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좌담>6.25전쟁 60주년의 의미와 국가안보
북, 여전히 남침야욕 … 포성은 멎었지만 도발은 멈추지 않았다

김종찬(맨 왼쪽) 국방일보 발행인의 사회로 진행된 6·25 특집 좌담회에서 백선엽(오른쪽 둘째) 예비역 육군대장, 김구섭(왼쪽 둘째) 한국국방연구원장, 홍두승(맨 오른쪽) 서울대 교수 등 참석자들이 6·25전쟁 60주년이 주는 의미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국방일보>
국방일보는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6·25전쟁의 역사적 의미와 교훈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좌담회를 마련했다.
●주제 : 6·25전쟁 60주년의 의미와 국가안보
●일시 : 6월 17일 오후 3시 ~4시 30분
●장소 : 전쟁기념관 4층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실
●좌담 참석자 :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 김구섭 한국국방연구원장, 홍두승 서울대 교수
●사회 : 김종찬 국방일보 발행인
사회 = 안녕하십니까. 국방일보 발행인 김종찬입니다. 민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이 발발한 지 올해로 60주년이 됐습니다. 얼마 전 북한이 저지른 천안함 피격 사건은 우리에게 6·25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이에 국방일보는 6·25전쟁의 역사적 의미와 교훈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6·25전쟁의 영웅이자 산증인이신 백선엽 장군님과 국내 최고의 국방·안보 싱크탱크인 한국국방연구원의 김구섭 원장님, 세계적 권위의 사회학자이시자 국방선진화위원회와 국가안보총괄점검회의에 참여하고 계신 홍두승 서울대 교수님을 모시고 ‘6·25 전쟁 60주년의 의미와 국가안보’를 주제로 좌담회를 마련했습니다. 국군 장병들과 국방일보 독자들을 위한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먼저 전쟁 전부터 사단장을 맏으셨고 전쟁 내내 한국군을 진두지휘하셨던 백선엽 장군님의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6·25전쟁 발발 60주년을 맞는 장군님의 소회를 부탁드립니다.
백선엽 장군 = 6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습니다. 말하자면 두 세대입니다. 지금도 휴전상태에 있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잠시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번에 북한이 뜻하지 않은 도발을 해 왔습니다. 천안함을 어뢰로 피격해 침몰시키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북한은 지난 60년간 수없이 도발을 해왔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청와대를 공격해 왔고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는 해외 순방 중인 대통령 일행을 노려 아웅산 테러를 저질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대한항공(KAL) 858기를 폭파했고 동해안에 잠수함을 침투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북한이 정전협정을 위반한 사례는 수없이 많았지만 우리 국민들은 쉽게 잊고 살고 있습니다. 60주년을 맞아 다시 한번 6·25가 주는 교훈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사회 = 젊은 병사들을 조사해 보면 6·25전쟁에 대해 정확히 모르는 것은 물론, 심지어 잘못된 정보를 갖고 있는 이들도 많은 것으로 나옵니다. 또 천안함 사태로 46명의 전우들이 희생당했고 국제사회가 참여한 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가 나왔는 데도 일부에서 의혹을 제기하는 모습은 이해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특히 이런 우리의 모습에서 북한이 군사적 목적 외에도 한국사회 내 갈등을 조장하려 한 목적까지 달성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우려스럽습니다. 6·25전쟁은 여러가지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족 간의 이념전쟁이었고 국내적으로는 총력전·전면전이었으며 국제적으로는 제한적인 전쟁이면서 많은 국가가 참전한 국제전이었습니다. 6·25전쟁이 갖는 역사적 의미에 대해 김구섭 원장님께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김구섭 원장 = 60년 전 우리는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으로 인해 형언하기 어려운 비극을 당해야 했습니다. 우리 군은 사상자 58만8000여 명, 실종 및 포로 3만3000여 명, 도합 62만1000여 명에 달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우리 정부는 2009년 4월 기준 약 560명의 국군포로가 북한에 생존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현재 적지에 생존해 있는 분들이 이 정도 숫자임을 감안할 때 6·25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임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비록 포성은 멎었지만 휴전 이후에도 북한은 끊임없는 대남 군사도발을 지속했고, 생화학 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를 생산하고 비축하며 핵실험을 감행하는 도발 행동을 계속했으며 급기야 지난 3월 26일에는 우리 해군 초계함 천안함을 침몰시켰습니다. 6·25전쟁 발발 60주년에 발생한 천안함 격침 사건은 한반도에서 남북 간 극한 대립이 끝나지 않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60년이 지나도 전쟁 당시의 극한 대립이 아직 해소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북한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현실입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사회 = 6·25전쟁은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동족 간 갈등은 심화됐고 경제적으로도 초토화됐습니다. 문화적으로는 이질감을 키웠습니다. 홍두승 교수님, 6·25전쟁이 남긴 사회적 유산과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홍두승 교수 =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십니다. 우선 6·25전쟁은 많은 인명과 재산상의 피해를 가져다 준 민족적으로 매우 불행한 사건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전쟁을 통해 그 이후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쟁의 복구와 빈곤으로부터의 탈출은 1950년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였습니다. 해방 직후 우리 사회에 만연했던 좌우 간 이념적 대립은 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약화됐으며 남한에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정착하게 된 것입니다. 이념적 혼란을 극복한 것은 1960년대 이후 추진된 고도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쟁을 통해 자유민주주의가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고귀한 가치라는 것을 터득하게 됐습니다. 남북 간 체제 경쟁에서도 우위를 점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많이 변했습니다. 우리 사회도 다원화·다변화돼 가고 있습니다. 하나의 획일적인 가치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다양한 가치를 조화시키면서 사회 갈등을 완화하고 사회 통합을 지향해 나가야 할 과제를 안게 됐습니다.
