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특집⑦] 6·25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밴플리트 대장의 눈물
이제 우리가 그들을 위로해야 할 때..6·25전쟁 당시 참전한 미군 장성의 아들은 총 142명, 이중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6월의 푸른 산하는 여느 때보다 아프고 시려 보인다. 그것은 회한과 분노, 그리고 희생의 아픔이 어우러진 6·25가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6월은 많은 사람들을 숙연하게 한다. 국립현충원을 찾은 전사자 유가족들은 비석을 어루만지며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악몽의 전쟁터에서 사선을 수없이 넘었던 참전용사들 역시 주먹을 불끈 쥐며 59년 전에도 같았을 조국의 하늘을 응시해 본다. 또한 보훈병원 병상에서도 6·25 당시 전투에서 부상당한 백발의 노병들이 포연 속에 스러져간 전우들을 생각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6·25가 가까워지면 내가 묻어 준 동료들, 내 앞에서 죽어간 동료들이 떠올라요. 군번도 없이 죽어 간 전우들이 얼마나 많은데…"하며 눈물을 흘리는 참전 학도병들의 한 서린 외침도 들려온다.
이처럼 6·25전쟁은 산자나 죽은 자, 몸이 성한 자나 다친 자, 조국에 남아 있는 자나 억류된 자, 그리고 전쟁 세대나 전후 세대 할 것 없이 모두에게 깊은 상처와 고통을 안겨주었고 그 상처와 고통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보다 더 큰 상처와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다. 이분들은 자기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고 또 전혀 알지 못했던 코리아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 무작정 한국으로 달려와 3년간의 전쟁을 치르면서 희생된 참전 16개국의 용사와 그 가족들이다. 3년간의 전쟁을 통해 전사와 부상, 납치자, 행방불명 등을 포함한 유엔군의 총 희생자는 엄청난 숫자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본 미국은 연 178만 9천여 명을 한국에 파병하여 전사 33,686명, 실종 3,737명 등 총 137,250명이 희생되었다.
한국전선에서 전사한 미군 고위장교
6·25전쟁은 미군들에게 전혀 새로운 환경과 적을 맞아 싸운 어렵고 힘든 과정의 연속이었다. 미군이 참전하게 된 시점은 북한군의 기습공격에 밀려 초기 방어작전이 실패로 돌아가 서울이 함락된 데 이어 오산 북쪽 죽미령까지 후퇴할 때였다. 미군은 이때부터 북한군과의 사투를 벌이면서 3년간의 길고 긴 전쟁에 휩쓸리게 된다. 3년 동안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서야 끝난 6·25전쟁에서 미국은 국가적 인재인 고위 장교들을 많이 잃었다.
미 제8군사령관이었던 워커(Walton H. Waker) 중장은 6·25전 당시 희생된 미군 최고위 장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전선에서 용맹을 떨쳤고 지략을 겸비했던 워커 중장은 중공군 개입으로 유엔군과 한국군이 38선 부근으로 철수하여 방어전을 펴고 있을 무렵 작전을 진두지휘하였다. 그는 1950년 12월 23일 영국군 제27여단에 표창장을 수여하기 위하여 의정부 북쪽 도로를 달리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순직하였다. 또한 미 제9군단장이던 무어(Bryant Moore) 소장은 전투를 지휘하던 중 헬기사고로 순직하였으며, 초기 방어작전에 참여하였던 미 제24사단의 사단장 딘(William F. Dean) 소장은 대전에서 옥천으로 철수하던 중에 길을 잘못 들어 적의 기습을 받아 부상병을 이끌고 후방으로 탈출하다가 북한군에 붙잡혀 긴 포로생활의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영관급 지휘관으로서는 미 제34연대장이었던 마틴(Robert Martin) 대령 역시 전투를 진두지휘하던 중 전사하였으며, 한국전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미 해군참모총장이었던 셔먼(Forrest Sherman) 제독은 6·25전쟁 업무로 인해 과로하여 순직하였다.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달려온 군인들
한국전선에서 유명을 달리한 미군 고위장교와 더불어 우리에게 감명을 주고 있는 사연이 또 있다. 그것은 미군 장성의 많은 아들들이 위험 천만한 전쟁터를 자원하여 6·25전쟁에 참전하였다는 점이다. 6·25전쟁 당시 참전한 미군 장성의 아들은 총 142명이나 되었고 이중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이들은 생사를 가르는 상황이 수없이 교차되는 한국의 전쟁터에서 그들의 아버지들이 전해주는 생명의 위험성과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지만 이들은 자유를 지켜야 하는 미국 국민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기 위해 코리아로 향했고, 현지에서 작전을 지휘하던 그들의 아버지들은 이런 아들의 결심을 만류하기보다는 오히려 용기를 복돋아 주었다.
이들 중에는 나중에 미국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 원수의 아들 존(John Eisenhower) 육군중령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외에도 미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의 아들 샘(Sam Walker) 육군대위, 그리고 유엔군사령관이었던 클라크 장군의 아들 빌(Mark Bill Clark) 육군대위와, 8군사령관이었던 밴플리트 대장의 아들 밴플리트 2세(Jams A. Van Fleet Jr) 공군 중위, 그리고 미 제1해병 사단장 해리스 장군의 아들인 해리스 해병소령 등이 바로 그 주역들이다.
