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大中 씨는 기어이 챔벌린의 길을 가고 말 것인가?
1938년9월30일 독일 땅 뮌헨으로부터 개선장군처럼 귀국한 영국 보수당 정권의 네빌 챔벌린(Neville Chamberlain) 수상은 런던의 다우닝가 10번지 수상관저 앞에 운집한 환영군중들 앞에서 짤막하지만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영국 역사를 통해 두 번째로 영국 수상이 독일로부터 명예로운 평화를 가지고 귀국했습니다. 나는 우리 시대의 평화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이제 여러분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편안한 잠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이 장면은 챔벌린 수상이 나치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를 상대로 추진했던 소위 대독(對獨) ‘유화정책’(Appeasement Policy)의 클라이맥스였었다.
챔벌린은 9월29일 뮌헨에서 독일의 히틀러 총통,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Edouard Daladier) 수상 및 이태리의 베니토 무쏠리니(Benito Mussolini) 총통과 가진 4자회담에서 ‘뮌헨 합의’(Munich Agreement)라는 이름의 ‘밀약’ 을 타결시켰다. 이 ‘밀약의 핵심은 당사국인 체코슬로바키아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의 1/3에 해당하는 주데텐란드(Sudetenland)를 독일에 넘겨주는 것이었다. 그 대신 챔벌린은 히틀러에게 “전쟁을 도발하지 말 것”을 요구하여 히틀러로부터 “향후 모든 분규는 대화를 통해 해결한다”는 ‘공약(空約)’을 받아냈다. 챔벌린은 이를 가리켜 ‘명예로운 평화’라고 일컬은 것이다.
이때 영국 국민들은 챔벌린의 ‘유화정책’이 거둔 ‘외교적 성과’(?)를 열렬히 환영했다. 영국의 유력 신문들은 “이로써 영국의 아들들이 다시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지 않게 되었다”는 사설(社說)을 게재했고 영국 의회는 압도적 다수표로 챔벌린의 ‘명예로운 평화’를 추인했다. 그러나, 그 뒤의 역사가 실증한 것은 ‘뮌헨 합의’가 하나의 사기문서(詐欺文書)였고 챔벌린은 사기극(詐欺劇)에 놀아난 광대(廣大)에 불과했다는 것이었다. 이때 영국 정계에서 불과 2-3명의 정치인이 ‘뮌헨 밀약’의 허점(虛點)을 간파하고 이에 반대하는 기록을 남겼다.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의회 발언을 통해 이 ‘밀약’은 “오히려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초청장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고 챔벌린 내각의 외상(外相)이었던 안토니 이든(Anthony Eden)은 ‘뮌헨 밀약’에 항의하여 사직했다.
‘뮌헨 밀약’의 사기극이 그 실체(實體)를 들어낸 것은 만 1년 뒤였다.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조셉 스탈린(Joseph Stalin)의 소련과 ‘상호 불가침조약’이라는 또 다른 ‘밀약’을 체결하고 1939년9월1일 두 나라가 공모하여 폴란드를 침공하여 분할함으로써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전쟁인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챔벌린은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수상직을 사임했고 그로부터 6개월 뒤 암(癌)으로 사망하는 비운(悲運)의 정치인이 되었다. 영국 국민들은 그의 후임자로 처칠을 수상으로 선임하여 그의 영도 하에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한반도에서 우리는 지금 챔벌린과 ‘뮌헨 밀약’의 망령(亡靈)들이 되살아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전 대통령 김대중(金大中) 씨와 그의 소위 ‘6.15 남북공동선언’이 그것들이다. 필자는 1938년9월 쳄벌린 영국 수상의 뮌헨 방문과 2000년6월 김대중 씨의 평양방문 사이에 무슨 차이가 존재하는 지 알 수 없다. 2000년6월15일 평양방문을 끝내고 서울 공항에 귀환한 김대중 씨의 귀환 제1성 중의 하나는 “김정일과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고 모든 문제를 대화를 통하여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1938년9월30일 런던 교외 히드로우 공항에서 챔벌린이 보여주었던 연기(演技)를 서울 공항에서 재연(再演)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또한 김정일이 그에게 “통일 이전은 물론 통일 이후에도 주한미군의 존재를 수용하겠다”고 ‘약속’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필자는 그에게 “과연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험이 살아졌느냐”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때마침 ‘6.15 남북공동선언’ 발표 7주년을 맞이하여 요즘 김대중 씨의 언론 활동이 상종가(上終價)를 보여 주고 있다. 그 일환으로 지난 13일 SBS-TV와의 회견에서 그는 “6·15 선언이 없었다면 지금쯤 전쟁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이 같은 주장은 심히 어폐(語弊)가 있는 말이다. 한반도에서는, 굳이 2000년의 ‘6.5 선언’ 이후에만 전쟁이 안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47년 전인 1953년 6.25 전쟁이 휴전(休戰)이라는 이름으로 봉합(縫合)된 뒤 지금까지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6.15 선언’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펴고자 한다면 그는 그에 앞서 1953년 휴전 이후 ‘6.15 선언’ 발표 때까지 무려 47년간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를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6.25 전쟁 휴전 이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남북대화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이다. 그 동안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성장하는 국력과 동맹국인 미국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한국군 현대화와 함께 주한미군과 한미연합사령부 및 한미 합동군사훈련과 ‘작전계획 5027’에 포함되어 있는 전시(戰時) 대규모 미 증원군의 참전 계획 등 한미 연합작전체제가 제공하는 막강한 전쟁억지력 때문이었다.
