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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당선자에게 바란다

Written by. 박효종   입력 : 2007-12-23 오후 3:5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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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대 대통령 당선자가 드디어 탄생했다. 이명박 대통령당선자에게 축하를 드린다. 국민들이 이 당선자를 앞으로 5년간 신임하기로 결정한 것은 당선자 개인에게는 말할 수 없는 영광인 동시며, 또 10년간 와신상담하며‘실패학’을 썼던 한나라당에게도 파격적인 보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국민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다는 것은 한 개인이나 한 정당의 명예차원을 넘어서서 엄숙하기 짝이 없는 중대사다. 그렇기 때문에 당선자나 한나라당 모두 자축하는 분위기에 함몰되기보다는 옷깃을 여미는 엄숙함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번 대선 결과는 노무현 정부의 실정에 대한 심판

조그만 세상사에도 항상 중요한 뜻이 담겨져 있다면, 이번 대선승리의 화두(話頭)를 무엇이라고 보아야하는가. 누가 뭐래도 이번 한나라당이 대선을 승리한 의미는 ‘심판’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외국의 어떤 신문은 “윤리적 기준이냐 경제 관리능력이냐”로 다투고 있다고 보도하는가하면, 국내의 경쟁후보들 가운데는 “경제냐, 부패냐”를 내세우며 선택을 요구했고 혹은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여러 가지 의미를 두었지만, 이번의 국민선택에서는 ‘응징’과 ‘심판’의 의미가 가장 뚜렷하다고 생각한다. 국민들이 집권세력인 노무현정부의 과거실적을 보며 그 집권세력에 회초리를 드는, 이른바 ‘회고적 투표(retrospective voting)’를 한 것이다.

사실 그 조짐은 일찍부터 있었다. 지난 1년간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 1위 독주는 한 번도 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전만 하더라도 1위 순위가 더러 바뀌기도 했고, 또 선거일이 다가오면 1, 2위 지지율 격차가 좁혀 지는 게 보통인데, 이번에는 막판에 터진 BBK동영상까지도 오히려 지지표 결집의 효과까지 발휘하는 이변을 낳았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이‘국민적 심판’의 의미는 이미 작년 5월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의 전패와 한나라당의 전승기록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유권자들의 열화와 같은 요구가 '쓰나미'처럼 몰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와 집권당은 중간선거에서는 패하는 법이라며, 요지부동이었고 오히려“갈아봤자 별수 없다”라는, 과거 자유당식의 해묵은 대답으로 오늘까지 버텨온 것이다.

이번 이명박 후보의 승리는 무지와 무능, 한(恨)과 아마추어리즘으로 특징지어진 노무현 정부의 실정(失政)에 대한 최후의 심판이며, 그 심판의 대못박기에 다름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국민이 대통령”이라며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다고 약속하고, 유권자 가운데 50%만이 자신을 지지했기 때문에 자신은 “반통령”에 불과하다며 겸손해했던 대통령, 그런 대통령과 정권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언론과 국민들에게 화를 내고 서러워했다. 그래서 국민의 절반이 그를 떠났고 또 남은 절반 중에서 또 절반이 그에게 등을 돌린 것이다. 하지만 노 정부는 일관되게 ‘마이웨이’를 고집했다. 그 결과 대통령이 국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대통령을 걱정한 희한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일반적으로 대의민주주의하에서 국민들은 선거일에 투표를 하고 투표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이 국리민복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것을 믿고 비교적 편안한 마음으로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어인일인지 국민들은 ‘선택’한 후에도 계속해서 대통령의 말 한마디, 제스추어, 일거수ㆍ일투족에 손에 땀을 쥐고 가슴을 졸이는 등, ‘책임’까지 느끼는 상황이 되었다. 그를 찍은 손가락을 원망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대통령 당선자는 민심을 살펴야

이제 이명박 대통령당선자에게 당부하고자 한다. 우선 국정은 선거운동도 아니고 또 선거운동의 연속도 아니라는 것이다. 선거운동은 감성적인 ‘원맨쇼’와 아주 흡사하다. 그래서 후보는 시장에 가서 사람들과 춤을 추는 등, 각종 화려한 이벤트도 연출한다. 하지만, 국정은 이성적인 ‘팀플레이’다. 그렇다면 ‘좋은 팀’, 즉 ‘드림 팀’을 선택해야 한다.

