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時납북자 9만6013명을 송환해야”
Written by. 박인호
입력 : 2008-01-23 오전 9:55:38
“전시 납북자 가족들의 고통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잊지 말아달라.”
1950년.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지 68일째 되던 날, 서울 청량리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미일(李美一) 이사장의 집에 낯선 사람이 들이닥쳤다.
‘유소위’라고 자신을 소개한 정치보위부 요원은 “잠시 조사할 것이 있다”며 고무신에 반바지 차림이던 아버지 이성환씨를 데리고 갔다. 당시 청량리에서 유기공장을 운영하던 이씨가 서북청년단(극우반공단체)에 기부금을 냈다는 것이 연행 이유였다.
58년 간의 긴 헤어짐의 시작이었다. 이 이사장은 두 살 때 끌려간 아버지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꿈속에 찾아오던 아버지의 모습을 잊을 수 없어 전시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섰다.
아버지가 끌려갔던 바로 그 자리에 가족협의회 사무실을 만들고,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도 개설했다. 자료원은 국내외를 통틀어 한국전쟁 납북자 실태에 대해 가장 방대한 자료를 보유하고 있다.
이 이사장과 가족회 회원들은 지난 10년 동안 납북 가족의 생사만이라도 확인해 달라고 통일부 문턱이 닳도록 쫓아 다녔다. 하지만 반응은 냉랭했다. 이 이사장은 데일리NK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10년 정부 어떤 단체에서도 전시 납북자에 대해서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이 이사장에게서 전시 납북자의 실태와 피해 가족들이 요구하는 해결 방안에 대해 들어봤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지난 10년 동안 전쟁 납북자들에 대한 생사 확인을 요구하는 가족들의 요구에 ‘모르쇠’로 일관했다. 납북(拉北)인지 월북(越北)인지 구별할 기준도 없으며, 그 규모를 증명할 명부(名簿)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에 대해 이 이사장은 “우리는 수십 년 동안 연좌제에 묶여 고통을 받아왔다. 전시 납북자들에 대한 증거가 없다면 정부에서는 무슨 근거로 우리 가족들에게 연좌제를 적용했다는 말인가”라며 항변했다.
그러면서 그는 “1950년 12월 당시 최초로 정부 공보처 통계국에서 작성한 ‘서울특별시피해자명부’에는 총 4616명의 인적사항이 피살, 납치, 행방불명으로 분명히 구분되어 기록되어 있다”며 “그 당시 정부는 피살, 납치, 실종 피해자를 엄격히 구별했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이 이사장은 새로 출범하게 된 이명박 정부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크다. 그는 전시 납북자의 생사확인만이라도 정부에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쟁 납북자의 진실을 밝히는 문제가 남북관계에 장애가 된다는 관점부터 뜯어 고쳐야 합니다. 새 정부에서는 전시 납북자에 대한 개념부터 바로 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이사장은 전시 납북자들의 탈북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반세기 이별의 아픔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는 “남에서는 헤어진 가족과 재회의 눈물을 흘리는 동안 북에 남은 또다른 가족은 수용소에 끌려가야 하는 북한의 현실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고 말했다. [박인호 nk기자]
다음은 이미일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인터뷰 전문.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납북자’라는 말은 생소하게 들린다.
“납북자(拉北者)란 개인 의사와는 상관없이 북한 당국에 의해 강제적으로 납치, 억류된 사람들이다. 크게 국군포로, 전시(戰時) 납북자, 종전(終戰) 후 납북자로 구별해 볼 수 있다. 전시 납북자는 6·25 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의 실질적 점령이 이루어진 지역에서 북한 당국에 의해 조직적으로 납치된 사람들이 다수다.”
-전시 납북자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지금까지 발굴된 전시 납북자에 대한 기록은 모두 5종이다. 1950년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서울특별시피해자명부’에 2천438명의 명단이 있고, 1951년 납치인사가족회가 신익희 국회의장에게 송부했던 ‘6·25사변피랍치인사명부’에는 2316명의 이름이 있다.
1952년 정부가 작성한 명부에는 8만2959명이 기록되어 있다. 1954년 내무부 치안국이 작성한 명부에는 1만7940명, 1956년 대한적십자사가 납북자 가족들의 신고를 통해 작성한 ‘실향사민 등록자 명단’에는 7034명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다섯 종류의 명부를 취합하여 중복된 이름을 제외하면 전체 명부(名簿)에 기록된 사람만 총 9만6013명이다. 이 숫자는 최소치일 뿐이다. 당시 전쟁 통에 주거지에서 이탈했거나 피난을 떠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명부의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북한에 납치되었을 것이다.”