김대중 씨와 그로부터 대통령직을 물려받은 노무현 씨는 김대중 씨로부터 물려받은 ‘햇볕정책’을 ‘대북포용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재포장하여 집요하게 추진하고 있다. 그 여파(餘波)가 ‘퍼주기’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무절제한 대북지원이지만 그보다도 심각한 것은 남한 사회의 친북ㆍ좌파 인맥을 총동원하여 정부 안팎에 배치하고 국가예산을 무절제하게 남용하여 남한 사회를 친북ㆍ연공 사회로 재편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 심각한 상황은 ‘우리민족끼리’라는 알쏭달쏭한 구호 하에 북한의 김정일 정권과의 ‘민족공조’를 앞세우는 가운데 한국군에 대한 ‘전시작전통제권’의 ‘환수’라는 가공적인 허구를 조작하여 한미 안보동맹을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있다는 데 있다.
한미 안보동맹을 파괴하는 것은 사실은 곧 북한의 새로운 남침을 초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될 우려가 있다. 이것이, 황장엽(黃長燁) 씨의 증언에 의하면 김일성이 생전에 즐겨서 거론했다는 ‘갓끈’ 전술이다. 곧 ‘남조선’이라는 ‘머리통’은 한미동맹이라는 ‘갓끈’으로 ‘머리통’ 위에 고정된 주한미군이라는 ‘갓’의 힘으로 안보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갓끈’을 잘라 ‘갓’만 날려버리면 ‘남조선’은 스스로 무너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북한을 방문하는 남한 사람들을 만나는 재북 가족ㆍ친척들이 남한의 발전상은 인정하면서도 “미군만 물러나면 바로 그 다음날 우리가 남조선을 접수하여 남조선의 모든 것을 우리 소유로 만들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금년에도 6월은 ‘6.25’가 아니라 ‘6.15’의 달로 변질되고 있다. 서울과 평양 및 해외 여러 곳에서 이른바 ‘6.15 민족축전’이라는 광기(狂氣)어린 무대가 대한민국의 국고지원금으로 펼쳐지고 있다. 그러나, ‘민족축전’이라는 이름으로 펼쳐지는 이 행사는 결코 민족 차원의 행사가 아니다. 지난 달 남북을 연결하는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시험 운행열차에 초청되어 탑승했던 인물들이나 또는 이번에 평양에서 열리고 있는 ‘남북 공동행사’에 남쪽과 해외에서 참가하는 인물들은 결코 ‘보통’ 남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이미 대한민국보다 북한을 위해 봉사하고 있는 친북ㆍ좌경ㆍ반미 성향 일색의 인물들이다. 이들만이 참가하는 ‘그들만의 잔치’가 진정한 의미에서 남북한의 ‘민족적 화해’에 도움이 될 까닭이 없다. 이들은, 좋게 말하더라도, 뮌헨에서 돌아오는 챔벌린을 개선장군으로 환영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을 뿐이다.
필자는 한반도판 챔벌린의 길을 걷고 있는 김대중 씨가, 만약 그가 나라 안팎의 많은 사람들이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것처럼 이미 북한의 세습 독재자 김일성ㆍ김정일 부자(父子)와의 사이에 뗄 수 없는 모종(某種)의 상부상조(相扶相助)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의도적ㆍ계획적으로 북한의 공산정권을 위하여 봉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1939년9월1일 히틀러의 나치 독일군이 폴란드의 단치히 회랑(回廊)을 유린하는 것을 보고 그 동안의 대독 ‘유화정책’의 실패를 자인한 나머지 독일에 대해 선전을 포고하고 수상직을 사임한 뒤 그로부터 6개월 후에 실의(失意) 속에 암(癌)으로 생애(生涯)를 마감했던 네빌 챔벌린의 전철(前轍)을 밟지 않도록 심사숙고(深思熟考)하기를 거듭 바라마지 않는다. [끝]
이동복 / 전 명지대 교수(http://www.dblee2000.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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