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핵 개발 프로그램 후원자는 칸 박사였다'
Written by. 코나스
입력 : 2004-02-05 오후 3:24:51
'이슬람 폭탄'제조한 칸 박사의 '지하드'와 핵확산
압둘 카디르 칸(Abdul Qadeer Khan: 68) 박사. (사진 : 1998년 5월 28일 파키스탄 차가이 지하 핵실험장에서 칸 박사가 핵 폭탄 장착에 앞서 긴장된 모습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파키스탄 국민의 영웅인가, 죽음의 과학자인가. 파키스탄의 핵 폭탄을 개발한 칸 박사는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 같은 인물이다. 파기스탄 어린이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십중팔구 칸 박사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다. 그의 이름을 딴 병원이 숱하게 있으며, 심지어 그가 개발한 핵 폭탄을 '이슬람 폭탄'(Islamic Bomb)이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하지만 미국은 그를 '핵 확산의 대부'(The Godfather of Nuclear Proliferation) 라는 호칭으로 부른다. 《LA 타임스》는 '악의 축 뒤의 악' (The Evil Behind the Axis)이라는 제목의 1면 톱기사(2003년 1월 5일자)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악의 축'이라고 지목한 북한, 이란, 이라크 등 3개국 뒤에는 칸 박사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이처럼 두 얼굴을 가진 칸 박사는 과연 어떤 인물이며, 파키스탄의 핵 개발은 어떤 방법으로 해왔고, 북한과 이란 등의 핵 개발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본다.
◇칸 박사는 돈과 권력, 명예를 사랑한 민족주의자
(사진 :파키스탄 최초의 핵 실험에 앞서 칸 박사와 동료 과학자들 및 군 관계자 등이 기념 촬영한 모습) 1998년 5월 28일 파키스탄은 최초로 핵 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다음 날 아침 칸 박사는 눈을 뜨자마자 평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숲에 들어가 원숭이들에게 땅콩을 먹이로 주었다. 그는 자신은 평화주의자이며 시와 꽃과 동물을 사랑한다고 말해왔다. 그는 파키스탄의 영자지 《The News》와의 인터뷰에서 '파키스탄은 핵실험을 함으로써 남아시아에서 억지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됐으며 인도의 위협에 반격할 수 있다'고 밝혔다.(1998년 5월 30일자 보도) 그는 오만의 《The Times of Oman》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핵무기를 평화의 무기라고 생각한다'면서 '파키스탄의 핵 프로그램은 협박과 위협에 굴복하지 않는 가난한 개발 도상국가의 의지와 저항을 상징한다'고 밝혔다.(인도 PTI 통신 2002년 8월 25일 보도)
이처럼 그는 핵 개발 프로그램에 대한 강한 집착과 사명감, 자부심을 보여왔다. 그의 신념은 어렸을 때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36년 인도 보팔에서 태어났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종교문제로 분리되자 무슬림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파키스탄으로 이주했다. 교사였던 아버지의 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던 그는 1960년 카라치대학 공대를 졸업했다. 파키스탄 정부의 과학자 양성계획에 따라 유럽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독일 베를린 공대에서 잠시 수학했으며 1967년 네덜란드 델프트 공대에서 야금학과를 졸업했다. 벨기에로 건너가 1972년 로이벤 가톨릭 대학에서 야금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물리동력학연구소(FDO) 연구원으로 취직했다. 이 연구소는 영국, 네덜란드, 독일이 발전용 원자로의 연료를 자체 생산하기 위해 세운 우라늄농축컨소시움(URENCO)의 네덜란드측 파트너 UCN로부터 하청을 받았다. URENCO는 당시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 폭탄과 같은 수준의 농축우라늄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는 FDO에서 신임을 얻어 핵무기 제조에 필수인 원심분리기 제조 기술을 독일어에서 네덜란드어로 번역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보안이 철저했던 UCN을 자유자재로 출입하면서 일급비밀 서류를 열람했다. UCN은 1974년 그에게 당시로는 최첨단 우라늄 농축 기술로 제조된 독일제 G-1과 G-2 원심분리장치의 설계도를 번역하는 일을 맡겼다.