또 “선거란 축제”라는 말도 있듯이 선거운동기간에는 후보자나 참모들도 여러 가지 ‘탈’을 쓴다. 마치 축제에 ‘탈’을 쓰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탈 가운데도 자신의 원래의 모습과도 맞지 않는 여러 가지 생뚱맞은 ‘탈’을 쓰다 보니 말이 많아진다. 양이라면 ‘양의 탈’을 써야하는데 그렇지 않고 ‘이리의 탈’을 썼다느니 혹은 여우가 ‘여우의 탈’을 쓰지 않고 ‘호랑이의 탈’을 썼느니 하며 허위와 위선을 지적받기도 한다. 또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혜안과 예지를 가지고 있는 ‘마술사’처럼 큰소리를 치기도 했고 또 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국정에서는 위선적인 ‘탈’이 통하지 않는다. 또 만능의 영웅도 없고 불완전한 인간들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사람이 마련한 식단보다 여러 사람이 마련한 식단이 풍성한 것처럼, 그 불완전한 사람들 가운데 비교적 ‘덜 불완전한 사람들’의 중지를 모아 최선의 대안을 도출하고 실적을 내야한다. 실적을 내기보다 홍보만 요란하게 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른바 ‘울리는 괭가리’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또 선거운동이란 상대방과 한바탕 싸우는 게임이다. 이번에도 여러 가지 도덕적 이슈를 가지고 진검승부를 하지 않았던가. 선거운동기간에서의 싸움이 물론 ‘천사의 게임’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신사의 게임’이 된 것도 아니다. 오로지 “한방에 상대방을 보내겠다”는 전략밖에 없는 ‘흙탕물 싸움’ 바로 그것이 아니었던가. 그래도 국민들은 이 후보의 손을 들어줬다. 도덕적 흠결은 있겠지만, 일잘 할 능력이 있다는 점을 높이 산 것이다. 이 사실을 기억하여 국정의 화두는 다툼이나 싸움이 아니라 ‘국민 껴안기’와 ‘국민 아우르기’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난 노무현 정부의 큰 잘못 가운데 하나는 국정운영을 선거운동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국정을 싸움으로 생각하고 모든 것에서 이기려고 했다. 처음에는 언론을 이기려고 했고 강남을 이기려고 했고 또 보수를 이기려고 했고 시장을 이기려고 했고 나중에는 국민까지 이기려고 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각가지 적들이나 비판자들과 첨예하게 마주치는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는 큰 ‘전쟁’에서는 지고 만 것이다.

선거운동의 목표는 승리에 있지만, 국정의 목표는 ‘섬기는 리더십’으로 국리민복을 극대화하는데 있다. 이른바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 있다면, 국민에 대하여 지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노무현 정부는 국민을 행복하게 하겠다며 행정복합도시인 ‘행복도시’까지 만들고자 했지만, 진정한 국정의 목표는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겠다기보다는 불행하게 만들지 않겠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런가하면 국정은 민심을 예리하게 살피는데서 출발한다. 인터넷까지 발달된 정보화 사회에서 국민들의 마음과 여론을 살피는 것은 결코 어렵다고 할 수는 없다. 방송 한번 보고 신문 한번 열심히 읽어보면 될 것이다. 사실 그런 신문과 방송이 없던 시절에도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보려는 현명한 왕들의 노력이 있었다.『천일야화』로 유명하게 된 바그다드의 왕 하룬 알 라시드는 영특한 왕이었다.

물론 자신의 아내의 불륜에 분노해 새로운 왕비를 맞아들이고 하루만에 처형하는 반인륜적 방법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의 국정수행능력만은 탁월했다. 그는 절대권력에 몰려든 아첨꾼들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기발한 방법이 아니고서는 진정한 백성의 목소리를 들을 방도가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는 결국 백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알기위해 ‘거지’로 변장했던 것이다.

물론 오늘날 대통령이 민심을 알기 위해 거지로 변장할 이유는 없다. 다만 편리한 인터넷이 있고 참모들이 있어도 국민들의 소리를 듣기 어려운 경우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대통령 본인이나 참모들이 스스로 귀를 막고 비판의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대통령인 나를 나무 위에서 흔드려는” 음모라고 생각하는 한, 국민들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또“나를 대통령 대접을 해주지 않는구나”하는 자격지심에 사로잡힐 때, 국민들의 부르짖음은 들리지 않는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보면, 자신의 행적은 생각하지 않고 비판만 하는 국민들만 야속해 “대통령은 21세기에 사는데 국민은 20세기에 살고 있다”는 불평을 늘어놓든지, 아니면“국민들이 노망든 것 아니냐”는 망발까지 서슴지 않고 내뱉게 마련이다. 현장도 가보지 않고 컴퓨터만 보면서 민심을 알 수 있다고 하는 왜곡된 디지털 적 사고에 함몰되고 있고 국민들이 비판을 많이 하는 것은 국정홍보가 덜 되었기 때문이라는 발상에 젖어있는 이상, 민심을 읽을 수 없다.‘그들의 정치’와‘그들의 국정홍보’만 존재하는 한, 고단함에 지친 국민들의 마음을 헤아릴 길 없다.

종합부동산세를 내기 어려우면 그 집을 팔고 이사를 가면 된다든지, 혹은 임대아파트로 들어가라고 하는 것은 국민을 무시하는 정권만이 보일 수 있는 오만의 극치다. 또 종부세는 ‘부자세’이기 때문에 분납도 안되고 신용카드도 쓸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국민들의 고단한 삶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독선적이 되고 초현실적 정권이 되었다는 증거다.

도대체 자신의 국민들이 사는 지역, 소중한 삶의 터전을 보고‘버블세븐’이라고 작명을 하고 낙인을 찍는 정부가 어디 있는가. 만일 그런 정부가 있다면,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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