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6자회담 타결과 러시아
러시아 시각에서 본 2·13 북경 합의문
2002년 북핵 2차 위기가 닥쳤을 때 러시아는 10년 전 1차 위기 때와는 달리 사태 해결을 위한 중재역을 적극 자임하였다. 모스크바 정부는 로슈코프 외무차관을 2003년 1월 평양에 보내 ‘북한 핵 프로그램의 동결’과 ‘정치-경제적 보상’을 교환하는 ‘포괄적 타결’ 안을 제안하였다. 사태 초기부터 중국보다 먼저 해법을 제시했고, 미국에게도 평화적인 해결 노력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중국과 일본이 제안했던 해결 방안도 러시아 측의 입장과 유사했기에 초기 러시아의 행보는 국제 사회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북핵 논의를 위한 6자 회담이 공전을 거듭하는 가운데, 북한이 미국과의 양자 대화에 비중을 두고, 미국도 중국의 역할에 의존함에 따라 러시아의 의욕과 자리는 얼마 있지 않아 퇴색되고 말았다.
그 후 2007년 2월 13일에 이르기까지도 러시아의 입장은 한결같았다. 유연한 대북 제재를 바탕으로 전력 및 에너지 공급을 통해 북한의 경제적 자립을 보장할 때 핵 폐기 가능성이 더욱 커질 수 있음을 지적해왔다. 6자회담 수석대표인 로슈코프 외무차관은 합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복수 실무그룹을 구성해 수시로 접촉하는 일이 중요함도 주장했다. 결국 러시아측이 강조해온 사안들이 공동 합의문에 포함됨으로써 러시아는 앞으로의 과정에서 한층 더 의미있는 역할을 맡을 가능성이 커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5차 6자회담 북경 회의에서의 합의문 채택은 러시아로선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무엇보다도 러시아의 입장이 제대로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국내적으로 푸틴 정부의 외교적 성과로 상당한 평가를 받을 것이다. 김정일 정권의 핵무장은 체제 유지를 위한 것이니 어디까지나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함을 주장해온 러시아는 이제 평화적 타결의 마무리를 위해 미국과 중국, 일본과 한국과 나란히 똑같은 한 몫을 하게 되었다. 또한 북핵 문제가 다시 불거진 이래 미국과 중국만을 번갈아 쳐다보던 국제사회가 최근 가파른 국위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러시아의 비중을 공식적으로 재평가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특히 북한에 제공될 지원물자가 중유 외에 다른 에너지원과 인도적 지원을 포함됨에 따라 러시아의 무게는 한층 더 두드러진다 . 러시아 국내 언론이 북한이 러시아에 지고 있는 80억 달러 상당 국가채무의 변제 가능성을 논하면서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음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13 북경 합의문, 이란 핵과 러시아
북핵문제의 해결을 위한 미국과의 공조는 현재 이란 핵 사태를 둘러싸고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미국과의 힘겨루기에서 러시아로 하여금 좀 더 넓은 행동반경을 누릴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 동안 북한과 이란의 핵무장 논란에 대해 러시아는 한편으로는 미국과의 협력에 바탕한 유연전략과 미국에 대한 견제를 목표로 하는 강경전략을 병행 구사해왔다. 대량살상무기의 비확산에 대한 원칙을 준수하는 데 있어서는 미국과 협력하는 유연전략을, 해당국에 대한 제재와 무력 사용 가능성에 대해서는 미국을 적극 견제하는 강경전략을 사용해온 것이다. 즉, 비확산 원칙에서는 미국과 협력전략을, 비확산체제 유지 방법에 있어선 자국의 이익을 최대화하고 대미 견제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골몰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러시아는 이란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반대하되 평화적 핵 주권만큼은 인정해줘야 함을 역설해왔다. 또한 이란 사태의 유일한 해법은 러시아 영토 내에 이란을 위한 우라늄 농축 시설의 공동시공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동시에 이란과의 군사협력 수위를 높임으로써 러시아의 입지와 국익을 챙겨온 것도 사실이다. 미국이 이라크에 이어 이란마저도 무력 응징함으로써 중동의 질서 재편을 주도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 러시아는 최근 신예 방공미사일 Tor-M1 29기를 이란에 인도하였다. 유사시 이란 해군이 호르뮤즈 해협을 봉쇄하는 데 결정적일 수 있는 초음속 함대함 미사일 야혼트도 이미 제공되었다는 설이 무성하다. 이들 체계는 미국이 이란에 대해 군사적 응징에 나설 경우 미군 전투기나 항모를 위협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부시 행정부와의 관계를 정면 대결 구도로 이끈다고 해서 푸틴 정부에게 이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근래 경제 회생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은 러시아로서는 팍스-아메리카나 시대에 중국과의 반미 연대만으로 자국의 이익이 보장되지 않을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더욱이 앞으로 이란 사태를 둘러싸고 미국과의 갈등이 갈수록 깊어갈 개연성이 크다. 집권 한 해를 남겨둔 푸틴 대통령으로선 이번 6자회담 합의문의 이행을 둘러싼 대미 공조 채널의 가동이야말로 워싱턴을 향해 터놓은 ‘전략적 대화창’일 수 있다.
