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리 전투 참전 무공훈장 받은 박동하씨
단신 월남 이등병 참전..승전 거듭 용맹한 군인 변신..佛 무공훈장 2개..한국 육군, "기록없다" 인정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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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60년...중공군 첫 격파 지평리전투 |
봄바람이 세차게 불던 지난 18일 오전 한 노신사가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역 옆 프랑스군 전투전적비를 찾았다.
1951년 미 제2보병사단 13연대에 배속된 유엔군 프랑스 대대 병사들과 함께 이곳에서 중공군에 맞섰던 박동하(76)씨.
왼쪽 가슴에 올리브 가지 옆에 칼을 든 왼팔이 들어간 프랑스 대대 기장 모습의 배지를 단 그는 당시 자신이 지키던 참호가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소총 든 자세를 취했다.
그는 59년 전 피비린내 나는 전투 현장으로 돌아가 있었다.
◇초보 군인 '이등병'..."죽여야 내가 산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3월 13일 지평리에 프랑스 대대의 긴급 지원요청으로 차출된 국군 100명이 배속됐다.
대구 달성국민학교 10교육대 6중대에서 20일가량의 기본적인 훈련을 받은 이등병이 대부분이었고 고참병은 부상 치료후 보충대에 있던 서너명이 전부였다.
군번 '0184082'의 박동하씨도 이들과 함께 M1 소총을 들고 첫 전투를 기다렸다.
평안남도 순천에서 살다 전쟁이 나자 가족을 두고 친구와 함께 무작정 남쪽으로 피신했던 17살 소년 동하는 아직 전쟁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평리에는 미 제23연대가 프랑스 대대와 함께 미 포병대대의 지원을 받으며 중공군 4개 사단의 대대적인 공격에 맞서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여주에서 들어오는 길 쪽은 프랑스 1중대와 공병대가 맡았고 옆은 국군으로 구성된 2중대가, 다시 그 옆에는 프랑스군 3중대가 포진했다.
미군은 비교적 안전한 후방 산 쪽을 맡았다. 국군이 최전방에 선 것이다.
해가 넘어가고 어두워지자 아군 진지 맞은편 산에 있던 중공군들이 1차 공격을 감행해왔다. 꽹과리를 치고 나팔을 불어대면서 아군의 정신을 뒤흔들어놓았다.
박씨는 당시 상황을 "마치 커다란 파도가 몰아치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시커멓게 몰려드는 중공군을 향해 박격포가 먼저 날아갔다. 수백 명의 중공군이 나뒹굴었다.
이어 소총에서 뿜어져 나오는 총탄이 중공군을 향해 소나기처럼 퍼부어졌다.
그러나 시체 위를 넘어 끊임없이 중공군이 내려왔다. 박 이병은 소총 방아쇠를 쉴 새 없이 당겼다. 참호 바로 3m 앞에서 중공군이 쓰러졌다.
'이게 전쟁이구나, 무섭다'고 생각할 틈도 없었다.
'적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생각뿐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니까 '엄청 위험한 상황이었구나'라고 생각되지 그때는 몰랐지. 상대방을 사살해야 내가 살 수 있었으니까"
한번 물러간 중공군은 그날 새벽 다시 공격해왔다. 그러나 연합군과 국군은 막강한 화력으로 두번 모두 잘 물리쳤다.
다음날 아침. 참호 앞 논바닥에 쓰러져 있는 중공군 시체 30여구가 보였다.
미처 수습해 가지 못한 시체였다.
중공군은 꼭 밤에 공격해왔다. 모두 같은 방식이었다. 꽹과리와 나팔을 불어대며 아군보다 10배 가까이 많은 병력으로 '인해전술'을 폈다.
치열한 전투는 사흘동안 계속됐다. 아군의 방어력이 한계에 다다랐을 무렵인 15일 연합군 기병연대 등 지원군이 지평리에 도착하자 사기가 꺾인 중공군이 슬그머니 철수했다.
그렇게 박 이병은 첫 전투에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싸워서 승리하는 법과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10차례 전투 치르며 '용맹한 국군'으로 변신
지평리 전투를 끝낸 박동하 이등병은 충북 제천으로 내려갔다.
잠시 숨을 돌리고 소총도 정비하면서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얼마 후 그는 평창지구 전투에 참가한 뒤 5월 15,16일 이틀간 홍천 가리산에서 중공군과 북한군에 맞서 전투를 벌였다.
가리산 전투는 미 제10군단이 중공군을 저지, 전세를 역전시켜 유엔군이 반격에 나서게 된 전투. 6.25당시 최고 격전지 중의 하나다.
이어 강원도 양구 '단장의 능선' 전투에 참가해 931고지를 제일 먼저 점령하기도 했다.
중요한 전투마다 참가해 승리에 이바지한 박씨는 공로를 인정받아 하사까지 진급했다. 한국 파병 유엔군 프랑스 대대 사령관 제르미니 중령은 1953년 1월 28일 그에게 해외전투 동성 훈장을 수여했다.
초보 군인으로 지평리 전투에 참전했던 박씨는 용맹한 국군으로 변신, 동부와 서부전선을 오가며 종전이 될 때까지 10차례 넘게 치열한 전투에 참여했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24사단 병참대대에서 근무하다 1955년 제대했다.
◇"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군"
제대한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족과 친척들이 모두 평안남도에 남아있어 전장을 함께 누볐던 프랑스군 친구들과 전우가 전부였다.
먹고 살기 위해 막노동 등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제과공장에 취직해 일을 배우고 나서 직접 제과공장을 차렸지만 아는 사람에게 사기를 당해 공장을 접었다.
제대한지 3년만에 강원도 춘천 출신의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이후 서울의 한 제철회사에 취직, 영업부장까지 올랐다가 지금의 서울 광진구 능동지역에 세를 얻어 철강회사를 차렸다.
성실함과 북한 출신 특유의 강한 생활력으로 한때는 98명까지 직원을 두기도 했지만, 사회는 그리 녹록지 않았다.
어려웠던 자신의 삶을 생각해 비슷한 처지인 사람을 도와주다 연거푸 사기를 당했다.
그래도 아들 둘, 딸 둘을 잘 키워 결혼시킨 그는 15년 전 사업을 정리한 뒤 지금의 강원도 홍천 집에서 아내와 생활하고 있다.
그는 가끔 군부대의 요청으로 안보교육 강사로 나서 젊은 국군 후배들에게 한국전쟁의 참상과 대한민국 국군으로서의 자부심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최근에는 1951년 10월 10일 여단훈장, 1952년 12월 12일 연대훈장 등 두 차례에 걸쳐 프랑스로부터 받은 무공훈장을 한국정부로부터 인정받으려고 애쓰고 있다.
주한프랑스대사관 국방무관 알랭 나스 대령이 2007년 2월 7일 박씨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한 사실을 증명하는 서류를 보내왔다.
그렇지만 육군에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아직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박씨가 한국 육군으로부터 훈장을 인정받으려는 것은, 그래야만 자랑스러운 국군으로서 프랑스군과 함께 나라를 지키고자 젊음을 바친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는 "요즘 젊은 사람은 공산주의가 어떤 건지 몰라, 가장 무서운 건데 말이야"라면서 "내가 공산주의에 맞서 싸워 나라를 지키고 살아남은 국군이라는 게 너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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