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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 항거 나석주 義士 의거 80주년 추모제 거행

羅 의사 손자, 代 이어 민족과 자유수호 헌신

Written by. 이현오   입력 : 2006-12-28 오후 5: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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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2천만 민족아, 나는 2천만 우리 민족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싸웠다. 2천만 민족아, 싸워서 이겨라". 1926년 12월 28일 일제의 동양척식회사에 수류탄을 투척하고 추격하는 일경에게 총을 쏘다 마지막 자결 직전 군중을 향해 외친 나석주 의사의 절규 어린 유언이다.

 ▲ 일제수탈의 상징인 식산은행과 동양척식 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후 '2천만 민족이 싸워서 이기라'고 순국 직전 유언을 남긴 나석주 의사 80주년 추모제 및 기념학술 강연이 나 의사가 의거를 벌인 장소였던 서울 명동 은행연합회관에서 열렸다.
이 날 추모제에 참석했던 황해도민 등 회원들은 오후에는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열리고 있는 나 의사 추모 특별전시회에 도 참석했다 ⓒkonas.net

 암울했던 일제치하에서 민족혼을 일깨우고 일제의 대표적 착취기관이던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시가전을 벌이다 순국한 순국열사 나석주 의사의 의거 80주년을 기리는 추모제와 그의 항일 의열투쟁을 되돌아보는 학술강연회가 당시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들어 서있던 서울 명동 외환은행 본점 뒤 은행연합회관(당시 조선식산은행)에서 열렸다.

 김상옥·나석주 의사 기념사업회(회장 이한동)와 황해도중앙도민회(회장 회장 박상준)주최로 열린 이 날 추모제 및 학술강연회에는 정일권 서울지방보훈청장, 광복회 대표, 황해도 출신 도민 등 150여명이 참석해 나 의사의 애국정신과 희생정신을 기렸다.

 박상준 황해도중앙도민회장은 개식사에서 "나석주 의사가 순국한 80년 전은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지 16년이 되는 해로 3·1운동 등 우리 민족의 끈질긴 독립투쟁을 총칼로 억누르고 식민통치체제를 구축한 때로 나 의사의 통쾌한 의거는 세계만방에 우리의 독립의지를 알리고 민족의 결집을 더욱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됐고 일제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고 회고했다.

 ▲ 박상준 황해도중앙도민회 회장 ⓒkonas.net

 박 회장은 이어 "당시 일제의 동척에 의한 농민수탈은 평년작의 경우 지주와 소작인이 각각 5대 5로 했다가 6대 4, 심지어는 7대 3으로 수탈해가 일 년 농사를 모두 빼앗기다 시피했다"고 일제의 가혹한 수탈정책을 되뇌었다.

 박 회장은 나 의사의 독립운동을 하나하나 열거하기도 했다. 그는 "나 의사께서는 임정 경무국 경호원과 의정원 등에서 활동하며 조국 광복을 위해 온 몸을 던졌으며, 3·1 독립만세 운동때는 수만장의 태극기를 배포하고 고향인 황해도 재령군에서 시위를 주도하다 붙잡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며 "1920년 29세의 나이에는 6인의 권총단을 이끌고 악명 높던 왜경1명과 농민들의 원성을 사던 군수를 현지에서 처단하고 구월산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며 군자금까지 조달한 문무를 겸비한 진정한 독립투사였다"고 그를 추모했다.

 박 회장은 황해도가 고향인 본인으로서 고향의 스승이자 겨레의 스승을 위해 제대로 된 추모식을 주관하지 못해 깊이 성찰하고 있다고 나 의사에 대한 각별한 애모의 뜻을 표하고는 황해도민이 앞장서서 의사의 교훈을 따르고 추모의식을 벌여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박 회장은 인사말에 이어 행사 직전 6·25전쟁 당시 구월산 유격대원으로 참전했던 한 사람으로부터 들은 증언 내용을 알려드리겠다면서 나석주 의사 가족과 관련한 얘기를 꺼냈다.

 증언에 의하면 나 의사에게는 손자 2명이 있었는데 손자들이 6·25 전쟁 당시 황해도 재령과 신천 일대에서 봉기한 유격대원들이 구월산에서 유격활동을 벌일 때 이 손자들도 구월산 유격대원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러다 중공군이 참전해 국군이 후퇴할 때 이들 손자들도 후퇴하다 재령평야가 위치한 재령강 일대에서 고립돼 갈대밭에 숨어있다 중공군에 발각 돼 투항을 권유받았으나 끝까지 싸우다 끝내 수류탄으로 자폭했다는 안타까운 내용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전혀 몰랐던 사실을 구월산 유격대 동지가 알려주었다며 나 의사에 이어 그 손자들까지도 조국수호를 위한 전선에 앞장 선 대를 이어 일신을 나라에 바친 거룩한 정신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가슴처연해 진다고 말해 식장을 더욱 숙연케 했다.

