若無海軍 是無國家
해군의 6·25전쟁 勝戰기록과 전시 해군의 역할
대한민국해군은 1945년 11월11일 결성된 '해방병단'을 모체로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빈약한 장비와 인력으로 창설된지 얼마 되지 않아 6·25라는 초유(初有)의 전쟁을 맞았으나 해군·해병 선배들의 희생과 피나는 노력으로 자유 대한민국을 방위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사에 기록된 우리 해군의 혁혁한 전공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한국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전후세대들에게 해군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일부나마 소개하고, 반도국가인 우리나라에 있어서 해상작전이 전쟁 승패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이 글을 쓴다. (여기에 기술하는 내용은 유엔군해군이 본격적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기 이전에 우리해군 단독으로 수행한 작전에 국한한 것으로서, '손원일 제독의 회고록', '해군 일화집', '바다여 그 말하라!' 에서 발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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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북괴(北傀)의 기습남침으로 발발된 바로 그날, 1950년 6월 25일(일) 우리해군 유일의 전투함인 백두산함(PC-701, 함장 최용남 중령)은 긴급명령을 받고 1500시 진해를 출항했다. 동해로 이동 중 2012분 부산 동북방 40Km해상에서 남하하는 의아선박(疑訝船舶)을 접촉하고, 26일 0030분~0138분간 교전하여 3인치(76mm) 함포로 적수송함(敵輸送艦)을 격침시켰다.
적함은 소련해군이 사용하였던 1,000톤급 선박으로 속력은 11노트(20Km), 길이 70m, 폭 10m이다. 해군과 상륙특공대(上陸特攻隊) 600여명을 태우고 있었다. 무장은 85mm포 1문과 중기간총 2~4정을 장착하고 있었다. 적재물은 식량, 무기, 탄약으로 판단된다. 우리 측의 피해는 85mm포탄이 조타실(操舵室)에 명중하여 2명 전사하고 2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해전은 6·25가 일어나면서 북괴군의 기습으로 힘없이 무너지던 한국군에게 첫 승리를 안겨주었다. 특공대를 싣고 부산에 상륙하려던 적함을 상륙 바로 전에 해상에서 격침시킴으로써 적(敵)의 기도를 사전에 분쇄해버렸다.
대한해협 해전의 규모는 1차대전 당시 영국함대와 독일함대 사이의 유틀란트 해전이나, 2차대전 당시 미국함대와 일본함대 사이에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 또는 사상 최대규모의 레이테 해전에 비하면 아주 작은 규모다.
그러나 이 해전에서 한국해군이 승리함으로써 부산을 지켜 안전한 해상수송로를 확보하게 되었고, 곧 이어 부산에 유엔군 병력과 물자가 속속 도착했다. 낙동강 전선을 방어하던 국군에게 기다리고 기다렸던 통쾌한 반격작전의 발판을 마련해 주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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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 16일, 북괴군 제7사단 소속의 증강된 1개 대대 약 650명이 고성(高城)을 무혈점령했다. 저녁에는 통영 입구인 원문(猿門)고개에 진출하였고 8월 17일 새벽에는 통영시가지를 완전히 점령했다. 그리고 견내량(見乃梁)을 건너서 거제도(巨濟島)를 점령하려고 하였다. 만약 이렇게 되면 마산(馬山)과 진해(鎭海)는 해상으로부터 봉쇄되고 적(敵)의 지상포 사정권내에 있게 되는 것이다.
해군은 급히 상륙작전계획을 수립하고 8월 17일 2000시에 통영읍(현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長坪里)해안에 김성은 중령이 지휘하는 해병 제1대대가 기습상륙을 감행했다. 작전에 함정 총 7척(703함, 901정, 302정, 307정, 312정, 504정, 512정, FS평택호)과 20여척의 어선이 투입되었다. 함정은 협조된 공격계획에 따라 통영항구 정면에서 함포사격을 육지로 다음날 아침까지 가했다. 이것은 해병대의 진격방향을 적(敵)이 모르도록 하기 위한 양동작전(陽動作戰)이었다.
상륙군 제2중대는 8월 18일 새벽에 고성에서 통영읍으로 진입하는 원문고개를 확보한 뒤 적(敵)의 진격을 차단했다. 3중대와 7중대는 통영시가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망일봉을 미리 점령해 적군 100여명을 사살했다. 이날 오후에 통영을 완전히 탈환했다. 원문고개는 적(敵)의 유일한 공격로이자 통영방어에 있어서 전술상의 요충지(要衝地)여서 해병대는 9월 20일까지 필사적으로 방어했다.