그러던 중 인도가 1974년 5월 18일 핵 폭탄 실험에, 첫 성공하는 개가를 올렸다. 1972년부터 역시 핵 폭탄 개발을 추진해오던 파키스탄은 인도의 핵 폭탄 실험에 엄청난 위협을 느꼈다. 줄피카르 알리 부토 당시 파키스탄 총리는 인도 보다 더욱 강력한 핵 프로그램을 개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네덜란드에서 인도의 핵실험 소식을 접한 칸은 부토 총리에게 국가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도 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1975년 휴가차 파키스탄으로 돌아온 칸은 부토 총리를 만났다. 총리 집무실에서 부토 총리는 그에게 고국으로 귀환해 핵 개발 프로그램을 추진해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동의를 받아낸 부토 총리는 책상을 치며 인도를 짓밟아 버리겠다고 맹세하기도 했다. 그는 1976년 1월 남아공 출신이지만 영국 국적인 아내 헤니와 함께 몰래 네덜란드를 떠나 파키스탄으로 돌아왔다. 헤니는 당시 이웃들에게 남편이 갑자기 아파서 휴가를 떠난다는 거짓 편지를 쓰기도 했다. 칸은 그 해 3월 파키스탄에서 네덜란드 FDO에 사직서를 보냈다. 칸은 1974년부터 비밀 서류를 몰래 베끼는 등 원심분리기의 설계도를 비롯해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기술을 모두 복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네덜란드 검찰은 그를 핵무기 제조기술을 훔쳐갔다는 혐의로 기소했으며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은 1983년 1월 궐석 재판으로 4년형을 선고했다. 항소법원은 2년 후 칸이 소환장을 받지 못했다면서 항고하자 법 절차가 잘못됐다는 이유로 판결을 번복했다. 네덜란드 검찰은 새롭게 소환장을 발부하는 등 재판을 다시 할 수 있었으나 기소를 포기하고 말았다.
부토 총리(사진)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은 그는 무니르 아흐마드 칸 박사가 위원장이었던 파키스탄 원자력위원회(PAEC)에서 일했다.
PAEC는 이슬라마바드 인근 시하라에 소형 원심분리 프로젝트 시설을 세웠다. 그는 그러나 칸 위원장과 심한 알력을 보였다. 부토 총리는 1976년 7월 그에게 우라늄 농축 프로젝트에 대한 전권을 부여하고 총리에게만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시하라 인근 카후타에 공학연구실험실(ERL)을 세웠다. 카후타 연구소라고 불렸던 이곳에서 그는 1978년 4월 처음으로 농축 우라늄 제조에 성공했다. 그는 1979년부터 본격적으로 이 시설을 가동시켰으며 1981년 상당량의 농축 우라늄을 제조했다. 지아 울 하크 당시 대통령은 그의 이 같은 업적을 기리는 뜻으로 이 곳을 '칸 연구소'(KRL)로 명명했다.
칸 박사는 이 연구소의 시설을 설치하는데 미국은 물론 유럽 각 국에서 부품들을 몰래 들여왔다. 그의 비밀 거래 노하우는 이 때부터 시작됐다. 미국과 유럽 각국 정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그는 외국에 유령회사를 세워 이를 통해 부품과 장비 등을 밀반입하기도 했다. 훔친 기술과 밀반입된 장비를 이용해 핵 폭탄을 제조한 것이다. 그는 그러나 파키스탄의 고농축 우라늄 핵 프로그램은 독창적인 것이며 부품과 장비는 직접 개발해 제조한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하버드대의 핵 전문가 매튜 번 박사는 '칸 박사는 매우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라며 '그는 전 세계가 파키스탄이 훔친 설계도로 원심분리장치를 제작했다고 믿지 않기를 원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파키스탄의 칸 연구소가 핵 확산의 주범
칸 박사는 1998년 파키스탄이 최초의 핵실험을 하기 수 년 전부터 국제 학술지를 통해 서방에서는 비밀로 분류됐을 우라늄 원심분리기 제조 및 실험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열렬한 민족주의자인 칸 박사는 합법적인 핵기술 보유를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등 기존의 5대 핵보유국만으로 제한하면서 이스라엘의 핵무기에 대해서는 묵인하는 태도를 보여온 핵 비확산 정책에 공공연히 불만을 제기해왔다. (《뉴욕 타임스》 2004년 1월 4일자 보도)그는 1987년 한 논문에서 이른바 '비밀'이라는 구름을 뚫기를 희망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987년과 88년 논문을 통해 1세대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알루미늄 회전자의 기술을 넘어서는 마레이징강 원심분리기 기술을 세부적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칸 연구소 연구원들은 1991년에는 초고속으로 회전하는 원심 분리기의 윤활제가 원활히 흘러가도록 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원심기 바닥 베어링의 홈파기 기술을 세부적으로 묘사한 논문을 펴내기도 했다. 칸 연구소는 심지어 세일즈 안내 책자를 발간하기도 했다.
