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원조식량 대부분 군대식량으로 전환...일본 문예춘추 11월호
탈북 일본인 처의 수기
日 文藝春秋 2003년 11월호
취재 : 다카세 히도시 (高世仁)
나는 이른바 ‘일본인처’로서 1960년대 초에 북한에 건너갔다. 일본을 떠난 지 40여 년 만에 금년 겨울 딸과 함께 탈북하여 3월 28일 조국 일본의 땅을 밟았다.
도쿄는 마침 벚꽃 계절이어서 엷은 복숭아 빛의 꽃잎을 보았을 때 여기가 바로 우리 나라로구나, 하고 가슴이 벅찼다. 뭐니뭐니 해도 최고로 기뻤던 것은 어머니와의 재회였다. 90세 가까이 살아계셨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60대여서 이제 일본에는 돌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했었던 만큼 그 기쁨이란 더 말할 나위 없는 것이었다.
탈북에 도전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겨울의 추운 밤,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서 중국쪽으로 도망쳤다. 국경 지대에 가까이 가려고 해도 북한에선 허가 없이 여행할 수 없으므로 이동증명서를 손에 넣는 데 돈이 들어간다. 강을 건너기 위해선 중국과 왕래하는 장사꾼에게 안내를 부탁하고 그 사례금도 필요하다. 국경의 경비대에게도 뇌물을 주었다. TV를 팔아서 어찌어찌 돈을 마련했다.
겨우 다다른 곳이 중국의 연길시였는데 여기서 일본에 있는 친척에게 전화를 해서 마중나와 달라고 부탁을 했었지만 거절당했다. 어쩔 수 없었다. 북한에 돌아가면 끝장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를 숨겨준 조선족 한 사람 주선으로 운 좋게도 일본의 ‘북조선귀순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에 연락이 닿았다. 이 단체의 대표인 야마타 후미야키(山田文明) 선생의 열성 있는 노력으로 일본정부도 움직이게 되고 연길시까지 瀋陽 일본총영사관 직원 네 사람이나 마중나왔다. 그들에게 충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지금은 일본에서 생활보호를 받고 있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북한에 남겨둔 아이들과 손자들이다. 굶고 있지 않을까,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지 않을까, 밤에 잠자리에 들어서도 이런 생각이 나면 밤을 새게 된다. 입밖에 내지는 않지만 딸도 마찬가지다. 깊은 밤 옆자리 이불 속에서 숨죽여 우는 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 때문에 아직 상세한 것을 밝힐 수는 없다.
집이 가난했으므로 소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곧 여관에 취직했고 스무살이 되기 전에 재일 조선인 야마다 가츠히도(가명)와 결혼했다. 야마다는 그 당시 마흔이 넘었지만 인품도 좋았고 결혼하면 어머니의 고생을 조금은 덜어들일 수 있으리란 생각도 했었다.
남편은 ‘조총련’ 지부의 간부였다. -중략- 귀국자는 모두 신품의 세비로(역자주: 저고리, 조끼, 바지로 된 신사복을 말함)에다 넥타이 차림이었다. 낡은 옷(입던 옷)을 입고 가면 실례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자전거 석 대와 신품의 옷을 입은 채 갔었다. 일상생활용품 같은 건 모두 마련해준다는 북한의 설명을 믿고 정말로 몸 하나만 달랑 갔던 가족도 있었다.
그러나 청진항에 닿자마자 모든 걸 깨달았다. ‘조총련에 속았다’는 것을 환영 나온 북한사람들을 보고 알았다. ‘지상의 낙원’이란 것이 새빨간 거짓이었다는 걸 알았다. -중략- 남편은 “말이 다르지 않아. 이럴 줄 알았다면 북한 같은 곳에 왜 왔겠는가. 이 ‘조총련’ 놈들!”하고 화만 냈다. -후략-
영화보고 질문해도 사상범 몰려
귀국자는 당초에는 손님 취급을 받았다. 광산 같은 데서도 칸데라를 들고 갱도에 들어가는 힘든 일은 북한사람들이 하고 귀국자들은 건설공사나 자동차 운전 등 좀 편한 일을 배당받았다.
그러나 60년대 후반이 되어 오니까 귀국자나 일본인처에 대한 차별이 점차 강화되었다. 집회소에 소집되어 ‘일본이 얼마나 악독한가’라는 영화를 관람한다. 끝나고 질문을 하면 국가안전보위부(비밀경찰)에 연행되어 ‘수용소’ 행이다. -중략- ‘십일호’(11號)라는 단어에도 우리들은 떨었다. ‘제11호관리소’를 말하는 것인데 관리소란 즉 강제수용소다. ‘십일호’에는 정치범을 보낸다.
중노동을 강제당하고 먹을 것이라고는 옥수수 조금과 소금뿐이어서 영양실조로 죽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사실 ‘십일호’에서 돌아온 사람은 없었다.
일본으로부터의 귀국자 차별, 일본인 차별이 강화됨에 따라 나는 아이들에게조차도 자신이 일본인이란 것을 비밀에 부쳤다. ‘귀국자’라는 이유만으로 ‘귀포, 잿포!’라고 놀림 당하기 때문이다 -중략- 하지만 드디어 아이들에게 들통나고 마는 날이 왔다. 아들이 군 입대를 거부당하는 일이 생겼다. ‘친모가 일본인이니까’라는 이유였다.
