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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대선, 집권세력의 천기누설?

반역의 평화물결을 태극기 물결로 덮어버리자

Written by. 백병훈   입력 : 2007-06-30 오후 1: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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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 대선을 앞두고 집권세력이 천기를 누설했다.

 전격적 남북정상회담 추진문제를 둘러싼 “한반도 평화대공세”가 천기누설의 단초다. 그동안 집권세력 쪽에서는 집요하게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별러왔었다. 그들은 이제 대선을 앞두고 정상회담 카드를 다시 끄집어 낼 조짐을 보이고 있다.

 남북화해, 한반도 평화통일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남북간에 정략적 정상회담이 이루어진다면 그들이 속내를 드러낸 것처럼, 이번 정상회담은 그냥 남북정상회담이 아니라 "평화"라는 수식어가 앞에 붙는 "남북평화정상회담"이 될 것이다. 장미빛 평화로 덧칠해진 "남북평화 정상회담"을 통해 궁지에 몰린 남북 양 정권은 필사적으로 탈출구를 찾고자 할 것이기 때문에 정상회담은 그들에게는 떨칠 수 없는 유혹이다.

 그 유혹이 몰고 올 후폭풍이 바로 “한반도 평화대공세”이다. 그들은 한반도 평화선언을 통해 남북불가침 및 평화협정을 체결하고자 할 것이다. 연출효과를 높이기 위해 상징적 군비축소도 단행 할 수 있다. 북 핵포기선언과 북미수교 협상진행, 남북연합단계 돌입선언(낮은단계연방제)으로 상징적 통일시대 개막을 알릴 수도 있다.

 더 나아가 <6.15선언>에서 합의된 남북연합단계 돌입을 선언하면서 그 후속 조치로 북측은 전투적 노동당강령을 포기하는 대신 남측은 국보법을 폐기하는 만용을 부릴 수도 있다. 헌법상의 영토조항을 변경해 북한에 대한 대한민국의 실효적 지배를 무력화시키는 통일헌법 제정, 통일시대에 맞는 권력구조 개편을 빌미로 헌법개정 문제를 제기 할 가능성도 있다. 집권여당에서는 이미 2007년이 개헌의 적기라고 못 박아 왔다. 전사회적 분위기가 뜨거워지면 초법적 “평화통일헌법”의 제정추진도 가능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요컨대 금년 대선을 “평화”의 물결로 덧씌우겠다는 전략이다.

 “전쟁인가 평화인가”: 강요받을 선택

 이처럼 “전쟁인가? 평화인가?”를 대선투쟁의 잇슈로 던져 국민들에게 선택을 강요하여 좌파집권을 연장하겠다는 것이 남북 양정권이 생각하는 금년 대선전략의 최대공약수다. “전쟁반대, 한반도 평화”라는 거대한 물결이 거리를 넘치면서 젊은이들을 열광케 하고, 많은 국민들을 마취시킬 것이다. 저들의 현란한 평화공세에 미혹된 국민들은 혼란으로 빠지고 대선을 판가름 해줄 중도세력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위장된 평화의 탈을 뒤집어 쓴 남북간의 협공은 대선국면을 기만 할 수도 있고 국민의 민의를 왜곡시켜 대선판도를 흔들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뜻하지 않은 국체변경, 국가해체라는 돌이킬 수 없는 교각살우의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국체의 변경은 대한민국 건국이념과 합법적 정통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가 되며, 대한민국의 합법적 종식선언으로 까지 나아가 국가해체로 직결될 수도 있다. 이 비극적 상황의 기폭제가 "평화"로 덧씌운 남북평화정상회담이고, 한반도 평화대공세이다.

 이처럼 김정일의 엄호, 노무현의 지휘, 김대중의 막후조정, 여권후보의 연출로 생사를 건 평화투쟁은 한마디로 좌파의 총체적 방어와 우파의 총반격으로 사상 유례없는 대격돌이 될 것이다. 반미+ 반한나라+ 반보수연합전선과 한미FTA에 반대하는 민중을 결집시켜 투쟁동력을 배가 시킬 것이다. 그들 손에는 평화의 깃발과 메가폰이 들려지게 될 것이다. 이미 저들은 “평화”라는 용어를 선점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평화”가 문제다.

 이번 대선이 김정일, 김대중, 노무현 좌파 3각편대의 출격에 의한 “대선사변”이라면 저들이 말하는 평화는 위장된 거짓평화다. 평화가 목적이 아니라 평화를 깨트리기 위한 평화전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의 이름으로 평화를 소멸시키기 위한 전형적 좌파의“평화투쟁”인 것이다.

 왜 그런가? 역사로 돌아가 보자. 평화의 반대개념은 전쟁이다. 그런대 전쟁과 평화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는데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모든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라고 규정했다. 예컨대 1917년 10월의 볼쉐비키 승리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현상의 군사적 측면일 뿐이었다. 그들은 혁명의 전야에 23,600명의 혁명전사로 1억 인구의 짜르체제를 타도하고 전복했다. 그들이 러시아 혁명의 아버지 헤르쩬이 말했듯이 “임박한 폭풍속의 젊은 키잡이들” 이었던 것이고, 볼쉐비키는 민중에게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쳤던 것이다. 이것이 러시아 혁명이다. 세계변혁을 꿈꾸었던 그들의 혁명사상은 파괴는 창조, 폭동은 예술, 전쟁은 신의 행군이라고 바라보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정치군사관"으로 이어졌다. 