(사진:핵 기술과 장비를 판매한다는 내용의 칸 연구소의 안내 책자) 파키스탄 정부는 2000년 자체적으로 가스 원심분리기와 그 부품들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핵 장비들의 수출절차에 관한 광고를 냈다. 이 광고에는 이들 장비중 상당수가 핵무기 프로그램에 유용할 것이라는 내용도 포함됐다.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무부 핵 비확산 담당 차관보를 지낸 로버트 아인혼 국제전략연구소 선임 연구원은 '국제사회가 핵확산 1급 수배자 명단을 만든다면 칸 박사가 최우선 지명수배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CIA가 파키스탄이 1984년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고농축 우라늄을 개발하는데 완전 성공했다고 결론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은 파키스탄에 40억 달러를 지원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을 견제하기 위해 아프간 반군인 무자헤딘을 파키스탄이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미국은 파키스탄을 제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파키스탄 정부는 현재 연금 상태에 있는 칸 박사를 조사, 핵 확산에 대한 자백서를 받아냈다. 파키스탄 정부의 고위 관리는 칸 박사가 핵 기술을 확산시킨 이유에 대해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파키스탄에 대한 서방의 관심이 줄어들 것이며, 이슬람의 대의명분을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고 밝혔다.(《뉴욕 타임스》 2004년 2월 4일자 보도)
칸 박사는 1998년 핵 폭탄 실험에 성공하자 공식적으로 '국민의 영웅'이 됐다. 하지만 이전부터 그는 외국을 정부의 허락 없이 여행했다. 그는 약 40여 차례에 걸쳐 각 국을 비밀리 여행했으며 북한에도 최소한 13차례 방문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는 1990년대부터 이슬라마바드 파이잘 사원 인근 마르갈라 언덕에 있는 고급 주택가의 대저택에서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살아왔다. 그의 집 앞에는 경비 초소들이 있으며 도로에는 안전 블록이 설치돼 있기도 하다. 그가 칸 연구소에서 출퇴근할 때면 경호 차량들이 사이렌을 울리고 경호등을 켠 채 항상 호위했다. 수 십억 달러의 예산을 재량대로 사용했던 그는 2001년 칸 연구소 소장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그는 종교적 근본주의자는 아니지만 하루 5번씩 기도를 올리는 착실한 무슬림이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히잡도 하지 않을 만큼 자유분방한 생활을 해왔다.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학교, 병원, 크리켓팀까지 있을 정도인 그는 칸 연구소를 자신만의 요새이자 무역회사로 만들었다. 칸 연구소가 핵무기 보유 희망국들과 전 세계의 핵 중개상 네트워크를 상대로 비밀리에 핵기술을 판매해온 것이다.
◇북한과의 거래는 1993년부터 시작됐다
칸 박사는 1993년 12월 베나지르 부토 당시 총리(줄피카르 알리 부토의 딸)가 북한을 방문하기 며칠 전 총리 집무실을 방문했다. 칸 박사는 부토 총리에게 북한에 가서 김정일을 만나면 북한이 파키스탄의 핵 프로그램을 지원해 부탁하라는 말을 하라고 요청했다. 칸 박사는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의 설계도가 필요하다고 부토 총리에게 설명했다. 당시 파키스탄은 핵 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의 운반체제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부토는 칸 박사를 도와주면 군부가 정부에 대한 간섭을 줄일 것이라고 생각해 칸 박사의 요청에 동의했다. (《LA 타임스》 2004년 2월 4일자 보도)
부토 총리는 당시 북한 방문중 김정일이 주최한 국빈 만찬에서 '각 나라는 경제,사회 발전에 맞는 평화적인 목적의 핵기술을 획득하고 개발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뉴욕 타임스》2002년 11월 24일자 보도) 부토 총리는 미사일 설계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는 컴퓨터 디스켓들을 갖고 평양에서 파키스탄으로 돌아왔다. 부토 총리는 핵 기술과 미사일을 교환했다는 것을 부인하고 있다. 부토 총리는 당시 미사일을 돈을 주고 들여왔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미국은 당시 파키스탄이 외화가 고갈된 상태였기 때문에 돈을 지불할 수 없었다고 보고 있다. 파키스탄은 북한의 노동미사일 기술을 수입, 이를 연구한 끝에 1998년 4월 노동미사일을 변형시킨 '가우리'의 시험 발사를 성공시켰다.
