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前後史의 재인식
금년은 6․25 전쟁 발발 59돌이 되는 해이다. 지난 1997년 12월, 10년간의 좌파정권을 종식시키고 정권교체를 실현했으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말처럼 많은 국민들은 아직 정권교체의 실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정신적으로 큰 병을 앓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근․현대사에 대한 역사관 혼란이다.
1990년대 후반 한국사회는 고도의 경제성장과 신속한 민주화 과정을 거친 후, ‘선진 통일국가’로 진입할 역사적 계기를 맞았으나, 지난 10년 무능한 좌파정권의 등장으로 그 꿈이 좌절됨은 물론, 도리어 유례없는 분열의 시기를 맞게 되었다. 그 근본원인은 기존의 역사관·국가관·세계관에 도전, 이를 전도(顚倒)시키려는 기도가 국가권력을 장악한 집권세력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파생된 가치관의 혼돈과 사회 각 분야의 혼란은 이루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역사관 전도(顚倒)의 핵심에 6.25전후사가 존재한다. 6.25는 해방 후 가까스로 건국한 대한민국과 한국민, 한민족이 경험한 최대의 시련이자 고통이었다. 6.25전쟁은 3년여를 지속하면서 민족사뿐 아니라 세계사를 뒤흔든 국제적인 대환란이었다.
전쟁은 모든 것을 무너뜨렸고, 그 폐허 위에서 우리는 새 출발해야 했다. 전쟁의 기원과 성격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어왔고, 아직도 정리가 잘 안되어 있는 부분이 적지 않다. 이제 6·25 전후에 대한 올바른 사관 정립을 통해, 분열에 종지부를 찍고 통합의 새로운 전진을 기해야 할 때이다. 現 시점에서 분열을 통합하는 일은 지속적인 국가 발전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과제이다. 그러나 ‘국민 통합(national integration)’은 구호나 물리적으로 이뤄질 수는 없다. 진정한 통합은 분명한 사실(事實)과 올바른 가치관에 입각해야 가능하다.
진정한 ‘통합(integration)’을 위해선 무엇보다 가치관의 공유(共有)가 필요하다. 그 공유된 가치관을 토대로 사회구성원 간 공동체의식(a sense of community)이 형성되어, 공동체적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곧 먼저 보편타당한 가치관을 확립하고, 이를 공동체 의식으로 발전시켜 구성원들이 공유하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구성원 상호간 컴뮤니케이션이 증대될 필요가 있다.
북한의 체제위기와 함께 한반도는 어떤 형태로든 통일의 기회를 맞고 있다. 정치적․군사적 통일과 더불어 요청되는 것이 또한 공동체적 국민 통합이다. 이렇게 볼 때 남남갈등의 치유·통합은 물론, 남북 간 통합의 필요성도 절실해진다. 남북은 지난 60여년을 이질적인 정치 이데올로기 및 체제 속에 살아왔기 때문이다. 보편적 가치관과 이념의 토대 위에서만이 오랜 기간 지속된 남북 간의 이질성을 극복하고 진정한 통합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본고는 6.25 59돌을 맞아 6.25전후사에 대한 재조명을 시도함으로써, 올바른 역사관·국가관·세계관 형성과 국민통합 과업에 일조하고자 한다. 아울러 6․25전후사 재인식이 국가정체성 확립과 국가안보, 통일과업 실현에 주는 교훈과 함의를 모색해 보려 한다.
II. 해방.건국으로부터 6.25전쟁으로
한반도는 38도선을 경계로 미․소 점령 구역으로 나뉜 후, 영구적인 분단선으로 굳어졌다. 2차대전 중 독일과 일본을 패퇴시키기 위해 연합국의 일원으로 협력했던 미국과 소련은 2차대전이 종결을 향해 감에 따라, 대결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고, 한반도에서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그 주된 원인은 소련 공산주의의 팽창과 이를 저지하려는 미국의 대응에 있었다.
2차대전 종결 이후, 미국은 한반도에서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는 점령군의 성격을 띠었으나, 소련의 팽창정책과 중국대륙의 공산화로, 점차 동북아에서 공산세력의 팽창을 저지하고 자유진영을 수호하는 전선으로서의 한반도 곧 남한(한국)의 역할을 인식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남한내 정치상황은 소련의 팽창과 북한점령, 그리고 한반도 적화(赤化)기도에 대항하는 자유·보수세력과 북한을 지지하여 한반도를 공산주의로 통일하려는 세력 간 대결의 장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어, 북한에 스탈린의 지원을 받는 김일성 공산체제가 수립되고, 남한에 자유민주주의를 국시로 삼는 대한민국 단독정부가 출범한 후, 한반도 남북 정치체제간 좌우 냉전현상이 심화되면서, 마침내 열전(熱戰)으로 치닫게 된다.