 박유철 국가보훈처장을 대신해 참석한 정일권 서울지방보훈청장은 "조국 광복을 위해 의열투쟁의 선봉에 서서 살신성인 한 나석주 의사는 일본에 당당하게 맞서 대한인의 기개를 유감 없이 보여준, 짧은 생을 사셨음에도 항일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불멸의 발자취를 남겼다"고 추모하고 "일본 식민통치의 상징을 향해 온몸으로 맞선 의사님 열정과 구국정신은 오늘 사는 저희들이 조국을 위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고 말했다.

 이한동(전 국무총리)기념사업회장은 "일제의 식민통치가 마치 정당하고 평온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기만하던 시기에 일으킨 나 의사의 의거는 우리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다시 한번 떨친 쾌거로 일제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우리 겨레에게는 독립의지와 용기를 북돋웠으며 세계에 대해서는 한민족의 강인한 독립정신을 떨치고 일제의 선전이 왜곡 날조된 것을 폭로한 역사성을 지닌 의거"라고 거사 의미를 부여했다.

 ▲ 이한동 기념사업회장 ⓒkonas.net

 이 회장은 특히 일제가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기습에 이어 벌인 시가전을 보름이상이나 보도를 관제한 것은 그 만큼 중대사로 여겼던 증거라고 평하고 나 의사가 운명 직전 당신의 이름과 의열단원 소속임을 당당하게 밝힘으로서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분명히 천명해 일제 통치배들의 가슴을 서늘케 한 의거였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이어 "국권을 강탈당한 을사늑약 체결 100년이 지난 이 때, 다시는 되풀이 되어서는 아니 될 치욕의 망국 역사를 되돌아보며, 의사님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과 거룩한 희생정신을 다함께 계승 구현해 가자"고 덧붙였다.

 이어 나석주 의사의 생애와 그의 의열투쟁을 조명한 김창수(한국사) 동국대 명예교수는 의열투쟁은 다른 독립운동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며 투쟁한 적극적인 독립투쟁으로 항간에 의열투쟁을 테러리즘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견해라고 일부 학자들에 의해 폄하되는 주장을 일축했다.

 ▲ 김창수 동국대 명예교수 ⓒkonas.net

 김 교수는 "3·1 독립운동 이후 항일 민족운동 가운데 의열단의 투쟁은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이를 학술적으로 크게 조명하지 못해 안타깝기 그지없다"며 "이제부터라도 자료를 발굴하고 학술적인 재조명이 이루어지도록 학계가 나서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1919년 경남 밀양 출신의 김원봉, 이종암, 한봉근 등 동향인들이 중국 길림에서 중국 각지에서 성립된 독립단체들의 미온적인 활동을 개탄하고 급진적 독립운동을 표방하고 나선 것이 의열단이라며 특히 조직 직후 발표된 공약(公約)10조 중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됨' 3항과 '피사(被死 : 적을 죽이다)치 아니하며 단의(團義)에 진(盡)함'이란 8항이 의열단의 행동강령을 대표하고 있으며, 그를 온몸으로 보여준 결과가 김상옥·나석주 의사의 의거라고 평가했다.

 나석주 의사는 1890년 황해도 재령군 북율면에서 출생, 1910년 백범 김구 선생이 세운 양산학교에서 수학하고, 1913년 한인무관학교를 졸업했다.

 ▲ 나석주 의사 ⓒkonas.net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 재령에서 시위를 주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20년에는 김덕영, 최호준, 최세욱, 박정손, 이시태 등과 함께 6인의 권총단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였고, 1920년 11월 22일 상해 임시정부의 경무원, 의정원 등에 근무하였으며 한인애국단, 의열단에 가입하여 기관 폭파활동과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그는 1926년 5월 김구, 김창숙 등과 논의하여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국내의 일제기관과 친일부호들을 제거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일제의 착취기관이었던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를 폭파할 목적으로 같은 해 12월 26일 인천항을 통해 서울로 잠입해 활동하였으며, 이틀후인 12월 28일 하오 2시에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들어가 폭탄을 던지고 권총으로 일본인들을 사살한 후 시가전을 벌이다가 35세의 나이로 자결했다.
정부에서는 1962년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Konas)

 이현오 기자

 ▲ 헌화하는 황해도 출신 안응모 전 내무장관 ⓒkonas.net

 ▲ 명동 은행연합회관 뒤편 거사 자리에 서 있는 나 의사 동상. 노무현 대통령의 추모 화환이 눈길을 끈다 ⓒkona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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