상륙작전과 원문고개 방어전에서 아군(我軍)은 적 사살 469명, 포로 86명 그리고 많은 화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적 대대장, 작전참모 등 지휘관 전원이 사살되었다. 작은 어선 3척을 타고 집단으로 해상으로 도주하던 잔적도 해군의 504정과 312정에 의해 격침되었다. 반면, 아군의 피해는 전사 15명, 부상 47명에 불과했다.
이 통영전투는 한국해군과 해병대가 단독으로 수행한 최초의 상륙작전이었다. 무엇보다도 부산 교두보(橋頭堡)의 측방위협을 제거했다는 점과 암담(暗澹)했던 전세(戰勢)를 역전시키는 불씨를 지핀 전투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자못 컸다. 그 뿐만 아니라 작전상 후퇴만 거듭하던 국군 장병들에게는 승리의 신념을 심어 준 전투였다.
전원이 일 계급 특진의 영예를 얻은 진동리(鎭東里)작전에 이어 통영상륙작전에서 또다시 크게 전공을 이룩한 김성은부대에 대하여 외신기자들은 ‘귀신잡는 해병(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한국전쟁 중 해병대의 5대 전첩(戰捷) 중 첫 번째의 전승이었다.
셋째, 국가원수를 함정으로 안전하게 이송하다.
우리해군은 이승만 대통령 일행을 1950년 7월 1일~7월 2일간 목포에서 부산간 이송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전쟁 중 국가원수에 대한 안전보위(安全保衛)는 매우 중요하다.
이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 오전 3시에 서울을 떠나 그날 대전에 도착했다. 이 대통령은 6월 29일 수원에서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원수를 만나 요담을 나눴다. 북괴군이 계속 남하하자 대통령은 더 이상 대전에 머무를 수가 없게 됐다.
그런데 부산까지 내려가는 길이 문제였다. 대구를 거쳐서 가는 경부국도가 일반적인 길이었지만 추풍령이 마음에 걸렸다. 지방의 공산분자(共産分子)나 게릴라들의 공격을 받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리(현 익산)를 거쳐 목포로 내려가 해군함정을 이용해 부산까지 가기로 하였다.
7월 1일 오전 3시, 대전 충남도지사 관사를 빠져나온 대통령 일행(대통령,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비서, 경무대 경찰서장)은 억수같이 퍼붓는 빗속을 뚫고 온종일 흙탕길을 달려 이날 오후 목포에 도착했다. 1400시 경에 해군목포경비부 제3정대소속의 소해정(YMS-514, 길주, 320톤)이 대통령 일행을 태우고 부산을 향해 출항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180톤급의 소해정(JMS-309, 대동강)이 그 뒤를 따랐다. 7월 2일 1100시 경에 부산 해군보급창 부두에 도착했다. 두 소형함정의 장병 50여명은 이동 간 폭풍우 속에 큰 파도와 사투를 벌이면서 임무를 완수했다.
대한민국 해군(해병대)은 장보고 제독과 이순신 제독의 전승을 이어받아 긴 역사 속에서 작금에 이르기까지 한번도 패한 적이 없는 상승불패(常勝不敗)의 훌륭한 전통을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을 통해 ‘약무해군 시무국가(若無海軍 是無國家), 즉 해군이 없었다면 대한민국도 없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konas)
김성만(전 해군작전사령관, 예비역 해군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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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부터 우리정부와 국민들이 해양의 중요성에 눈을 떴더라면 지금쯤 태평양이 대한민국의 영해가 되었을 것이다. 바다를 확보하지 못하면 그 나라의 미래는 없는 법. 과거의 영국, 스페인, 포루투갈 등이 그랬고, 지금은 미국이 전 세계의 바다를 자기들의 앞마당화 하지 않았는가?</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
2007-06-19 오전 8:55:17김제독님.愛 海軍을 통한 자유대한민국의 꺼져가는 등불을 밝히기 위해 참 수고가 많으십니다. 3면이 바다인 우리 나라는 좁은 육지 안의 개구리가 아니고 망망 대해의 고래같이 역동적인 해양 세력의 발전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고생이 많은 우리 해군의 노고에 진정으로 감사를 보냅니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
2007-06-18 오후 7:28:09한자로 된 제목을 잠시 잘못 올렸습니다. 是無海軍이 아니라 若無海軍 맞는데 편집자가 잠시 착각을 했습니다. 지금은 수정되어 있습니다. 다시는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잠시나마 독자님들께 눈살을 찌푸리게 해드린 점 사과드립니다.<편집자></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
2007-06-18 오후 6:3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