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년 새해, 서애 유성룡을 생각한다
송복교수의 <서애 유성룡, 위대한 만남>을 읽고
<역사의 물굽이를 바꾼 사람들>
역사를 읽다보면 역사의 거대한 물결 앞에서 한 인간의 힘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한 위인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보려 아무리 몸부림쳐도 결국 그의 노력은 도로(徒勞)에 그치게 되는 경우를 곧잘 보게 된다. 최영이나 정몽주는 고려의 멸망을 막지 못했고, 구한말 수많은 지사-열사들도 망국을 막지 못했다. 로버트 리 같은 걸출한 명장도 남북전쟁에서 남군의 패배를 막지 못했고, 스톨리핀이라는 개혁정치가도 제정러시아의 붕괴를 막지는 못했다.
반면에 역사의 한 순간에 특정한 인물이 바로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역사의 물굽이가 바뀌는 경우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이승만 박사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건국은 없었을 것이고, 박정희 대통령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번영은 없었을 것이다. 제2차대전 후 루드비히 에르하르트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서독에 자유시장경제는 뿌리내리지 못했을 것이고, 서독의 경제적 번영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한 사람의 힘으로 역사의 물굽이를 바꾸어 놓은 경우를 들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다. 무과에 급제한 지 10년이 넘도록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던 그는 임진왜란 1년 전 무려 7계급을 뛰어 넘어 전라좌수사로 발탁됐다. 불과 1년 남짓한 사이에 그는 전라좌수영 수군을 당대 최고 수준의 해군으로 육성했고, 이는 이후 23전23승 신화의 바탕이 됐다.
<서애 류성룡, 위대한 만남>
이순신을 파격적으로 발탁한 인물은 서애 류성룡이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기간 중 영의정 겸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국정과 군무를 총괄했던 전시재상(戰時宰相)이었다. 최근 서애 류성룡의 리더십을 다룬 좋은 책이 한 권 나왔다. <서애 류성룡, 위대한 만남>이 바로 그 책이다.
저자는 대표적 보수주의 지식인 가운데 한 분인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 송교수는 진보연해야 지식인으로 대접받는 지식인 사회의 왜곡된 풍토 속에서 늘 “보수(保守)야말로 역사의 주류(主流)”라고 강조해온 분이다. 그 때문에 그의 정년퇴임시에는 운동권 학생들이 “열심히 닭짓한 당신, 떠나라”라는 피켓을 들고 야유하기도 했었다.
송복 교수는 이 책의 서문에서 ▲오늘날 한반도의 분할은 언제부터 시도되었는가, ▲ 그리고 그 분할 획책을 누가 어떻게 막았는가를 살펴보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주지하다시피 임진왜란 당시 명(明)과 왜(倭)는 강화(講和)회담에서 조선 남부 4개 도(道)를 일본에 할양한다는 논의를 진행했었다. 명군(明軍), 아니 명나라에게 나라의 명운을 맡기고 있던 조선으로서는 이를 막을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골수까지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물들어 있던 선조와 신하들은 의주까지 달아났다가 명(明)으로 내부(內附)할 궁리만 하고 있었다. 내부는 단순한 피난이나 망명이 아니라 ‘명나라에 들어가 명나라 신민(臣民)으로 살겠다’는 의미였다.
오로지 류성룡만이 “임금께서 우리 땅에서 한발자국이라도 떠나신다면, 그때부터 조선은 우리 소유가 아닙니다”라며 압록강을 건너려는 선조를 붙잡았다. 류성룡만이 조선땅을 일본에게 갈라주고서라도 강화를 성사시켜 자국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명(明)의 속셈을 간파하고, 이를 막아내기 위해 몸부림쳤다. 류성룡은 될 수 있으면 싸움을 회피하려는 명군을 일본군과 싸우게 하기 위해 명나라 장수들과 만나 그들을 설득했고, 그 과정에서 온갖 수모를 감수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류성룡은 전국토가 초토화된 상태에서 명군과 조선군을 먹일 군량을 만들어내기 위해, 또 없는 것이나 다름 없는 조선군을 제대로 싸울 줄 아는 군대로 재건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송복 교수의 <서애 류성룡>은 바로 명-왜의 조선분할음모를 막고, 전시재상으로 국정과군무를 이끌면서 국가를 위해 헌신했던 서애 류성룡의 리더십을 그리고 있다.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
<서애 류성룡>은 ‘당시 조선이 어떤 나라였나’하는 성찰에서부터 출발한다. 당시 조선은 한 마디로 나라 같지도 않은 나라였다.
임진왜란 10년 전 율곡 이이는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200년 역사의 나라가 지금 2년 먹을 양식이 없습니다. 그러니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 어찌 한심하지 않습니까.” “지금 국가의 저축은 1년을 지탱하지 못합니다. 이야말로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
“오늘의 나라 형세는 마치 오랫동안 고치지 않고 방치해 둔 큰 집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크게는 대들보에서 작게는 서까래에 이르기까지 썩지 않는 것이 없어, 근근히 날만 넘기며 지탱하고 있는 형국입니다....오직 날로 더 썩어 붕괴할 날만 기다리는 그 집과 오늘의 나라꼴이 무엇이 다르다 하겠습니까.”
