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제주사건은 이래서 폭동이고 반란이다"
현대사포럼 대표 이선교 목사 인터뷰
최근 우리현대사에 대한 올바른 평가와 바른 역사를 되찾기 위한 운동이 보수 우익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지난 2000년 1월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4·3사건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제정되고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돼 노무현 대통령에게 조사결과가 발표됐지만 이 내용이 가짜로 작성됐다는 사실을 규명하고 요로에 진정을 내며 이를 바로 잡기에 적극 나서고 있는 현직 목회자가 있어 언론 등 각 분야의 주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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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서울 수유리에 위치한 백운교회 담임목사로 재직하고 있는 이선교(현대사포럼 대표) 목사를 코나스(konas)가 단독 인터뷰했다. 이 목사는 40여년 전 군복무 때부터 6·25한국전쟁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한국전 다시 써야 한다', '다시 써야 할 한국 기도교사', '제2차 한국전쟁 - 끝나지 않은 전쟁 6·25를 말한다', '6·25한국전쟁 막을 수 있었다' 등을 저술하면서 한국전쟁과 관련한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와 사회주의 좌파의 위험성을 알리고자 직접 좌파단체 활동현장에도 참여해 체험하면서 좌파 사상의 해악을 알리는데 주력하고 있다.
(가칭)'대한민국정체성회복국민협의회' 발기인으로 이 대회를 앞두고 준비에 분주한 이선교 목사를 지난 25일 만났다. 연세(66세)에 비해 훨씬 동안인 이 목사는 바쁜 와중에도 편안한 얼굴로 따뜻하게 맞아 한국전쟁과 좌파의 위험, 특히 4·3사건에 대해 1시간 30동안 말을 이어 나갔다.
특히 목회 활동을 하면서도 현대사포럼 대표로 우리 현대사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이면서 군부대에 애착이 많다는 이 목사는 6·25전쟁 당시 서울로의 진격을 도모하던 인민군 3사단의 이동을 17시간에 걸쳐 지연한 아군 25연대의 활약을 국가 사활을 건 전투로 보고 아직도 이 연대의 전투를 기념하는 전투기념비가 아직 없음을 못내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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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이 목사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 목사님 요즘 무척 바쁘게 활동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무척 동안(童顔)이신데요, 성직에 계셔서 그런가요? 그런 말씀 많이 들으실 줄 압니다만.
- 그런 얘기를 자주 듣습니다. 특별한 것은 없고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등산과 함께 열심히 일하고 해서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웃음). 또 커피나 외제 음료를 마시지 않습니다. 우리 교인들에게도 권면 하고 있는데, 제가 알기에 년간 커피 등 외국산 음료를 수입하는데 8천억원 정도의 외화가 새나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힘들게 일해서 벌어들이는 돈이 외화유출로 이어진다면 노동자들을 위한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녹차 등 국산차를 애용하고 젊은이도 이용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서도 국산차 마시기를 생활화하고 있습니다.
▲ 목회를 하시면서 '6·25 한국전쟁 막을 수 있었다' 등의 전쟁 관련 서적을 집필하셨는데, 조금은 의외입니다. 어떤 동기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 1963년도 육군본부 인근에 있는 군수학교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시간이 많아서 주말이면 외출을 나가고 했는데 어느 날 학교 도서실을 가니 많은 책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한국전쟁과 관련한 전쟁 일기 같은 '전투상보'를 대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부터 외출을 나가지 않고 도서실에서 주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전투상보는 빠르게 갈겨쓴 흔적과 글씨가 흐릿해서 읽기에 매우 힘이 들었지만 자료가 매우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었고, 그 때부터 전쟁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자료를 섭렵하고 관련 서적을 구입하면서 소중한 내용이라 보이면 스크랩을 해가면서 자료를 축적하자 한국전쟁에 대한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습니다.
▲ 한국전쟁과 관련한 저서에 대해 얘기 좀 듣고 싶습니다. 특히 6·25전쟁의 어떤 점에 대해 의문점을 갖게 되었는지요?
