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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은 오늘에도 살아있다

安의사 순국 98주기를 맞이하여

Written by. 최명재   입력 : 2008-03-26 오전 9:5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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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은 아침부터 짙은 안개 속에 부슬비가 내렸다. 안중근은 형장으로 끌려 나왔다. 안중근은 “이토 처단은 동양평화를 위함이었다. 한일 양국이 일치 협력하여 평화를 도모하기 바란다”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리고 10시 15분, 안중근은 절명했다.안중근에 대한 재판은 형식적으로 심문, 변호, 구형, 선고 등 6회의 공판을 거쳐 일주일 만에 속전속결로 끝났다.

  이것은 공판 자체가 원인 무효다. 사건이 제정러시아의 조차지역에서 일어났고 안중근은 한국의 의병이었음에도 일본형법상의 살인죄를 적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검찰은 1905년 11월 17일의 제2차 한일협약을 근거로 한국은 외교권을 상실한 상태며 안중근은 정규군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일협약은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한 것이지 주권을 상실한 것이 아니며 1907년 정미조약과 1909년 기유각서에도 재판권 행사를 위한 법 적용은 한국법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 회의에서 채택한 육전규칙에 의하면 비정규군도 교전 자격자가 될 수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따라서 관동도독부 법원의 판결은 일제가 국제법과 관례를 무시한 선례가 된다.

  일본인들은 지금도 안중근을 일본의 대륙 진출을 방해한 인물 혹은 명치시대의 거물 정치가이자 한국의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테러리스트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표상이자 영웅인 안중근을 흉한으로 보는 일본인들의 관념을 그대로 용인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이것은 양국의 근대사가 극단적으로 충돌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왜냐하면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은 단순한 개인 관계가 아닌 국가적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근본적인 인식 차이가 정리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미래 지향적인 한일관계를 기대하기 곤란한 것이다.안중근은 사형 집행 당일 일본군 헌병 지바 도시치에게 ‘위국헌신 군인본분’이라는 유묵을 써 줬다. 이 같은 일련의 의사 표시는 의병장으로서 안중근 자신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즉 이토 처단은 객관적으로 의병전쟁의 일환으로 국제법상 전장에서 적장을 사살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에서 일본의 대륙 침략 정책을 규탄하고 항상 분쟁이 끊이지 않는 뤼순을 동북아의 중심지로 삼아 한국과 일본, 중국 세 나라가 자주독립국으로 힘을 합쳐 지역협력체제를 구축하자고 제의했다.

  여기서 우리는 안중근의 선구자적인 뛰어난 통찰력과 박애주의 사상을 접할 수 있다. 안중근은 오늘에도 살아 있다. 지역 패권 추구와 냉전의 잔재가 남아 있는 동북아에서 항구적인 평화와 번영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안의사가 주창한 접근 방안에서 우리 모두는 중요한 교훈을 배워야 한다.

  유해는 뤼순감옥 묘지에 묻혀 아직도 그 정확한 위치를 모른 채 고국으로 봉환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진심으로 참회하고 안중근을 한민족의 지성인으로 그리고 국권 회복과 자주독립을 위해 살신성인한 장군으로 평가할 수 있는 날 그때가 비로소 한일 간의 근본적 화해가 열리는 날이 될 것이다.(konas)

 최명재(안중근의사기념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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