북한의 핵 개발 계획은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로 중단됐으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3년도 못돼 제네바 합의에 흥미를 점점 잃었으며 경수로가 결코 완공되지 못할 것을 우려했다. 북한은 핵무기가 없으면 결국 남한의 경제력에 흡수되거나 미국의 군사력에 압도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 위원장은 1997년 또는 1998년께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았다. 그 대안은 개발과정이 느리고 어렵지만 비교적 은폐하기 쉬운 고농축 우라늄으로 핵무기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 《뉴욕 타임스》는 북한과 파키스탄이 미사일과 핵무기 기술을 교환하는 등 오랫동안 군사적으로 협조해 왔다고 보도했다.(2002년 11월 24일자) 이 신문에 따르면 미국 정보 기관은 북한이 파키스탄에 인도의 전략 요충지를 공격할 수 있는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미사일 부품을 제공한 반면 파키스탄은 북한에 다수의 가스원심분리기 디자인과 고농축우라늄 추출에 필요한 많은 장비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일본 《도쿄(東京)신문》도 북한의 새로운 핵 개발은 늦어도 1997년부터 시작됐으며, 우라늄 농축에 필수적인 원심분리기는 파키스탄 등으로부터 1,000대 이상 조달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2002년 10월 21일자)《USA 투데이》도 북한이 우라늄을 무기급으로 농축할 수 있는 가스원심분리기를 만들기 위한 장비를 구입했다는 증거가 있으나 북한이 이 장비를 활용해 고농축시설을 완성했는지는 불명확하다고 밝혔다.(2002년 10월 18일자 보도)
CIA는 2003년 4월 10일 의회에 제출한 '2002년 상반기 대량살상무기 보고서'에서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핵 개발 프로그램과 관련, 북한이 연간 2개 이상의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우라늄 농축 공장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북한이 수년간 우라늄 농축작업을 해온 것으로 의심된다고 지적했다. CIA는 북한은 2005년께 농축 우라늄을 대량 생산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고농축 우라늄 핵 개발 프로그램과 관련, 칸 박사가 북한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밝혀진 것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다. 미국 정보 기관들도 칸 박사의 방북 목적을 알아 내지 못하고 있다. 칸 박사의 방북 시기도 1997년 이후부터라는 애매한 것이며 방북 횟수도 최소 13차례라는 것 밖에 알려진 것이 없다. 미국 몬테레이 국제연구소(MIIS) 핵비확산연구센터의 과라브 캄파니 연구원은 '칸 박사가 북한에 최소 13번 방문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이상일 수도 있다'고 밝혔으나 더 이상의 정보는 없다. 북한 과학자들이 파키스탄이 핵실험을 실시할 때 참관했다는 설도 있으며 다수의 북한 과학자들이 칸 연구소에서 기술 훈련을 받았다는 보도도 있으나 정확하게 확인된 사실은 아직까지 없다. 파키스탄과 북한의 거래가 언제 단절됐는지도 불확실하다.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 핵 프로그램을 개발하려는 이유는
플루토늄 재처리를 통해 핵 개발을 시도해 왔던 북한이 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핵 개발 프로그램을 추진한 까닭은 무엇일까. 영국 군사 잡지 《제인스 인텔리전스 리뷰》의 군사전문가 조셉 버뮤데즈는 '핵 보유국들은 모두 플루토늄과 우라늄 등 2개의 방식으로 핵무기를 개발해왔다'면서 '북한이 두 가지 방식을 전부 추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말했다. 북한도 핵 보유국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은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무기 개발에 제한을 받아야 했었다. 무엇보다 북한이 플루토늄 핵 프로그램을 추진하려면 핵 재처리 시설이 필요한데 기존 재처리 시설은 1994년 북미 제네바 핵 합의에 따라 24시간 감시당하고 있어 가동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또 미국의 첩보 위성이 북한 상공에서 철저한 감시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핵 재처리 시설을 새롭게 만드는 것도 어렵다. 고농축 우라늄 핵폭탄은 원자로나 핵 재처리 시설 없이 고농축 시설만 있으면 제조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북한의 평안남도 성천군이나 황해북도 서흥군에는 천연 우라늄 광산이 있기 때문에 고농축 기술만 있으면 핵무기 개발이 가능하다. 북한의 우라늄 매장량은 약 2600만 톤이며 이중 가채량은 약 400만 톤이다. 황북 평산과 박천에 각각 정련소도 있다. 천연우라늄에는 핵 원료로 사용할 수 없는 '우라늄'이 대부분(99.3%)이어서 핵으로 활용키 위해서는 '우라늄'(0.7%)의 비율을 20%까지 높여야 한다. 이 농축 우라늄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가스원심분리 등 8개의 방법이 있는데 북한은 이중 파키스탄이 사용한 가스원심분리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우라늄 농축 기술은 핵 확산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기술이전이 금지되어 있다. 현재 우라늄 농축시설 보유국은 15개국인데 이들 국가 중 파키스탄이 북한을 지원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상대였다. 미국의 군사전문가 헨리 소콜스키는 '핵폭탄을 보유한 파키스탄은 북한의 미사일이 필요했지만 자금이 없었다. 미사일을 보유한 북한은 핵 폭탄을 갖기를 원했다'면서 자연스럽게 핵과 미사일의 교환이 이루어졌다고 추론했다.