-납북자 명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은?
“각 명부에 확인된 사람들만 놓고 보면 전시 납북자들에게는 일정한 공통점이 발견된다. 먼저 납북자의 88%가 1950년 7월에서 9월 사이에 납치됐다. 북한 인민군이 38선을 밀고 내려왔다가 후퇴하기 직전 시기에 집중적으로 끌려갔다는 것이다.
또한 납북자의 80%가 자기 집이나 거주지 근방에서 끌려갔다. 미리 납치자 명단을 작성해서 인적 사항과 거주지를 추적한 후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끌고 갔다는 것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명부에 기록된 납북자 중 98%가 남성이다. 연령비율은 ‘10대 후반에서 20대 후반’이 75%를 차지한다. 전시 납북자들은 서울 및 수도권 거주자들이 42%를 차지하고 있고, 도(道) 인구 대비 납북자 피해가 가장 많은 곳은 강원도였다.”
-명부에 기록된 납북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북한이 국보처럼 떠받드는 『김일성전집』 4권에는 1946년 7월 작성된 김일성 담화문 ‘남조선에서 인텔리들을 데려올 데 대하여’라는 문서가 남아 있다. 전쟁 전부터 김일성이 남한의 기술·지식인 계층을 탐냈다는 증거다.
북한은 서울 점령 기간 중 서울 시민 50만 명을 북한으로 데리고 가려는 ‘전출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 계획에는 ‘노동력이 없는 가족은 북송을 엄금하라’는 별도의 지침이 있다. 한마디로 노인, 여성, 아동은 제외하고 노동할 수 있는 남성 기술자들 위주로 데리고 가겠다는 의지였다. 납북자의 98%가 남성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납북자들의 당시 직업도 눈여겨봐야 한다. 당시 국회의원 및 정치인 169명, 판검사 90명, 변호사 100명, 경찰 1613명, 행정공무원 2919명, 군인가족 879명, 교수 및 교원이 863명, 의사 및 약사가 526명이다. 이처럼 대한민국 정부는 인민군에게 영토만 빼앗긴 것이 아니었다. 국가를 지지하는 백성들과 국가 존립을 상징하는 인적자원마저 통째로 빼앗긴 것이다.”
-전시 납북자 문제에 대한 우리 정부와 정치권의 태도는?
“과거 정부에서는 냉전의 논리 때문에 전시 납북자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납북자 가족들은 연좌제에 걸려 수 십 년간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냉전의 시대가 끝나고 본격적인 남북교류가 시작되었지만 오히려 전시 납북자 문제는 완전히 묻혀 버렸다.
2000년 9월 김 전 대통령은 납북자의 규모를 480명 규모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이 말한 ‘480명 설(說)’은 종전(終戰) 후 납북자에 대한 추정치일 뿐이다. 통일부에서도 전시 납북자 문제를 자신들의 업무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노무현 정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가족들이 통일부, 행자부, 통계청, 경찰청, 국정원, 국가 기록원 등 정부의 모든 단체를 찾아 다니며 납치된 사람들의 기록을 찾아달라고 애원했지만 그 어떤 부서에서도 우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전시 납북자 명부는 모두 우리 가족들의 힘으로 찾아 낸 것이다. 우리는 2001년 12월에 고서(古書) 수집가로부터 전쟁 당시에 기록된 ‘서울특별시 납치 피해자 명부’를 입수했다. 1950년 12월에 작성된 전쟁 납북자 관련 최초의 명부였다. 국회도 마찬가지다. 17대 국회에서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이 전시 납북자 특별법을 발의했지만 현재까지 계류된 채 곧 회기가 끝나는 시점에 와 있다.”
-전시 납북자 문제가 정부와 정치권에서 공론화 되지 않는 이유는?
“통일부나 정치권이 갖고 있는 역사인식 수준이 그만큼 미천하기 때문이다. 국가와 국민, 헌법과 정부, 인권과 통일 같은 가치개념을 실현하는 정치보다 눈앞의 인기와 표를 얻는 정치를 좋아하는 것 같다.
