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功過와 역사적 위치 복원해야'
미래정책연구소,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통일 위해 이승만의 功過 재조명
“이승만 대통령의 치적을 공과 과로 나누어 공정하게 자리매김하는 일은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통성을 이어가고 확립하기 위해서, 앞으로 준비하고 대비해야 할 통일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학생운동이 혁명으로 승화됐던 4·19 50주년을 맞이해 묻혀진 건국 아버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공과를 재조명 해보고 이승만 대통령의 역사적 위치를 복원시키는 세미나가 미래정책연구소 주관으로 14일 한국 프레스센터에서 열렸다.
‘4·19 세대가 본 이승만 前 대통령의 공과 과’란 주제발표에서 한중문화협회 이영일 총재는 “한국 청년들의 대다수가 북한의 김일성보다 이승만을 더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현재까지 밝혀진 자료와 대한민국의 정통성 확립이란 목적에 조명해 공과 과를 재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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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승만이 국토 영구분단과 6·25동란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평가에 대해 “소련의 붕괴에 따라 한반도 분단국가 형성과정과 한국전쟁이 김정일의 남침계획을 스탈린이 승인, 지원하고 협력함으로써 일어났다는 소련측 자료들이 발굴, 공개됨으로써 이승만의 책임으로 들씌워진 왜곡된 사실들이 밝혀졌다”고 주장했다.
또한 학계 일각에서 이승만을 친미사대주의자로 매도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이승만은 미국의 이중적 태도를 간취하고 분개했으며, 국력이 약했고 원조를 받기 위해 대미외교를 강화했지만 항상 당당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공헌 부분에 대해 “한반도가 남북한으로 분단될 수 밖에 없던 역사적 상황속에서 내외정세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자율정부 수립이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대미외교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크게 공헌했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6·25 동란에서 공산 침략군을 몰아내고 대한민국을 지킨 지도력과 전시 외교능력에 대해서도 공로를 각별히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건국의 기초를 마련하는 내정개혁에서 보인 성과도 주요 치적으로 꼽았는데, 구체적으로는 “초등교육 의무화와 문맹률 저하, 대학교의 증가 등 교육의 강화, 미국으로부터 22.8억 달러의 경제원조를 받아내 전화복구를 중심개념으로 한 경제재건, 자작농지의 비율을 전체농지의 92.4%에 달하게 한 농지개혁” 등을 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치적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고령의 비극과 장기집권의 획책, 진보당을 탄압하고 독립운동가인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일, 친일파 처리의 유야무야와 심지어 친일파들이 국정을 장악, 독립지사들을 감시·심문하는 위치까지 오르게 한 행위 등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과오”라고 지적했다.
이어 부산대 이철순 교수는 ‘미국, 이승만, 그리고 4·19’란 주제발표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에 대한 생각과 태도, 미국의 이승만에 대한 생각과 정책에 대해 설명했다.
이 교수는 먼저 “이승만이 미국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지 않았고 미국에게 순종적이지도 않았으며, 미국도 이승만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지만 미국의 안보이익을 지켜줄 만한 인물로 이승만 이외의 대안을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또한 이승만은 1899년 황제폐위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돼 5년 7개월의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미국을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에 기초한 이상적 기독교 국가로 생각했지만, 카쓰라-태프트 밀약(1905년 7월22일 미국의 태프트 육군장관과 일본의 가쓰라 수상이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에 동의한 밀약)의 존재를 알고 난 이후호의적인 대미인식이 바뀌었다고 분석했다.
이후 해방 이전까지 이승만은 미국에 임시정부 승인과 대일전쟁 참가를 위한 무기원조를 요청했지만 거절 당했고, 1943년 루즈벨트 대통령이 신탁통치안을 채택하자 격렬한 어조의 항의 서한을 보내는 것은 물론, 국제연합 창설을 위해 소련의 협력이 필요했던 미국이 한국에 좌익세력과의 합작을 강요하자 이에 저항함으로써 이승만에 대한 미국의 불신이 강화됐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해방 이후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안이 확정되자 미군정과 이승만의 관계가 크게 어긋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는데, 특히 1946년 12월 도미한 이승만은 자신의 단독정부론을 직접 미국의 조야에 설파해 귀국 이후에 가택연금 상태에 놓였다고 말했다.
이렇듯 이승만과 미국의 갈등과 대립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이승만의 단독정부 노선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승만 외에는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며, 이승만이 맹목적인 친미주의자거나 대미 사대주의자였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1950년대 전반에 이승만과 미국의 대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인 ‘부산정치파동’이 발생했는데, 이 교수는 이를 “이승만이 단순히 자신의 집권 연장을 위해 꾸민 전략적인 사건으로 보는 것이 전통적이지만, 본질은 다른 정치지도자(장면)로 교체하려는 미국에 맞선 이승만의 저항”으로 보았다.
이후 1953년 4월24일 이승만이 휴전을 반대하고 단독북진을 표명하자 클라크 대장은 이승만 제거계획을 본국에 통보하고, 5월4일 미8군사령관 테일러는 ‘민간 지도자를 구금하고 잠정적인 유엔하의 군정’을 선포하는 ‘에버레디 계획’을 작성했고 수차에 걸쳐 수정하는 등 1950년대 들어 미국은 이승만에 대한 대안을 끊임없이 물색했다고 밝혔다.
결국 미국은 1958년 7월 조봉암의 사형집행을 계기로 이승만에 대한 정책을 바꾸는 분수령으로 삼는데, “4·19가 발생하자 이승만 정권과의 적절한 절연정책을 시도함으로써 한국내 반미감정의 확산을 막고, 미국에게 정합적인 정권을 세우려고 노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이 교수는 “젊은 날의 이승만은 미국을 상등국으로 보고 한국이 본받아야 할 나라로 보았기에 親美파이기 이전에 向美파”였으며, “미국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강대국을 상대하면서도 당당하게 대한민국의 국익을 지켜나갈 수 있었던 인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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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미래정책연구소 박범진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역사적 평가는 그를 물러나게 했던 4·19 혁명 하나의 잣대로만 평가해서는 안되며, 그의 독립운동 과정, 건국 과정, 국가건설 초기 단계에서의 갖가지 주요 업적을 종합적으로 균형있게 평가해야 한다.”며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독립한 140여 신생 독립국가 가운데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이룩한 나라로 손꼽히고 있고 그 이유는 국민들의 피땀어린 헌신과 함께 역대 대통령들의 탁월한 지도력 때문”이라고 말했다.(konas)
코나스 최경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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