향후 러시아 정부의 태도 전망
현재 전력난에 시달리는 북한에게 송전해줄 수 있는 여력을 가진 러시아로서는 향후 합의문의 구체적인 이행 과정에서 이전과는 달리 좀 더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인 역할을 하려고 할 것이다. 러시아 극동의 잉여 전력은 물론, 새로운 화력발전소의 건설을 통한 공급선 확보, 나아가 북한 소재 화력발전소 재건에의 참여와 석탄․가스의 제공 등 북한 에너지난의 해소를 위해 러시아가 맡을 수 있는 역할은 엄청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러시아는 이번 사태의 타결 방안이 에너지원의 제공을 둘러싸고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중시, 궁극적으로 북한 개방에 따른 시장 선점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로 삼으려고 할 것이다. 북한을 개혁․개방시키는 과정에서 석유와 가스, 전력 모든 분야에서 풍족한 러시아로서는 자국의 역할 비중이 커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중유 100만 톤 규모로는 북한 경제의 회생은 커녕 심각한 에너지난의 해결에도 턱없이 부족할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중유나 전력의 공급은 언제 어느 때건 중단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북한으로선 중장기적인 에너지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궁극적으로 경수로의 제공이 새롭게 거론될 가능성이 크다. 이 상황에서 러시아는 자국의 극동지방을 포함한 북한 이외 지역에서의 핵 재처리 방안이야말로 반영구적인 해결 방안이 될 수 있음을 들어 일정한 역할 지분을 확보하려고 애 쓸 것이다.
아울러 이번 합의로 북한이 경제를 회생시킬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다면 궁극적으로 러시아는 중국 동북3성 못지않게 러시아 극동 개발을 활성화하는 계기로 활용하고자 할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은 북미-서유럽-아시아․태평양 3대 국제 경제 축의 중심에 위치한 러시아 극동을 육상․해상․항공 루트의 최단시간 허브로서 발전시키려는 야망찬 계획을 공표해왔다. 그러나 두만강 개발 프로젝트나 나홋카 특구 실험이 실패한 데 이어 경제성장을 거의 멈춘 북한의 존재는 푸틴의 이 같은 야심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어왔다.
이번 2.13 북경 합의문은 향후 60일내 핵시설을 ‘불능화’하는 방향으로 북한이 취할 조치의 수준에 따라 한국을 포함한 5개국의 지원량이 달라진다는 진화적 지원 방식을 택했다는 데서 흥미롭다. 말하자면 핵 폐기를 향한 북한측 양보의 폭이 크면 클수록 러시아가 제공할 수 있는 에너지원의 규모나 누릴 수 있는 발언권의 무게도 커질 것이다. 그렇다면 러시아 정부도 한반도 안보 논의의 장에 한 몫 할 것이라는 사실만을 중요시할 것이 아니라 한반도가 진정한 평화와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스스로 짊어져야 할 책임도 그만큼 무거워졌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konas)
심경욱(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shim@kida.re.kr)
유영철(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 yyc@kida.re.kr)
출처:K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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