2000년 가족들이 전시 납북자 생사확인을 위해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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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납북자 가족들의 고통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잊지 말아달라.”
1950년.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지 68일째 되던 날, 서울 청량리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미일(李美一) 이사장의 집에 낯선 사람이 들이닥쳤다.
‘유소위’라고 자신을 소개한 정치보위부 요원은 “잠시 조사할 것이 있다”며 고무신에 반바지 차림이던 아버지 이성환씨를 데리고 갔다. 당시 청량리에서 유기공장을 운영하던 이씨가 서북청년단(극우반공단체)에 기부금을 냈다는 것이 연행 이유였다.
58년 간의 긴 헤어짐의 시작이었다. 이 이사장은 두 살 때 끌려간 아버지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꿈속에 찾아오던 아버지의 모습을 잊을 수 없어 전시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섰다.
아버지가 끌려갔던 바로 그 자리에 가족협의회 사무실을 만들고,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도 개설했다. 자료원은 국내외를 통틀어 한국전쟁 납북자 실태에 대해 가장 방대한 자료를 보유하고 있다.
이 이사장과 가족회 회원들은 지난 10년 동안 납북 가족의 생사만이라도 확인해 달라고 통일부 문턱이 닳도록 쫓아 다녔다. 하지만 반응은 냉랭했다. 이 이사장은 데일리NK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10년 정부 어떤 단체에서도 전시 납북자에 대해서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이 이사장에게서 전시 납북자의 실태와 피해 가족들이 요구하는 해결 방안에 대해 들어봤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지난 10년 동안 전쟁 납북자들에 대한 생사 확인을 요구하는 가족들의 요구에 ‘모르쇠’로 일관했다. 납북(拉北)인지 월북(越北)인지 구별할 기준도 없으며, 그 규모를 증명할 명부(名簿)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에 대해 이 이사장은 “우리는 수십 년 동안 연좌제에 묶여 고통을 받아왔다. 전시 납북자들에 대한 증거가 없다면 정부에서는 무슨 근거로 우리 가족들에게 연좌제를 적용했다는 말인가”라며 항변했다.
그러면서 그는 “1950년 12월 당시 최초로 정부 공보처 통계국에서 작성한 ‘서울특별시피해자명부’에는 총 4616명의 인적사항이 피살, 납치, 행방불명으로 분명히 구분되어 기록되어 있다”며 “그 당시 정부는 피살, 납치, 실종 피해자를 엄격히 구별했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이 이사장은 새로 출범하게 된 이명박 정부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크다. 그는 전시 납북자의 생사확인만이라도 정부에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쟁 납북자의 진실을 밝히는 문제가 남북관계에 장애가 된다는 관점부터 뜯어 고쳐야 합니다. 새 정부에서는 전시 납북자에 대한 개념부터 바로 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이사장은 전시 납북자들의 탈북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반세기 이별의 아픔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는 “남에서는 헤어진 가족과 재회의 눈물을 흘리는 동안 북에 남은 또다른 가족은 수용소에 끌려가야 하는 북한의 현실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고 말했다. [박인호 nk기자]
다음은 이미일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인터뷰 전문.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납북자’라는 말은 생소하게 들린다.
“납북자(拉北者)란 개인 의사와는 상관없이 북한 당국에 의해 강제적으로 납치, 억류된 사람들이다. 크게 국군포로, 전시(戰時) 납북자, 종전(終戰) 후 납북자로 구별해 볼 수 있다. 전시 납북자는 6·25 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의 실질적 점령이 이루어진 지역에서 북한 당국에 의해 조직적으로 납치된 사람들이 다수다.”
-전시 납북자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지금까지 발굴된 전시 납북자에 대한 기록은 모두 5종이다. 1950년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서울특별시피해자명부’에 2천438명의 명단이 있고, 1951년 납치인사가족회가 신익희 국회의장에게 송부했던 ‘6·25사변피랍치인사명부’에는 2316명의 이름이 있다.
1952년 정부가 작성한 명부에는 8만2959명이 기록되어 있다. 1954년 내무부 치안국이 작성한 명부에는 1만7940명, 1956년 대한적십자사가 납북자 가족들의 신고를 통해 작성한 ‘실향사민 등록자 명단’에는 7034명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다섯 종류의 명부를 취합하여 중복된 이름을 제외하면 전체 명부(名簿)에 기록된 사람만 총 9만6013명이다. 이 숫자는 최소치일 뿐이다. 당시 전쟁 통에 주거지에서 이탈했거나 피난을 떠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명부의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북한에 납치되었을 것이다.”