우선 당시 총참모장인 채병덕 장군만 잘했으면 전쟁을 막을 수 있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채병덕을 연구하고 그러다 보니 6·25전쟁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제대 후에도 꾸준하게 연구를 하면서 세미나 등에도 적극 참석하고 하다보니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게 되었네요. 그러다 지난 1980년에 이 자료들을 정리해서 책을 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연구를 하다보니 분명히 한국전쟁을 알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연구해야 답이 나오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남로당을 알아야 하고 두 번째는 전사를 알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이미 사망한)김일성을 만나야 하고 당시 인민군 3사단 사단장으로 6·25전쟁 시 경기도 양문교를 지나 포천으로 진격하던 이영호 소장을 만나야 전쟁에 얽힌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김일성은 사망했고 이영호 또한 전쟁 후 김일성에 항거했다는 이유로 투옥돼 생사를 알 길 없어 그 정확한 진상을 알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이영호 3사단장은 어떤 인물이며 6·25전쟁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습니까?
- 1950년 6월 25일 새벽4시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양문교를 지나 오전 11시 30분에는 포천을 점령했습니다. 그 상태로 남하를 계속했다면 의정부에 주둔한 아 7사단 1연대는 적 3사단에 완전 포위될 상황이었습니다. 적 3사단은 탱크 1백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당시 탱크는 시간당 최고속도 40km에, 평균 20km로 이동하였기에 적 3사단이 이동을 계속했다면 파죽지세로 서울에 입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3사단은 송호리에서 아 3연대를 완파하고 점령한 후에 더 이상 이동을 하지 않고 포천에서 하루를 머문 것입니다.(결과적으로 아군에 시간을 벌게 하는 결과가 됨)
이선교 목사의 전쟁 이야기는 마치 물이 흐르듯 막힘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목사는 의정부 인근 호원동에 위치한 국군 25연대 1, 2대대와 미 라이필 대위가 이끄는 중화기 중대가 바주카포로 적 전차 1대를 파괴해 이들 부대가 이동을 저지해 초기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을 무려 17시간에 걸쳐 저지한 상황을 상세하게 전했다.
이 목사에 의하면 인민군 3사단이 의정부에 150여대의 전차와 함께 동시에 들어오고 아군에 의해 적을 지연시킨 기간 동안 미국에서는 트루먼 대통령이 주재하는 안보관계 장관 각료회의가 열렸다며 일부 관계자들은 한국이 전략적 가치가 없다고 포기하자고 했지만 러스크 국무장관 등의 주장으로 일단 육군은 보류하고 해·공군을 참전시키자고 해 트루먼이 맥아더 장군에게 명령이 내려진 시간에 해당된 것으로 대한민국의 앞날과 관련해 일촉즉발의 시기에 해당된 시기였다고 설명했다.
이 목사는 이어 지금의 한국이 있기까지 25연대 1대대 등 라이필드 대위의 공이 크다. 백석천 다리를 찾는데도 6개월 이상이 걸렸다. 후대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라도 이 지역에 기념비라도 하나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 지금 그 지역은 교회 땅이라고 부언하기도 했다.
▲ 우리사회의 좌파 사상의 위험성, 특히 최근에는 제주 4.3사건에 대해서도 많이 경고하고 잘못된 4.3사건 특별법 등에 대해서도 바로잡고자 활동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본질과 현재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좀 짚어 주십시오.
전대협은 1983년부터 조직된 북한 주체사상으로 무장되었으며 대법원으로부터도 이적단체로 판결을 받은 단체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6·25전쟁은 미국의 대리 전쟁이고 4·3사건으로 국군이 양민 8만명을 학살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 13연대 반란을 분단에 대한 항쟁이라고 선배가 교육하고 그 선배가 다음 후배에게 가르칩니다. 요즘 소위 386 세대가 이 사상에 젖어있고 국회에도 60명이 들어가 있습니다.
소설 태백산맥은 이 13연대 반란사건을 소재로 한 사회주의 인민혁명을 주창하는 내용으로 북의 선전 책이나 마찬가지죠. 이런 사상에 젖은 세대들이 각계에 포진해 지금 한국을 주도하고 있고 이들이 전교조 만들고 젊은 학생들에게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 될 나라', '청산의 대상' 이라는 말로 대한민국 역사를 부인하고 폄훼하고 있다.
연간 군에 입대하는 장정 중 2만 여명의 젊은이들이 '미국은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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