이런 나라에 제대로 된 군대가 있을 리 없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소대장, 중대장은 있어도, 소대원, 중대원은 없었다. 병적(兵籍)에 병사들의 이름은 올라있었지만, 그들은 훈련 한 번 받아본 적이 없는 농투성이었다. 일본군의 침략 소식에 순변사 이일을 내려보냈지만, 그에게 딸려 보낼 병력이 없어 혼자 내려 보내야 했다.
어렵게 병사들을 모아 놓아도 그들을 무장시킬 무기가 없었다. 명나라 장수들은 “너희 나라 병졸들에게는 병기가 없다”며 한심해 했다. 병졸들을 먹일 군량도 없었다. 당시 조선의 생산력으로 율곡이 제창했다고 전해지는 ‘10만 양병’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직함만 다른 최고사령관들은 많았지만, 정작 싸울 줄 아는 장수는 거의 없었다. 여러 계통에서 군령(軍令)이 내려와 일을 꼬이게 만드는 것이 다반사였다.
무엇보다도 한심한 것은 임금과 신하들에게 “이 나라는 내 나라”라는 주체의식이 전무했다는 사실이었다. 임금이고 신하고 할 것 없이, 중국의 시문(詩文)을 외고, 중국의 경전을 공부하고, 중국의 역사를 읽으며 성장한 인물들이었기에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다보니 그들에게는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이 나라를 반드시 지켜내야겠다”는 의식이 없었다.
바다를 지켜내고, 호남을 지켜낸 이순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그들은 몰랐다. 스스로 나라를 지키겠다고 일어난 곽재우-김덕령-조헌 같은 이들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몰랐다. 그들 휘하에서 흘려 싸우는 말단의 병사들이나 의병들의 소중함을 몰랐다.
울산전투 등 싸움마다 연전연패했던 명나라 지휘관 양호가 패전과 허위보고 때문에 본국의 탄핵을 받아 귀국하게 되자 선조와 온 조정이 나서서 변호했지만, 23전23승의 신화를 남긴 이순신이 무함을 받았을 때에는 판중추부사 정탁 한 사람만이 이순신을 변호했을 뿐 임금과 온 조정이 그를 죽이려 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당위론자‘들의 나라>
왜 조선이라는 나라는 그 지경이 됐을까? 바로 당시 조선의 위정자, 사대부들 때문이었다. 송복 교수는 그들을 한 마디로 ‘당위론자(當爲論者)’였다고 규정한다. 송복 교수의 말이다.
<용(用)을 아는 사람, 요사이 식으로 말해서 방법론을 알고, 그 방법에 정통한 사람이 너무나 드물었다. 누구나 원칙을 말할 수 있고, 누구든 그 원칙에 따른 총론(總論)을 내놓을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안(案), 어떤 계책이든 누구나 자유로이 제시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방법론이다. ‘어떻게’,‘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누가’,‘그 누구와 더불어’가 기본이고, 그에 앞서 ‘실상’을 먼저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도시 실상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가 파악되어야 실현성이 강구될 수 있다. 실상도 모르고 각론도 없으면서 말만 쏟아내면, 그 말은 허언(虛言)이고 허구(虛構)일 뿐이다.
당위론자들이 다 그러했다. 조신(朝臣)이든 학자이든 당시는 거개가 당위론자들이었다. 존재론자는 없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드물었다. ‘어떻게 되어야만 한다’는 윤리적 주장(당위)만 있지, ‘어떻게 되어 있다’는 객관적 상황(존재)분석이 없다.
현실을 개조하는 모든 방법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의 존재론적 사고에서 나온다. 그 존재론적 사고에서 실재(實在)에 대한 논리적 분석과 통찰이 가능해진다. 모든 실상은 존재론적 사고에서만 파악되고, 존재론적 사고를 통해서만 보이는 것이다.
반대로 당위론자는 윤리적 가치관에 경도되어 실상을 보지 못한다.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체(體)는 있는데, 용(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송복 교수에 의하면 율곡 이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송교수는 “율곡 또한 그 시대의 다른 조신(朝臣)들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원론적이고 당위적인 것 외에 아무 것도 따로이 내놓지 못한다. 구체적인 정책이 없고, 그 정책을 실현하는 방법이 없다. 유교사회에서 수학(修學)한 선비면 누구나 다 하는 소리, 사서(四書)를 읽은 사람이면 빠뜨리지 않고 하는 말, 그것뿐이다”라고 말한다.
율곡이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을 보면 당시 조선이라는 나라가 안고 있던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개혁을 주장하고는 있지만, 임금에게 유교적 소양을 가다듬고 치자(治者)로서의 몸가짐을 바로 할 것을 강조하고 있을 뿐, 당대의 모순을 치유할 구체적 방략은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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