-납북자 명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은?
“각 명부에 확인된 사람들만 놓고 보면 전시 납북자들에게는 일정한 공통점이 발견된다. 먼저 납북자의 88%가 1950년 7월에서 9월 사이에 납치됐다. 북한 인민군이 38선을 밀고 내려왔다가 후퇴하기 직전 시기에 집중적으로 끌려갔다는 것이다.
또한 납북자의 80%가 자기 집이나 거주지 근방에서 끌려갔다. 미리 납치자 명단을 작성해서 인적 사항과 거주지를 추적한 후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끌고 갔다는 것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명부에 기록된 납북자 중 98%가 남성이다. 연령비율은 ‘10대 후반에서 20대 후반’이 75%를 차지한다. 전시 납북자들은 서울 및 수도권 거주자들이 42%를 차지하고 있고, 도(道) 인구 대비 납북자 피해가 가장 많은 곳은 강원도였다.”
-명부에 기록된 납북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북한이 국보처럼 떠받드는 『김일성전집』 4권에는 1946년 7월 작성된 김일성 담화문 ‘남조선에서 인텔리들을 데려올 데 대하여’라는 문서가 남아 있다. 전쟁 전부터 김일성이 남한의 기술·지식인 계층을 탐냈다는 증거다.
북한은 서울 점령 기간 중 서울 시민 50만 명을 북한으로 데리고 가려는 ‘전출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 계획에는 ‘노동력이 없는 가족은 북송을 엄금하라’는 별도의 지침이 있다. 한마디로 노인, 여성, 아동은 제외하고 노동할 수 있는 남성 기술자들 위주로 데리고 가겠다는 의지였다. 납북자의 98%가 남성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납북자들의 당시 직업도 눈여겨봐야 한다. 당시 국회의원 및 정치인 169명, 판검사 90명, 변호사 100명, 경찰 1613명, 행정공무원 2919명, 군인가족 879명, 교수 및 교원이 863명, 의사 및 약사가 526명이다. 이처럼 대한민국 정부는 인민군에게 영토만 빼앗긴 것이 아니었다. 국가를 지지하는 백성들과 국가 존립을 상징하는 인적자원마저 통째로 빼앗긴 것이다.”
-전시 납북자 문제에 대한 우리 정부와 정치권의 태도는?
“과거 정부에서는 냉전의 논리 때문에 전시 납북자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 납북자 가족들은 연좌제에 걸려 수 십 년간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냉전의 시대가 끝나고 본격적인 남북교류가 시작되었지만 오히려 전시 납북자 문제는 완전히 묻혀 버렸다.
2000년 9월 김 전 대통령은 납북자의 규모를 480명 규모로 추정한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이 말한 ‘480명 설(說)’은 종전(終戰) 후 납북자에 대한 추정치일 뿐이다. 통일부에서도 전시 납북자 문제를 자신들의 업무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노무현 정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가족들이 통일부, 행자부, 통계청, 경찰청, 국정원, 국가 기록원 등 정부의 모든 단체를 찾아 다니며 납치된 사람들의 기록을 찾아달라고 애원했지만 그 어떤 부서에서도 우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전시 납북자 명부는 모두 우리 가족들의 힘으로 찾아 낸 것이다. 우리는 2001년 12월에 고서(古書) 수집가로부터 전쟁 당시에 기록된 ‘서울특별시 납치 피해자 명부’를 입수했다. 1950년 12월에 작성된 전쟁 납북자 관련 최초의 명부였다. 국회도 마찬가지다. 17대 국회에서 한나라당 전여옥 의원이 전시 납북자 특별법을 발의했지만 현재까지 계류된 채 곧 회기가 끝나는 시점에 와 있다.”
-전시 납북자 문제가 정부와 정치권에서 공론화 되지 않는 이유는?
“통일부나 정치권이 갖고 있는 역사인식 수준이 그만큼 미천하기 때문이다. 국가와 국민, 헌법과 정부, 인권과 통일 같은 가치개념을 실현하는 정치보다 눈앞의 인기와 표를 얻는 정치를 좋아하는 것 같다.
2000년 가족들이 전시 납북자 생사확인을 위해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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