정지원 명목으로 1021만3467원을 범민련 남측본부 재정고문 이○○의 하나은행 계좌로 보냈다. 그때부터 2002년 12월30일까지 이○○의 계좌에는 각종 명목으로 17회에 걸쳐 총 3324만3737원이 송금됐다> 》

 
 같은 공소사실에는 朴勇이 閔庚宇의 보고내용을 북한 정권의 지시에 따라 지휘 및 조종했다는 내용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閔씨는 2001년 1월22일 통일연대 결성時에도 20여 차례에 걸쳐 추진과정을 보고했고, 朴勇은 『통일연대가 윗동네(「북한」 지칭)의 큰 관심사항이다』, 『광범위하게 묶어질 수 있도록 사업하라』, 『제 때 제때 상황을 보고하라』는 등의 지령을 내렸다.
 
 공안기관에 근무하는 한 전문가는 『朴勇은 한통련을 이끌어 온 곽동의(郭東儀·77)가 고령과 지병으로 활동이 어려워짐에 따라, 郭東儀에 이어 사실상 일본에서 對南공작을 책임지고 있는 인물』이라고 했다.
 
 朴勇은 閔庚宇 사건 외에도 2006년 11월 검거된 간첩 강순정 관련 사건 등 각종 공안사건에서 『북한의 지령에 따라 활동해 온 조총련 소속 대남공작원으로서 남한의 대남공작원들을 지휘·조종해 온 인물』로 확인돼왔다.
 
 <지난해 朴勇 入國은 鄭東泳 장관이 결정>
 
 2005년 8·15, 거물 간첩 朴勇을 서울에 공식 입국시켜 反대한민국 활동의 자유를 허락한 인물은 바로 정동영(鄭東泳) 당시 통일부 장관이었다.
 
 인터넷 통일뉴스는 같은 날 「朴勇의 입국은 최초 불허(不許)됐으나, 鄭東泳 통일부 장관의 도움으로 해결됐다」며 이렇게 보도했다.
 
 《한때 법무부와 검찰청이 지난 10일 일본 대표단에서 「조선」 국적을 가진 입국자 중 6·15 해외위원회 朴勇 사무국장과 범민련재일조선인연합 임태광 의장의 入國을 不許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던 것으로 알려졌다.
 郭東儀 의장의 의전을 맡은 관계자에 따르면 이 소식이 개성실무 회담時 북측본부에 알려졌으며, 이를 항의하는 북측 안경호 위원장 명의의 글이 남측에 전달됐다. 郭東儀 의장도 백낙청 상임대표와 수차례 연락을 취했고, 결국 12일 오전 鄭東泳 장관과 백낙청 상임대표의 면담時 입국 불허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통일뉴스 2005년 8월13일 「내가 들어온 것은 6·15 선언의 성과」 中)》

 
 이 기사대로라면 2005년 북한정권의 요구에 따라 朴勇이 입국했는데, 鄭東泳 통일부 장관은 이를 도와줘 간첩에 대한 수사를 방해했고, 千正培 법무부 장관은 이를 수용해 간첩에 대한 수사를 포기했다는 것이 된다. 간첩이 한국 영토에 들어오면 체포해 법정에 세워야 할 의무를 진 정부가 오히려 그 간첩의 활동을 지원하고 편의를 봐준 것이다.
 
 《在日간첩 朴勇,애국단체 반발로 入國좌절》
 
 朴勇은 2005년에 이어 2006년 광주(光州) 6·15 민족통일대축전 행사 참석차 다시 한국에 올 예정이었지만, 국내 애국단체의 거센 항의로 입국이 좌절됐다.
 
 朴勇은 광주행사에서 南측·北측·海外로 구성된 「6·15 공동선언실천민족위원회」의 海外위원회 사무국장 자격으로 反국가단체로 판시된 조총련·한통련 소속 회원 등 150여 명을 인솔할 예정이었다.
 
 朴勇 등의 입국이 좌절된 데는 재향군인회, 星友會, 육사·해사·공사총동창회, 국민행동본부 등 6대 軍 관련 안보단체의 法的대응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들 단체들은 지난 6월9일 오전 대검찰청을 방문, 在日 대남공작원으로 알려진 朴勇의 입국불허 및 그의 하부선(下部線)인 閔庚宇에 대한 검찰수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朴勇을 국가보안법상의 反국가단체 가입 및 간첩 등 행위로 고발했다.
 