사회 = 6·25전쟁은 아직도 우리에게 어려운 과제를 남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백 장군님, 6·25전쟁 3년 동안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전투에 참여하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으시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백 장군 = 전쟁이 발발하던 날 아침부터 다부동 전투, 휴전협상까지 모든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중에서도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며칠이 기억에 남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전쟁이 시작됐죠. 그때 저는 1사단장이었는데 열흘쯤 전부터 시흥에 있는 보병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습니다. 휴일이어서 ‘아침에 일어나 시험공부를 해야지’ 생각하면서 전날 잠자리에 들었는데 수색에 있던 사단사령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북한군이 전면적으로 공격을 해 와 개성이 떨어졌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벌떡 일어나 육군본부로 가려고 나섰는데 마침 길거리에 미군 지프가 지나가는 걸 잡아 타고 육군본부에 갔습니다. 채병덕 참모총장이 나와 있더군요. 채 총장이 당장 부대로 가 보라고 해서 군사고문단으로 한국에 와 있던 락웰 중령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락웰 중령의 지프를 얻어 타고 부대에 복귀해 임진강 철교 근처에 갔는데 12연대 고문관이 맨발인 채로 지프를 타고 와서 겨우 개성을 빠져나왔는데 북한군이 열차를 타고 개성으로 들어왔다고 전하더군요. 바로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두 달 전쯤부터 인근 고등학생 등을 동원해 파 놓은 임진강변의 참호에서 나흘을 버텼습니다. 28일 오전쯤 미군 폭격기가 폭격을 시작했습니다. 이 폭격을 본 후 임진강가로 나와 지휘관회의를 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싸워야 하고 미군이 지원해 줄지도 모르니 행주나루터를 건너 시흥의 보병학교로 후퇴를 했습니다. 결국 수도 서울이 3일 만에 떨어졌죠. 이때가 가장 기억에 남고 다음은 다부동 전투가 기억에 남습니다. 정말 처절하게 전투를 했죠. 농민·학도병 등 그 당시 대구 일대에 모인 청년들을 보충해 교육시키면서 전투를 했습니다. 수류탄으로 육박을 해도 안 돼서 미군 2개 연대가 지원을 했고 처음으로 한미 양국이 협력해 적을 무찔렀습니다. 아직은 유엔군이 들어오지 못한 상황이었는데 이를 계기로 반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회 = 얼마 전 국군방송의 다큐멘터리에서 휴전회담장에 들어가는 장군님의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어떤 생각으로 회담에 임하셨습니까?
백 장군 = 1951년 4월 1군단장으로 갔는데 이종찬 참모총장에게 휴전회담에 참가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신고하려고 부산 경무대에 갔는데 이 대통령이 우리가 원하는 것은 북진통일이지 휴전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각하가 원하지 않는 휴전협정에 가지 않겠다고 했더니 미군과의 협조 문제도 있고 하니까 가야 한다고 했죠. 그렇게 휴전협상이 시작됐습니다.
사회 = 6·25전쟁과 천안함 사태는 모두 북한의 도발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외에도 많은 공통점이 있을 것 같은데요. 김 원장님, 공통점은 무엇이고 그것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김 원장 =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우리 사회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분열되고 이상주의적 정치적 수사가 만연한 가운데 나라를 지키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은 부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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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9 오후 2:17: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