북한에는 ‘성분’이란 ‘신분제도’가 있어서 인민은 모두 혁명에 공헌한 정도나 계급에 의해 분류되었고 귀국자의 출신 성분은 퍽 낮으며 일본인은 더 낮다. 군대에 갈 수 없을 정도의 성분이라면 장래에 아무런 희망도 없는 것이다. -중략-
‘성분’이 나쁜 귀국자와 가까이하려 든다든가 결혼을 하려고 하는 북한사람은 없고 보니 결혼하는 것도 귀국자 자녀들끼리이다. 하기야 우리 귀국자들도 북한사람들을 경멸하면서 살았으니 양자간에는 높은 벽이 있다고 하겠다.
90년대 들어 아편 대량재배
남편은 ‘조총련’에 분노를 안은 채 죽었다. -중략- 죽기 직전, ‘당신을 무리하게 데리고 온 것이 잘못이었다. 미안하다. 고생만 시켜왔는데 이제 내가 먼저 떠나게 돼서 걱정이다’라면서 숨을 거뒀다. 처음 듣는 남편의 혼네(진심의 소리)였다.
-중략- 북한에선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나라니까 병원은 무료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치료는 바랄 수 없다. 대체로 병원에 약이 없으니까 암시장에서 살 수밖에 없다.
약을 살 수가 없으니까 상비약은 아편이다. 자생하는 양귀비 꽃이 피고 나면 뿌리째 잘라서 검은 엿처럼 국물을 짜내 달여서 작은 용기에 보존한다. 배탈이 났을 때 이 아편을 성냥개비 머리 부분만큼 먹는다. 치통 때도 아편을 채워넣는다. 이걸로 대개의 통증은 견딜 만하다.
90년대가 되니까 당국이 먼저 나서서 양귀비를 대량으로 재배하게 되었다. 수확시에는 중학교 학생들도 동원되어 양귀비 밭에서 한 손으로 작은 병을 들고 아편의 원액을 채취하는 작업을 한다. 집으로 갖고 가지 못하도록 엄중한 감시를 받는다. 양귀비 수확기에는 우리집 손자 녀석까지 동원됐었다. 아편은 당의 5호 관리소가 담당하고 있어 거기서 당 중앙(김정일을 가르킴)의 자금을 만드는 39호실로 보내진다고 한다. -중략-
국가로부터의 배급은 94년경부터 끊어졌다. -중략-
감시원 볼 때 나눠준 식량 나중에 회수
외국으로부터 식량원조가 와 있다는 것은 뉴스로 알려졌다. 쌀자루에 인쇄되어 있는 글자로 미뤄봐서 한국에서 왔다는 걸 알았다. 남는 것을 보내줄테지, 여유가 있는 나라로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들어오는 식량의 대부분이 군대로 가버리니까 우리들에겐 별로 관계가 없는 일이다. 유엔의 관계자들이 식량을 제대로 인민에게 나눠주고 있는가를 감시하러 올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유치원 아이들까지도 동원이 돼 “제대로 받고 있습니다”라고 거짓말 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언젠가 독일에서 냉동 쇠고기를 보내왔다. 1인당 8kg씩 배급될 예정이었는데 우리도 두 번이나 동원되어 세면기를 갖고 줄을 섰다. 백인 감시원이 보고 있는 앞에서 세면기에 가득히 쇠고기를 받아들고 사진이 찍혔다. 그 후에 미리 지시된 장소에 모두가 숨어서 기다렸다가 감시원이 돌아간 뒤 다시 줄서기를 해서 쇠고기를 반환하는 것이다. 반환한 고기에서 아주 적은 분량을 되돌려 받았다.
결국 1인당 8kg 예정이었던 것이 1세대당 500g만 배당됐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고기를 먹어본다는 것이 몇 해만이어서 그날은 축제날 같았다. -중략- 김정일은 ‘북조선이 지게 된다면 차라리 지구를 부숴버린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매주 토요일 정치학습회에서도 들은 적이 있다. -중략-
고이즈미 총리가 북한에 왔던 것은 알고 있었다. 어찌어찌 잘 된다면 양국 관계가 급속히 호전되어 일본인 처들이 이번이야말로 귀국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우리들 일본인처와 총리의 방북과는 아무 관계도 없었다.
일북국교정상화 교섭이 시작된 것은 91년부터라고 듣고 있는데 그러고보니 그 무렵부터 갑자기 일본인 처에 대한 대우가 좋아졌다. 우리 일본인처에게 매달 80원씩 지급되기 시작했다. 당시 공장에서 일하는 보통의 노동자월급이 50원이었으니까 제법 큰 금액이라 할 수 있겠으나 쌀 21kg 사면 그만이었다. 작년 여름부터 신(新)경제 정책으로 물가가 상승함에 따라 다시금 1,500원 지급으로 증액되었다.
매달 20일에는 지역의 교포총국에 가서 돈을 받는다. 연 1회 지역의 일본인처 집회가 열린다. 예전에는 일본인처끼리 모이면 감시 대상이었지만 내놓고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서로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이 70, 80대로서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일본을 가보고 싶다”라는 말만 주고받고 하였다.
일본 외무성은 북한에 건너간 일본인 처를 1,800명으로 발표했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보다 더 많지 않을까 생각된다. 우리들은 2,500명으로 듣고 있었다. ‘북조선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會’ 사람들의 말로는 이 인원수의 차이는 일본국적의 유무에 의한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지적이 있었다.
나와 딸은 둘이서 아파트 살림을 시작했다. 북한에서 태어나 일본말을 한마디도 몰랐던 딸이 하루 몇 시간씩이나 일본어 공부를 맹렬히 하고 있다. 지금의 일본에 하루빨리 익숙해져서 일거리를 찾아서 일하고 싶다. 될 수 있으면 지금까지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한 어머니에게 효도의 흉내라도 해보고 싶다.
번역/李英勳 교포교육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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