 이 일이 있은 직후인 2006년 6월13일 인터넷 통일뉴스는 「보수단체들의 朴勇 고발로 공안당국이 조사하겠다는 방침을 세워 결국 입국이 좌절됐다」며 이렇게 보도했다.
 
 《朴勇 사무국장은 지난 해 서울에서 열린 8·15 민족대축전 당시 아무런 제재 없이 입국했지만 지난 9일 일부 보수단체가 대검찰청에 朴勇 사무국장의 간첩활동을 수사할 것을 촉구하는 고발장을 접수하면서 입국이 불투명해졌다. 이와 관련 통일부 관계자는 『박용 사무국장의 경우 고발장 접수 등으로 사안이 쉽지 않은 문제』라며 난색을 표했다.
 朴勇 사무국장이 몸담고 있는 범민련 이경원 사무처장은 『정부에서 입국을 불허하겠다는 방침을 공식적으로 밝히진 않았지만, 들어오면 조사하겠다는 입장을 계속해 왔기 때문에 사실상 정부가 입국을 불허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반박했다》

 
 애국단체의 「행동」은 日本에서 예상치 못한 성과를 끌어냈다. 국민행동본부는 2006년 6월15일 서울역에서 「『6.15반역후원-간첩비호-세금폭탄』 盧武鉉 퇴진촉구 국민대회」를 개최하는 등 朴勇·閔庚宇 문제를 집중 거론했다.
 
 서울에서 폭로된 朴勇의 실체는 때마침 일본 내 민단의 주류인 反金正日세력을 격분시켰다. 당시 진행되고 있던 민단·조총련 야합(野合)의 핵심 인물이 朴勇이었기 때문이다. 민단 주류세력은 민단에 침투해 들어 온 朴勇과 같은 프락치들을 규탄하기 시작했고, 결국 2개월 후 민단·조총련 야합은 실패로 돌아갔다.
 
 <間諜 송두율에 대한 『포용』주장>
 
 盧武鉉 정권의 간첩 비호는 2004년과 2005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간첩 송두율(宋斗律)사건에서도 드러났다. 당시 2003년 10월13일 盧대통령은 정기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宋斗律에 대한 선처를 주문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검찰의 수사를 방해했다. 당시 연설문 일부를 인용해보자.
 
 《끝으로 송두율 교수에 대한 문제가 크게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이 점에 관해서 정부가 무슨 기획을 해서 초청하였거나 또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청와대로서는 전혀 관여한 바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송두율 교수에 대한 수사와 처벌의 문제는 분단시대 극단적인 대결구도 속에서 만들어진 그 법과 상황에서 지금 거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저는 엄격한 법 집행을 마다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는 대결과 불신과 증오의 시대가 아니라 민족 간의 화합과 포용을 말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정신을 생각하면 이제는 엄격한 법적 처벌도 중요하지만 우리 한국사회의 폭과 여유와 포용력을 전 세계에 보여주는 것도 또한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런 점에 관해서는 어느 한쪽의 극단적인 견해가 일방적으로 여론을 지배하는데 대해서는 상당히 전 우려스럽게 생각합니다. 처벌을 하더라도 제가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이 양 면에 대한 성찰이 함께 진행되면서 처벌돼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 다양한 의견이 수용되고 보다 폭넓은 화해와 포용이 이루어지는 그와 같은 우리 한국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그와 같은 논의가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민보상委, 간첩 출신을 「民主化」로 인정>
 
 盧정권의 간첩 봐주기는 민주화유공자 인정이라는 형태로도 진행됐다. 국무총리 산하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이하 민보상위)가 간첩 전력자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명예 회복하기에 이른 것이다.
 
 민보상위는 2006년 12월4일 190차 심의를 통해 86년 주사파(主思派) 지하조직 구국학생연맹(구학연) 사건에 연루됐던 황인욱(黃仁旭)씨에 대해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인정했다. 黃 씨는 당시 북한정권의 기관지 「민주조선」을 대자보로 알린 「서울대 대자보」 사건으로 구속돼 2년 가량 복역하고 나왔다.
 
 이후 黃씨는 건국 이래 최대 간첩사건으로 불리는 92년 「남한조선로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에 다시 연루돼 국가보안법상 간첩(間諜) 등 혐의로 징역 13년을 선고받았다.
 