이중 워커 중장의 아들 샘 대위는 그가 평소에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의 죽음을 한국에서 맞는 슬픔을 당해 많은 미 국민들에게 안타까움을 안겨주기도 하였고, 해리스 소령은 처절했던 장진호 전투를 지휘하던 중 전사하였다.
아들을 잃은 밴플리트 장군의 눈물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4월 4일 미 제8군사령관이던 밴플리트 육군대장의 밤은 어느 때보다 길고 길었다. 그것은 군산기지를 발진하여 북한 깊숙이 들어가 야간 폭격작전에 출격한 아들 밴플리트 2세 공군 중위의 기체가 아직껏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난히 조종사가 되고 싶어했던 아들은 미 육사를 졸업하였지만 육군보다는 공군을 선택하였다. 그런 아들은 아버지에 이어 한국전에 뛰어들었고 아버지는 군사령관으로서, 아들은 폭격기 조종사로서 한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함께 싸우고 있었다. 북녘하늘을 응시하던 밴플리트 장군의 얼굴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나 차마 울음을 터트리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그토록 사랑하고 자랑스럽던 아들은 차디찬 동토의 땅 북한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영어의 몸이 되고 아직도 그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후 정전회담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포로문제가 자연히 논의되었을 때 밴플리트 장군은 공산특 대표단에게 개인적으로 아들의 생사여부를 확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밴플리트 2세 중위가 폭격하던 곳은 중공군 후방근무사령부 예하 제3지부 관할인 평양 인근의 물개리 지역이었다. 중공군은 나름대로 폭격기 추락지점으로 예상되는 지역을 샅샅이 뒤졌으나 중위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하자 그 결과를 미국대표단에 알려 주었다. 밴플리트 장군은 이 소식을 듣고 그동안 품어왔던 실낱같은 희망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듯 크게 실망하였다. 아마도 생전의 밴플리트 장군은 아들을 잃은 1952년 4월 4일에 뚫어지게 바라보았던 코리아의 하늘을 결코 잊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들을 위로해야 할 때
미국은 전쟁을 통해 엄청난 인적·물적자원을 투입하여 한국의 자유를 지켜주었다. 그러나 그 못지 않게 고귀한 인명이 대량으로 희생되는 역사적인 아픔을 겼었다. 3년간의 전쟁기간 중에 총 13만 7천여 명에 달하는 장병들이 희생되었고, 전선을 지휘하던 군사령관, 군단장, 사단장, 연대장, 대대장, 조종사 등 우수한 국가적 인재를 수많이 잃었다. 또한 35명에 달하는 미국 장군의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적과 싸우다가 유명을 달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미국의 부모와 그 가족들은 아들의 죽음에 큰 충격과 슬픔을 경험하였다. 또한 한국의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참전 군인들은 평생을 정신적·육체적인 고통에 시달려 왔고, 몸이 성한 참전용사들 역시 6·25전쟁의 악몽을 아직까지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한국전에 참전했던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자신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코리아가 이처럼 발전하게 된 것에 대해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만약 우리국민이 미국인의 입장이 되었다면 어떤 마음자세로 상대국을 도울 수 있었을까? 그리고 단지 '자유'라는 보이지 않는 가치에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아무런 조건 없이 보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 그들에 대해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 정부와 국민은 6·25라는 민족의 비극적인 사건을 자꾸만 잊어버리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교훈 삼아 대한민국 역사발전의 계기로 삼는 리더십을 적극 발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리더십의 출발은 바로 6·25 참전용사와 그 가족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진심으로 위로하며 도와드리는 인간적인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참전용사의 명단을 전면적으로 파악하여 생존해 있는 분을 도와주거나 이미 사망한 분은 그 가족들에게 어떤 형태로든지 감사의 표시를 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것이다. 아울러 6·25전쟁 당시 비록 국적은 서로 다르지만 코리아라는 땅에서 공동의 정신과 목표를 가지고 싸웠던 전우애를 바탕으로 친선과 교류를 더욱 확대하고, 이를 시스템화하는 일을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매년마다 노르망디 해안에서 개최되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기념식에 참전국의 수뇌부는 물론 참전용사들이 대거 참여하여 그 의미를 기리는 것처럼 우리도 6·25전쟁 추념행사를 국제적인 차원으로 확대하여 추진해 보면 어떨까? 왜냐하면 6·25전쟁은 그저 잊어야 할 전쟁이 아니라 우리 역사와 참전국 역사에서 영원히 기억되고 함께 싸운 파트너십을 오랫동안 유지할 필요가 있는 또 다른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6·25전쟁에서 잃은 벤플리트 장군을 포함한 수많은 참전국 부모들이 흘리고 있는 눈물을 따뜻하게 거두어 주는 것 또한 코리아의 도리와 양심이라고 보기 때문이다.(konas)
유명덕(리더십칼럼니스트, 국방리더십개발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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