1. 대한민국 건국을 둘러싼 논쟁—‘단독정부’ 문제
해방 정치공간에서 가장 큰 현안은 대한민국 건국을 둘러싼 논쟁 곧 (i)북한에 공산정권이 수립돼 한반도 적화를 추구하는 상황에서 정부 수립이 불가피하다고 보는 세력과 (ii)정부 수립을 ‘분단 고착화’로 인식, 어떻게든지 ‘통일 정부’를 수립해야한다면서 정부 수립에 반대한 세력 간의 투쟁이었다.
존 하지(John R. Hodge)가 이끄는 美 군정이 애초 이승만이나 김구 등 보수 세력보다 중도 인사를 중심으로 ‘좌우 합작’을 도모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美 군정의 ‘좌우 합작’ 시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1947년 美․蘇 간의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 미국의 정책결정권자들은 소련과의 타협보다는 힘에 의한 대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에 앞선 1946년 6월 이승만(李承晩)은 ‘정읍 발언’을 통해 남한 내 ‘단독정부’ 수립의 불가피성을 역설한 바 있었다. 그는 “남쪽만이라도 임시정부나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천명하였는 바, 이 연설은 공산주의자들이 이미 북한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상황에서, 혼돈의 해방 정국을 마감하고 건국(建國)을 추진하기 위한 논리적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동시에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통일정부 수립’ 슬로건이 실제로 불가능에 가까운 것임을 강력히 시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김규식 등 중도파들은 남쪽에서의 단독선거는 오직 분단을 고착시킬 뿐만 아니라, 북측을 소련 진영으로 더욱 밀어넣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한편 美蘇공동위원회가 교착상태에 빠짐과 동시에 워싱턴 당국은 한반도정책에 대한 재평가를 내리기 시작했다. 1947년 후반 트루만 행정부는 한반도가 전략적 측면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가능한 빨리, 그리고 품위있게 한국에서 발을 빼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반도로부터 “우아하게” 철수하기 위해 미국은 1947년 한국 문제를 UN으로 넘기게 된다. 이에 따라 동년 11월 열린 UN총회는 UN한국위원회 감시 하 총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결의했다. 그러나 소련은 선거 실시를 위해 북측 지역에 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UN한국위원회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이듬해인 1948년 2월 26일 유엔은 접근 가능한 지역에서라도 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의 제안을 총회에서 압도적으로 가결하였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건국은 명확한 타임 스케쥴을 갖고 진행되게 되었다. 그러나 1948년 5.10선거를 거쳐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이르기까지는 남한 내 남로당 중심의 폭력에 의한 선거 저지 투쟁과 김구·김규식의 방북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 노력의 좌절을 거쳐야 했다.
2. 제주 4.3 무장폭동의 발생과 그 ‘성격’ 논란
가. 제주 4.3폭동의 배경
제주 4.3사건은 건국으로 가는 한국 현대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이는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고 한반도 공산통일을 이룩하려는 목적으로 감행된 무장 폭동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제주 4.3사건의 본질은 6·25전쟁과 일맥상통한다. 다만 주체가 전자는 남로당이었고, 후자는 북한 김일성 공산정부였다는 점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 사회 내에 이 문제에 관해 상반되는 견해가 난립돼 올바른 역사관 형성과 국민통합을 저해하고 있다. 그 과정을 일별해보자.
1946년초 미․소 공동위 활동이 시작된 후 신탁통치 찬반을 둘러싸고 미․소 양측이 견해를 달리함에 따라 5월 공동위가 결렬상태를 맞게 되자, 박헌영이 주도하는 조선공산당은 파업과 테러 등을 통한 反미군정 활동을 본격 전개하기 시작했다.
1946년 조선공산당의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과 이후 폭력투쟁 방식으로 전환할 것을 박헌영이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 이른 바 ‘신(新)전술’, 그리고 북한 주둔 소련군 지휘를 받아 전평(전국 노동자평의회) 산하 단체를 총동원하여 일어난 반미투쟁 및 소요 등은 모두 이 무렵 발생한 사건들이다.
그 중 가장 규모가 크고 격렬했던 것은 그 해 9월의 철도․출판․전화 부문의 총파업과 10월 대구에서 일어난 ‘10월 폭동’이었다. 일련의 폭동과정에서 400여명의 경찰관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정당국은 좌익 세력에 대한 일제 단속에 들어갔으며, 체포령을 피해 월북한 박헌영은 해주(海州)에 거점을 두고 남조선노동당을 결성, 이후 소련 및 북한과의 지원 협조체제를 구축한 후, 대한민국 건국 반대 투쟁에 나섰다.
1947년 2월 박헌영은 남로당 지도부를 통해 남쪽에서의 UN감시하 총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총파업 지령을 내렸다. 2·7총파업을 통해 남로당은 (i)단독선거 반대 (ii)외국군의 즉각적인 철수 (iii)UN을 포함한 외부 간섭 없이 한민족이 자신들의 정부를 수립할 권리가 있음 등을 주장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4일 만에 끝난 2·7총파업으로 40명 이상의 경찰과 우익인사들이 살해되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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