 「남한조선로동당 중부지역당」은 지난 8월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국정원 과거사위)」 재조사에서도 실체가 확인됐던 북한조선로동당의 남한 내 지하당(地下黨)이었다.
 
 黃씨는 북한에 密입국해 북한조선로동당에 입당한 친형 황인오에게 포섭돼 당 중앙위 편집국장의 직책을 수행했다. 그는 남한조선로동당 중부지역당의 위장명칭인 「민족해방애국전선」 입당 시 북한조선로동당기와 金日成·金正日 초상화를 걸어두고 충성맹세를 한 뒤 「대둔산21호」라는 대호(代號)를 부여받기도 했다. 2004년 12월 조선로동당 입당 파문의 주역이었던 이철우 열우당 前 의원 역시 이 사건에 연루, 충성맹세를 한 뒤 「대둔산820호」를 부여받았다.
 
 黃씨와 총책 황인오는 당 결성 후 북한으로부터 총 41회에 걸쳐 북한 「A-3」방송을 수신하고 무전기 및 은서를 통해 26회에 걸쳐 대북보고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검찰은 黃씨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으나, 『주체사상에 회의(懷疑)한다』는 반성문 등이 고려돼 1심에서 징역 10년이 선고됐다.
 
 그러나 수감 중이던 黃씨가 高모씨를 통해 비밀지령문건을 밀반출하려다 적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黃씨는 폭 1.5cm, 길이 25cm에 깨알 같이 쓴 이 문건에서 『학원 내 主思派조직에 대한 추궁에는 자백하지 않았다』 『美문화원사건 관련자 모씨, 통혁당 사건 관련자 모씨, 한 언론사의 모씨 등을 안기부가 간첩 혐의를 두고 추적중이니 귀띔해주라』『아무개를 찾아가 주의하라고 해라』는 등의 내용을 적었다.
 
 黃씨는 비밀지령 밀반출 건으로 2심에서 형이 올라가 13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金大中정권 당시인 98년, 황인오 등 다른 조선로동당 중부지역당 사건 연루자들과 함께 대통령특사로 풀려났다.
 
 <간첩을 『민주헌정질서 회복에 기여함』인정>
 
 黃仁旭씨를 민주화유공자로 인정한 제190차 위원회 회의록에 따르면, 이 위원회는 2006년 12월4일 7대1의 찬성으로 黃씨가 활동한 金日成주의 조직 구학련에 대해서는 『그 타도 대상이 군사독재정권을 지칭하는 것』으로, 黃씨에 대해서는 『불법으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에 항거함으로서 민주헌정질서 회복에 기여한 것으로 사료됨』이라고 평가했다.
 
 기자는 2006년 12월10일과 11일 이틀에 걸쳐 민보상위 측 관계자들과 통화를 계속 시도했다. 그러나 사무직원 外 심의를 직접 담당한 전문위원들과는 통화할 수 없었다. 직원들은 『전문위원 분들이 특별히 할 말이 없다고 하신다』『다른 위원 분들은 말씀드리기 어려운 입장이다』『며칠 더 기다리면 연락이 갈 수 있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답변을 피했다.
 
 「간첩 출신자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명예 회복한 것은 문제라고 보지 않느냐」고 거듭 질문하자, 직원들은 『黃씨의 민주화 인정은 남한조선로동당 사건이 아닌 구학련 사건에 해당하므로 문제되지 않는다고 본다. 사무직원이므로 말씀드리기 어렵다』는 대답만 반복했다.
 
 이에 대해 당사자인 黃씨 역시 『중부지역당 사건에 가담해 간첩활동을 한 것을 깊이 후회하고 있으며 그 사건에 대해 명예회복을 신청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며 『이번에도 학생운동 시절의 사건에만 국한해서 명예회복을 신청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민보상위는 黃仁旭씨의 남한조선로동당 사건 연루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이를 심사에서 고려하지 않았다.
 
 당시 위원회 회의록에 따르면, 총9명의 위원 중 한 명은 『신청인의 행위는 친북 공산혁명 활동으로 반국가사범』이라고 했고, 다른 위원도 『친북활동에 불과할 뿐이고 이를 민주헌정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활동으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위원회 한 관계자는 『위원들 모두 신청인이 다른 간첩사건에 연루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며 『그러나 신청자가 「구학련」 사건에 대해서만 명예회복을 신청했기 때문에 따로 문제 삼지 않았다』고 했다.
 