 오죽했으면 한때 혁명의 동반자이자 탁월한 이론가였으나 혁명동지가 보낸 자객에 의해 무참히 참살된 트로츠키는 훗날 레닌주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군사적이었다고 비꼬았을까?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모택동 이들 모두는 전쟁과 폭동을 찬미했고 그들이 행사하는 전쟁은 “정의의 전쟁”이라고 못 박았다. 그래서일까 1917년 러시아혁명은 러시아의 야만주의를 타파하기 위하여 야만적인 수단을 사용했던 볼쉐비키 군단의 비극이었던 것이다.

 이 엄연한 역사의 자취가 남긴 진실은 좌파변혁론자들을 규율하고 지배하는 전쟁과 평화의 문제가 우리의 것과 다르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좌파철학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적 세계관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적개심의 또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런 그들에게 전쟁이 없다고 평화가 아니다. 저들의 정치경제학은 공산주의에 대립되는 모순된 사회제도가 있는 한 평화는 불가능하다는 결정론적 평화관이다. 그들에게 평화는 혁명적 투쟁으로 쟁취해야 할 대상이었고, 평화를 구현하는 수단은 부르조아 정권의 전복이라고 규정해 결국 평화문제는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문제라고 결론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이 규정하는 평화를 위한 물리적 수단은 언제나 정당화 되었고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그것은 도덕적으로 정의의 전쟁으로 간주되어 왔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투적 마르크스-레닌주의 유물론적 세계관이다. 그들이 세계역사를 풀이했던 “사적유물론”이 “전투적 유물론”으로 탈바꿈했다는 비판적 지적은 이래서 그랬다. 그들에게 전쟁과 파괴는 마르크스-레닌이스트들에게는 세계를 변혁시키는 미학으로 치부되었던 비밀스런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폭동은 예술, 혁명은 피압박자와 피착취자의 축제라고 했던 저들의 심사를 이제 읽을 수 있다.

 돌이켜 보면 마르크스는 전쟁의 원인을 유물론적 계급사관에 바탕한 경제위기에서 구하고자 했다. 레닌 역시 계급투쟁으로 계급관계를 청산하지 않는 한 평화는 불가능하다고 보면서, 평화를 달성하기 위한 투쟁이 인민전쟁이고 인민전쟁의 참모부가 곧 공산당이라고 규정했었다. 자본주의 소멸 때까지 인류의 근본적 평화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그들이다. 이것이 마르크스-레닌이스트들의 “영구평화론”이다. 저들의 평화와 우리들의 평화가 다른 이유다. 한반도에서 남북 좌파세력이 평화의 기치를 올리고 대선에 개입한다면, 우리는 저들의 평화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한반도 평화를 읊조리는 북한은 어떤가?

 부르조아 착취계급과 자본주의 타도의 기치를 올린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어머니로 하는 스탈린주의의 사생아가 바로 북한이다. 저들의 전쟁과 평화의 개념은 유물론적 사유체계 속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혁명적 관성을 그대로 전수받았다. 이미 북한은 김일성없는 “김일성의 나라(Land of Kim)"에서 김일성은 신격화 되었고, 김일성주의는 그들의 경전이 되었었으며, 노동당은 그들의 사제단이 되었다.

 그러나 보라!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주체사상의 품안에서 북한인민은 그 사회의 주인이 되지도 못했고 모든 것을 결정할 권리도 갖지 못했다. 오직 복종과 체념의 순응만이 존재한다. 이를 평화라 말할 수는 없으며 자유와 평등이라 볼 수 없다. 그 후과가 주체의 지상낙원을 스스로 걸어서 탈출할 수 밖에 없도록 자초하지 않았던가? 그 후과가 참혹한 굶주림의 아사로 나타났고, 정치범 수용소를 만원으로 만들었으며, “주체의 지상낙원”을 스스로 걸어서 탈출 할 수밖에 없도록 자초했다.

 북한은 이제 자기기만을 그만두어야 한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가 베푸는 평화를 희망하는 것이지, 자본주의를 소멸시켜 타도한다는 무산계급의 혁명, 즉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평화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반역의 평화물결과 태극기 물결

 대선을 앞둔 당면의 우리사회가 진보와 보수의 싸움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좀 더 솔직히 말한다면 진보와 보수의 싸움이라기보다, “혁명의 정치학”을 가슴속에 은밀히 묻어 왔을 남북좌파와의 한판 싸움이다. 북으로부터 남조선혁명의 과녁이 포기되지 않고 있는 현실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열린사회에서 사상의 편린과 방황은 이해될 수 있지만 사회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버려 역사의 박물관으로 보낸다는 편집된 사상과 증오의 계급의식이 가슴속에 녹아 남아 있는 한, 그것은 재앙일 뿐이다. 진정 역사의 박물관으로 가야할 자들이 있다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의 희미한 잔영을 부여잡고 진보의 이름으로 사회변혁을 꿈꾸는 자들이다. 그들이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수구좌파다.

 늘 그랫듯이 좌익의 신화는 항상 진보의 신화를 전제조건으로 삼았던 역사의 진실을 이번만은 놓치지 말자. 남과 북의 평화, 21세기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 그래서 민족적 재앙을 막으려 한다면 위선과 거짓과 허위로 가득찬 저들의 "평화대공세"에 분연히 맞서야 한다. 이 일을 누가 할 것인가?

 평화의 탈을 뒤집어쓰고 평화의 이름으로 평화를 깨트리려는 민족적 죄악은 저지 되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서방세계를 향해 “민주주의가 멸망할 때까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화투쟁을 전개하라”는 스탈린의 선동이 섬짓하게 느껴진다. 이제 우리는 반역의 평화물결을 태극기 물결로 덮어 버려야 한다! (konas)

  백 병 훈(국가연구원장)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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