북한은 이미 노출되어 있는 플루토늄 핵 폭탄 대신 비밀 병기가 필요했고 이를 보유한 파키스탄과 거래가 성사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이 같은 교환이 가능했던 것은 기술적인 문제도 있었다. 우라늄 핵폭탄은 U235의 순도가 90% 이상인 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것으로 미국이 1945년 히로시마에 처음으로 투하한 것과 같은 타입이다. 핵 폭탄을 만들려면 우라늄 15~25㎏이 필요하다. 핵 물질이 플루토늄보다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폭탄의 크기가 커져 탄도미사일 탑재가 어렵다. 미사일 탑재를 위해서는 탄두를 1톤으로 줄여야 하며 고도의 기술력이 요구된다. 파키스탄은 장거리 미사일에 핵 폭탄을 탑재하기를 희망했고, 장거리 미사일의 노하우를 갖고 있는 북한은 이를 제공한 것이다. 꿩 먹고 알 먹는 셈이다.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제공 : 엎코리아)
◇칸 박사는 돈과 권력, 명예를 사랑한 민족주의자
(사진 :파키스탄 최초의 핵 실험에 앞서 칸 박사와 동료 과학자들 및 군 관계자 등이 기념 촬영한 모습) 1998년 5월 28일 파키스탄은 최초로 핵 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다음 날 아침 칸 박사는 눈을 뜨자마자 평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숲에 들어가 원숭이들에게 땅콩을 먹이로 주었다. 그는 자신은 평화주의자이며 시와 꽃과 동물을 사랑한다고 말해왔다. 그는 파키스탄의 영자지 《The News》와의 인터뷰에서 '파키스탄은 핵실험을 함으로써 남아시아에서 억지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됐으며 인도의 위협에 반격할 수 있다'고 밝혔다.(1998년 5월 30일자 보도) 그는 오만의 《The Times of Oman》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핵무기를 평화의 무기라고 생각한다'면서 '파키스탄의 핵 프로그램은 협박과 위협에 굴복하지 않는 가난한 개발 도상국가의 의지와 저항을 상징한다'고 밝혔다.(인도 PTI 통신 2002년 8월 25일 보도) 이처럼 그는 핵 개발 프로그램에 대한 강한 집착과 사명감, 자부심을 보여왔다. 그의 신념은 어렸을 때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36년 인도 보팔에서 태어났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종교문제로 분리되자 무슬림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파키스탄으로 이주했다. 교사였던 아버지의 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던 그는 1960년 카라치대학 공대를 졸업했다. 파키스탄 정부의 과학자 양성계획에 따라 유럽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독일 베를린 공대에서 잠시 수학했으며 1967년 네덜란드 델프트 공대에서 야금학과를 졸업했다. 벨기에로 건너가 1972년 로이벤 가톨릭 대학에서 야금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물리동력학연구소(FDO) 연구원으로 취직했다. 이 연구소는 영국, 네덜란드, 독일이 발전용 원자로의 연료를 자체 생산하기 위해 세운 우라늄농축컨소시움(URENCO)의 네덜란드측 파트너 UCN로부터 하청을 받았다. URENCO는 당시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 폭탄과 같은 수준의 농축우라늄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는 FDO에서 신임을 얻어 핵무기 제조에 필수인 원심분리기 제조 기술을 독일어에서 네덜란드어로 번역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보안이 철저했던 UCN을 자유자재로 출입하면서 일급비밀 서류를 열람했다. UCN은 1974년 그에게 당시로는 최첨단 우라늄 농축 기술로 제조된 독일제 G-1과 G-2 원심분리장치의 설계도를 번역하는 일을 맡겼다.
그러던 중 인도가 1974년 5월 18일 핵 폭탄 실험에, 첫 성공하는 개가를 올렸다. 1972년부터 역시 핵 폭탄 개발을 추진해오던 파키스탄은 인도의 핵 폭탄 실험에 엄청난 위협을 느꼈다. 줄피카르 알리 부토 당시 파키스탄 총리는 인도 보다 더욱 강력한 핵 프로그램을 개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네덜란드에서 인도의 핵실험 소식을 접한 칸은 부토 총리에게 국가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도 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1975년 휴가차 파키스탄으로 돌아온 칸은 부토 총리를 만났다. 총리 집무실에서 부토 총리는 그에게 고국으로 귀환해 핵 개발 프로그램을 추진해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동의를 받아낸 부토 총리는 책상을 치며 인도를 짓밟아 버리겠다고 맹세하기도 했다. 그는 1976년 1월 남아공 출신이지만 영국 국적인 아내 헤니와 함께 몰래 네덜란드를 떠나 파키스탄으로 돌아왔다. 헤니는 당시 이웃들에게 남편이 갑자기 아파서 휴가를 떠난다는 거짓 편지를 쓰기도 했다. 칸은 그 해 3월 파키스탄에서 네덜란드 FDO에 사직서를 보냈다. 칸은 1974년부터 비밀 서류를 몰래 베끼는 등 원심분리기의 설계도를 비롯해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기술을 모두 복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네덜란드 검찰은 그를 핵무기 제조기술을 훔쳐갔다는 혐의로 기소했으며 암스테르담 지방법원은 1983년 1월 궐석 재판으로 4년형을 선고했다. 항소법원은 2년 후 칸이 소환장을 받지 못했다면서 항고하자 법 절차가 잘못됐다는 이유로 판결을 번복했다. 네덜란드 검찰은 새롭게 소환장을 발부하는 등 재판을 다시 할 수 있었으나 기소를 포기하고 말았다.