 간첩 혐의를 알고 있었고, 일부 의원의 문제제기가 있었음에도 黃仁旭에 대한 유공자 결정을 강행했다는 설명이다.
 
 <박스; 중부지역당사건 「비밀지령문」에 鄭연주 거명>
 
 KBS 정연주(鄭淵珠)사장은 92년 남한조선로동당 중부지역당 간첩사건의 주모자 黃仁旭OO의 「비밀메모」에 거명됐던 인물이다. 이 같은 사실은 2003년 10월 2일 국회 문화관광위 KBS국정감사에서 당시 한나라당 이원창(李元昌) 의원에 의해 확인됐었다.
 
 93년 5월 13일 당시 이 사건으로 1심에서 10년刑을 구형받고 수감 중이던 黃仁旭은 교도소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풀려나는 고한석(高漢碩)을 통해 지령이 담긴 「비밀메모」를 반출하려다 적발됐다.
 
 고한석은 석방 시 신체검사를 받던 도중 1cm크기의 녹색캡슐 2개가 교도관들에게 발각됐다. 이 캡슐 안에는 7~8명의 이름 등 돋보기가 없으면 읽을 수 없을 정도의 깨알처럼 쓴 글씨가 적힌 종이가 들어 있었다. 고한석은 교도관들의 추궁에 이 메모가 같은 해 4월 중순 黃仁旭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임을 자백했다.
 
 黃仁旭은 『안기부가 내사 중이니 행동에 조심하라』는 경고와 함께 안기부 수사과정에서 알게 된 간첩수사방법 등 조직원들에 대한 구체적 지령을 적어 고한석에게 전달했다고 당시 조선일보 등은 보도했다. 그러나 당시 기사에는 지령문에 적힌 이름이 공개되지 않은 채 안기부가 수사에 착수할 것이라는 내용만 보도됐다. 시간이 지나 중부지역당 간첩사건이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지면서 黃仁旭 지령문사건도 유야무야 됐다.
 
 10년이 지난 2003년 10월 2일, 한나라당 이원창 의원은 『93년 黃仁旭 지령문에 세 번째로 거명된 인물이 정연주사장이며, 당시 鄭 사장이 간첩혐의로 안기부와 검찰의 내사(內査)대상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모든 사건 관계자들이 鄭 사장의 관련 내용에 대해 증언했으며, 鄭 사장이 중부지역당 사건의 黃仁旭과 같은 노선을 걷고 있는 사람으로 추정이 가능하도록 돼 있다』고 밝혔다. 93년 당시 鄭 사장은 미국영주권자인데다 인지도가 낮아 수사가 진척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이에 대해 정연주 사장은 『93년 일시 귀국했을 때 한겨레신문의 한 간부가 (黃仁旭 리스트에) 내 이름이 거론됐다고 알려줬다』며 자신이 黃仁旭 지령문에 언급됐음을 시인했다. 그러나 鄭 사장은 『(黃 씨가 작성한) 그 문건에 내가 간첩 혐의자라고 적혀 있는 것은 아니잖느냐. 억울하다』며 간첩사건 연루사실은 반박했다.
 
 鄭 사장은 「黃 씨를 만났느냐」는 질의에 『93년 한 차례 국내에서 만났다』고 답했다. 그러나 「黃 씨는 93년 구속 중이었다」는 보충 질의에 『91년인지 92년인지 연도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 하겠다』고 고쳐 답했다.
 
 鄭 사장은 『黃 씨는 동아투위 선배 딸의 가정교사여서 미국서 일시 귀국했을 때 그 가족들과 함께 만났다』며 『黃 씨가 「미국에 돌아가면 아프리카 관련 서적과 미국 국방보고서 내용을 보내 달라」고 부탁해 아프리카 관련 서적만 사서 부쳐준 것이 전부』라고 말했다.
 
 당시 KBS측은 당사자인 黃仁旭 씨가 國監 도중 KBS에 전화를 걸어 『鄭 씨의 이름을 적은 것은 나와 만난 사람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당부하기 위해 했던 행동으로 鄭 씨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고 밝혔었다.

 김성욱 프리랜서 기자/ 출처:조갑제닷컴(http://www.chogabje.com/)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관련기사보기
facebook twitter 책갈피저장 메일보내기
소셜댓글
로그인선택하기 트위터 페이스복
원하는 계정으로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여 주십시요.
입력
    • 입력 된 100자 의견이 없습니다.
1
로그인하세요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