부토 총리(사진)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은 그는 무니르 아흐마드 칸 박사가 위원장이었던 파키스탄 원자력위원회(PAEC)에서 일했다.
PAEC는 이슬라마바드 인근 시하라에 소형 원심분리 프로젝트 시설을 세웠다. 그는 그러나 칸 위원장과 심한 알력을 보였다. 부토 총리는 1976년 7월 그에게 우라늄 농축 프로젝트에 대한 전권을 부여하고 총리에게만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시하라 인근 카후타에 공학연구실험실(ERL)을 세웠다. 카후타 연구소라고 불렸던 이곳에서 그는 1978년 4월 처음으로 농축 우라늄 제조에 성공했다. 그는 1979년부터 본격적으로 이 시설을 가동시켰으며 1981년 상당량의 농축 우라늄을 제조했다. 지아 울 하크 당시 대통령은 그의 이 같은 업적을 기리는 뜻으로 이 곳을 '칸 연구소'(KRL)로 명명했다. 칸 박사는 이 연구소의 시설을 설치하는데 미국은 물론 유럽 각 국에서 부품들을 몰래 들여왔다. 그의 비밀 거래 노하우는 이 때부터 시작됐다. 미국과 유럽 각국 정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그는 외국에 유령회사를 세워 이를 통해 부품과 장비 등을 밀반입하기도 했다. 훔친 기술과 밀반입된 장비를 이용해 핵 폭탄을 제조한 것이다. 그는 그러나 파키스탄의 고농축 우라늄 핵 프로그램은 독창적인 것이며 부품과 장비는 직접 개발해 제조한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하버드대의 핵 전문가 매튜 번 박사는 '칸 박사는 매우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라며 '그는 전 세계가 파키스탄이 훔친 설계도로 원심분리장치를 제작했다고 믿지 않기를 원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파키스탄의 칸 연구소가 핵 확산의 주범
칸 박사는 1998년 파키스탄이 최초의 핵실험을 하기 수 년 전부터 국제 학술지를 통해 서방에서는 비밀로 분류됐을 우라늄 원심분리기 제조 및 실험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열렬한 민족주의자인 칸 박사는 합법적인 핵기술 보유를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등 기존의 5대 핵보유국만으로 제한하면서 이스라엘의 핵무기에 대해서는 묵인하는 태도를 보여온 핵 비확산 정책에 공공연히 불만을 제기해왔다. (《뉴욕 타임스》 2004년 1월 4일자 보도)그는 1987년 한 논문에서 이른바 '비밀'이라는 구름을 뚫기를 희망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987년과 88년 논문을 통해 1세대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알루미늄 회전자의 기술을 넘어서는 마레이징강 원심분리기 기술을 세부적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칸 연구소 연구원들은 1991년에는 초고속으로 회전하는 원심 분리기의 윤활제가 원활히 흘러가도록 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원심기 바닥 베어링의 홈파기 기술을 세부적으로 묘사한 논문을 펴내기도 했다. 칸 연구소는 심지어 세일즈 안내 책자를 발간하기도 했다.
(사진:핵 기술과 장비를 판매한다는 내용의 칸 연구소의 안내 책자) 파키스탄 정부는 2000년 자체적으로 가스 원심분리기와 그 부품들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핵 장비들의 수출절차에 관한 광고를 냈다. 이 광고에는 이들 장비중 상당수가 핵무기 프로그램에 유용할 것이라는 내용도 포함됐다.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무부 핵 비확산 담당 차관보를 지낸 로버트 아인혼 국제전략연구소 선임 연구원은 '국제사회가 핵확산 1급 수배자 명단을 만든다면 칸 박사가 최우선 지명수배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CIA가 파키스탄이 1984년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고농축 우라늄을 개발하는데 완전 성공했다고 결론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은 파키스탄에 40억 달러를 지원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을 견제하기 위해 아프간 반군인 무자헤딘을 파키스탄이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미국은 파키스탄을 제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파키스탄 정부는 현재 연금 상태에 있는 칸 박사를 조사, 핵 확산에 대한 자백서를 받아냈다. 파키스탄 정부의 고위 관리는 칸 박사가 핵 기술을 확산시킨 이유에 대해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파키스탄에 대한 서방의 관심이 줄어들 것이며, 이슬람의 대의명분을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다고 밝혔다.(《뉴욕 타임스》 2004년 2월 4일자 보도)
칸 박사는 1998년 핵 폭탄 실험에 성공하자 공식적으로 '국민의 영웅'이 됐다. 하지만 이전부터 그는 외국을 정부의 허락 없이 여행했다. 그는 약 40여 차례에 걸쳐 각 국을 비밀리 여행했으며 북한에도 최소한 13차례 방문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는 1990년대부터 이슬라마바드 파이잘 사원 인근 마르갈라 언덕에 있는 고급 주택가의 대저택에서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살아왔다. 그의 집 앞에는 경비 초소들이 있으며 도로에는 안전 블록이 설치돼 있기도 하다. 그가 칸 연구소에서 출퇴근할 때면 경호 차량들이 사이렌을 울리고 경호등을 켠 채 항상 호위했다. 수 십억 달러의 예산을 재량대로 사용했던 그는 2001년 칸 연구소 소장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그는 종교적 근본주의자는 아니지만 하루 5번씩 기도를 올리는 착실한 무슬림이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히잡도 하지 않을 만큼 자유분방한 생활을 해왔다.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학교, 병원, 크리켓팀까지 있을 정도인 그는 칸 연구소를 자신만의 요새이자 무역회사로 만들었다. 칸 연구소가 핵무기 보유 희망국들과 전 세계의 핵 중개상 네트워크를 상대로 비밀리에 핵기술을 판매해온 것이다.
◇북한과의 거래는 1993년부터 시작됐다
칸 박사는 1993년 12월 베나지르 부토 당시 총리(줄피카르 알리 부토의 딸)가 북한을 방문하기 며칠 전 총리 집무실을 방문했다. 칸 박사는 부토 총리에게 북한에 가서 김정일을 만나면 북한이 파키스탄의 핵 프로그램을 지원해 부탁하라는 말을 하라고 요청했다. 칸 박사는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의 설계도가 필요하다고 부토 총리에게 설명했다. 당시 파키스탄은 핵 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의 운반체제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부토는 칸 박사를 도와주면 군부가 정부에 대한 간섭을 줄일 것이라고 생각해 칸 박사의 요청에 동의했다. (《LA 타임스》 2004년 2월 4일자 보도)
부토 총리는 당시 북한 방문중 김정일이 주최한 국빈 만찬에서 '각 나라는 경제,사회 발전에 맞는 평화적인 목적의 핵기술을 획득하고 개발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뉴욕 타임스》2002년 11월 24일자 보도) 부토 총리는 미사일 설계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는 컴퓨터 디스켓들을 갖고 평양에서 파키스탄으로 돌아왔다. 부토 총리는 핵 기술과 미사일을 교환했다는 것을 부인하고 있다. 부토 총리는 당시 미사일을 돈을 주고 들여왔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미국은 당시 파키스탄이 외화가 고갈된 상태였기 때문에 돈을 지불할 수 없었다고 보고 있다. 파키스탄은 북한의 노동미사일 기술을 수입, 이를 연구한 끝에 1998년 4월 노동미사일을 변형시킨 '가우리'의 시험 발사를 성공시켰다.
북한의 핵 개발 계획은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로 중단됐으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3년도 못돼 제네바 합의에 흥미를 점점 잃었으며 경수로가 결코 완공되지 못할 것을 우려했다. 북한은 핵무기가 없으면 결국 남한의 경제력에 흡수되거나 미국의 군사력에 압도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 위원장은 1997년 또는 1998년께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았다. 그 대안은 개발과정이 느리고 어렵지만 비교적 은폐하기 쉬운 고농축 우라늄으로 핵무기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 《뉴욕 타임스》는 북한과 파키스탄이 미사일과 핵무기 기술을 교환하는 등 오랫동안 군사적으로 협조해 왔다고 보도했다.(2002년 11월 24일자) 이 신문에 따르면 미국 정보 기관은 북한이 파키스탄에 인도의 전략 요충지를 공격할 수 있는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미사일 부품을 제공한 반면 파키스탄은 북한에 다수의 가스원심분리기 디자인과 고농축우라늄 추출에 필요한 많은 장비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일본 《도쿄(東京)신문》도 북한의 새로운 핵 개발은 늦어도 1997년부터 시작됐으며, 우라늄 농축에 필수적인 원심분리기는 파키스탄 등으로부터 1,000대 이상 조달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2002년 10월 21일자)《USA 투데이》도 북한이 우라늄을 무기급으로 농축할 수 있는 가스원심분리기를 만들기 위한 장비를 구입했다는 증거가 있으나 북한이 이 장비를 활용해 고농축시설을 완성했는지는 불명확하다고 밝혔다.(2002년 10월 18일자 보도)
CIA는 2003년 4월 10일 의회에 제출한 '2002년 상반기 대량살상무기 보고서'에서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핵 개발 프로그램과 관련, 북한이 연간 2개 이상의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우라늄 농축 공장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북한이 수년간 우라늄 농축작업을 해온 것으로 의심된다고 지적했다. CIA는 북한은 2005년께 농축 우라늄을 대량 생산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고농축 우라늄 핵 개발 프로그램과 관련, 칸 박사가 북한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밝혀진 것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다. 미국 정보 기관들도 칸 박사의 방북 목적을 알아 내지 못하고 있다. 칸 박사의 방북 시기도 1997년 이후부터라는 애매한 것이며 방북 횟수도 최소 13차례라는 것 밖에 알려진 것이 없다. 미국 몬테레이 국제연구소(MIIS) 핵비확산연구센터의 과라브 캄파니 연구원은 '칸 박사가 북한에 최소 13번 방문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이상일 수도 있다'고 밝혔으나 더 이상의 정보는 없다. 북한 과학자들이 파키스탄이 핵실험을 실시할 때 참관했다는 설도 있으며 다수의 북한 과학자들이 칸 연구소에서 기술 훈련을 받았다는 보도도 있으나 정확하게 확인된 사실은 아직까지 없다. 파키스탄과 북한의 거래가 언제 단절됐는지도 불확실하다.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 핵 프로그램을 개발하려는 이유는
플루토늄 재처리를 통해 핵 개발을 시도해 왔던 북한이 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핵 개발 프로그램을 추진한 까닭은 무엇일까. 영국 군사 잡지 《제인스 인텔리전스 리뷰》의 군사전문가 조셉 버뮤데즈는 '핵 보유국들은 모두 플루토늄과 우라늄 등 2개의 방식으로 핵무기를 개발해왔다'면서 '북한이 두 가지 방식을 전부 추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말했다. 북한도 핵 보유국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은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무기 개발에 제한을 받아야 했었다. 무엇보다 북한이 플루토늄 핵 프로그램을 추진하려면 핵 재처리 시설이 필요한데 기존 재처리 시설은 1994년 북미 제네바 핵 합의에 따라 24시간 감시당하고 있어 가동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또 미국의 첩보 위성이 북한 상공에서 철저한 감시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핵 재처리 시설을 새롭게 만드는 것도 어렵다. 고농축 우라늄 핵폭탄은 원자로나 핵 재처리 시설 없이 고농축 시설만 있으면 제조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북한의 평안남도 성천군이나 황해북도 서흥군에는 천연 우라늄 광산이 있기 때문에 고농축 기술만 있으면 핵무기 개발이 가능하다. 북한의 우라늄 매장량은 약 2600만 톤이며 이중 가채량은 약 400만 톤이다. 황북 평산과 박천에 각각 정련소도 있다. 천연우라늄에는 핵 원료로 사용할 수 없는 '우라늄'이 대부분(99.3%)이어서 핵으로 활용키 위해서는 '우라늄'(0.7%)의 비율을 20%까지 높여야 한다. 이 농축 우라늄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가스원심분리 등 8개의 방법이 있는데 북한은 이중 파키스탄이 사용한 가스원심분리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우라늄 농축 기술은 핵 확산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기술이전이 금지되어 있다. 현재 우라늄 농축시설 보유국은 15개국인데 이들 국가 중 파키스탄이 북한을 지원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상대였다. 미국의 군사전문가 헨리 소콜스키는 '핵폭탄을 보유한 파키스탄은 북한의 미사일이 필요했지만 자금이 없었다. 미사일을 보유한 북한은 핵 폭탄을 갖기를 원했다'면서 자연스럽게 핵과 미사일의 교환이 이루어졌다고 추론했다.
북한은 이미 노출되어 있는 플루토늄 핵 폭탄 대신 비밀 병기가 필요했고 이를 보유한 파키스탄과 거래가 성사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이 같은 교환이 가능했던 것은 기술적인 문제도 있었다. 우라늄 핵폭탄은 U235의 순도가 90% 이상인 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것으로 미국이 1945년 히로시마에 처음으로 투하한 것과 같은 타입이다. 핵 폭탄을 만들려면 우라늄 15~25㎏이 필요하다. 핵 물질이 플루토늄보다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폭탄의 크기가 커져 탄도미사일 탑재가 어렵다. 미사일 탑재를 위해서는 탄두를 1톤으로 줄여야 하며 고도의 기술력이 요구된다. 파키스탄은 장거리 미사일에 핵 폭탄을 탑재하기를 희망했고, 장거리 미사일의 노하우를 갖고 있는 북한은 이를 제공한 것이다. 꿩 먹고 알 먹는 셈이다.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제공 : 엎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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