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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훈 박사 "파독(派獨) 광부 경제발전의 견인차"

'파독 광부 47주년 기념 특별강연회'서 광부·간호사 파독 당시의 상황을 감동적으로 전해

Written by. 이현오   입력 : 2010-12-22 오후 1:3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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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년 전 제1진 247명의 한국 광부들이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독으로 향한 날이 1963년 12월21일이다. 그리고 서독으로 그들이 갈 수 있도록 징검다리 역할을 했던 장본인이 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이다.

 파독(派獨) 광부와 간호사들이 서독으로 간지 47년이 지난 2010년 12월21일 그 때 독일 행을 택했던 300여 명 광부들 앞에서 강연하는 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은 얼굴이 상기돼 보였다. 그의 얼굴뿐 아니라 강연을 이어가는 30여분 내내 그의 목소리에서도 벅찬 감회와 감격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을 가득 메운 참석자들 역시 마찬가지 모습이었다.

 ▲ ⓒkonas.net

 21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사)한국파독광부총연합회(회장 김태우)가 주최한『파독광부 최초 파독 47주년 기념 특별강연회』에 연사로 참석한 백영훈 원장은 우선 자신의 얘기부터 이어가기 시작했다.

 이승만 대통령 당시 최초로 독일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돼 서독에서 어렵게 공부를 계속해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던 시절과 이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이 케네디 미 대통령에게 경제원조를 요청했다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한국에는 경제지원을 하지 않는다"는 케네디 대통령의 거부로 인해 눈물겨운 과정을 겪다 이후 독일로부터 상업차관을 맺고 광부와 간호사가 독일로 가게 된 과정을 진솔하게 설명해 나갔다.

 "미국이 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면 동남아 모든 나라에 군사 쿠데타 도미노 현상이 일어난다고 해서 한국에 경제 원조를 끊고, 잉여 농산물 공급도 중단해 국가가 (경제적으로)풍전등화의 운명이었다.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중앙대학교에서 경제학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던 중 군(軍) 기피자로 몰려 논산훈련소에 끌려가 훈련병으로 훈련을 받다 다시 혁명정부에 불려가 남산 중앙정보부 벙커에 들어가니 김종필 부장이 맞이해 주더라"며 "그 때부터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고 그 당시를 돌이켰다.

 이어 "얼마 후 경제개발계획 수립을 위해 한국은행에서 한 조사부장이 가지고 온 자료를 보니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독립한 125개 국가 중 가장 최하위 빈곤 국가로 인도가 62달러, 그 위에 한국이 72달러, 그리고 북한이 바로 위 83달러였다"며 "그래서 돈을 빌릴 데 없는 혁명정부가 생각해 낸 게 같은 분단국가이자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서독을 생각하게 됐다"고 서독과 상업차관을 맺고 파독하게 된 배경을 소개했다.

 백 원장은 여기서 독일이 처음에는 차관을 주는데 난색을 표해 당시 자신이 수행해 모시던 당시 정래혁 상공부장관과 1주일 여를 독일에 머물며 에두하르 장관을 만나고자 했지만 만나주지 않아 유학 당시 은사를 만나 한국의 어려운 처지를 알리고 공관까지 찾아가며 몇 번을  부탁하다 드디어 3천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얻기 내기로 했다고 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이 차관을 얻기 위해서는 누군가 지급보증을 해주어야 했는데 어느 곳에서도 가난한 나라 한국에 지급보증을 하겠다는 곳이 없어 고민하고 있는데 독일 노동부의 한 과장이 찾아와 한국의 광부 5천명과 간호사 2천명을 독일로 파견하고 그를 통해 차관을 가져가면 어떠냐는 의견을 내 "5천명이 아니라 5만 명도 보낼 수 있다고 했다"며 그로 인해 숨통이 트이게 됐다고 말했다.

 해서 당시 신문에 5천명 광부를 모집하는 광고를 내자 며칠 새 4만8천명이 몰리고 이 중 선발된 인원을 장성 광업소에서 2주간에 걸쳐 철저하게 훈련하게 했다며, 이어 "12월21일 3년 계약으로 독일로 떠나던 날 김포공항은 부모 자식간 헤어지는 슬픔으로 눈물바다를 이루고 태극물결이 춤을 췄다"며 "독일로 간 우리 광부들은 참으로 고생 많이 했습니다. 40℃를 넘나드는 지하 1천 미터 막장에서 팬티 바람으로 채탄에 나섰고, 간호사들은 시체 닦는 일에서부터 온갖 허드렛일을 다했습니다. 눈물겨운 날의 연속이었습니다. 터키 등 유럽이나 일본 등지에서 온 광부, 간호사들은 견디지 못하고 다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우리 광부, 간호사들은 참고 또 참으며 견뎌냈습니다. 이구동성으로 아무런 문제없다고 했습니다. 전 독일사람의 감동을 자아냈습니다. 독일 텔레비전을 통해 새까만 얼굴에 눈만 빛나는 우리 광부들의 모습과 정성으로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독일사람들은 참으로 감동했습니다. "고 이들의 활약상을 전했다.

 그러면서 "1964년 12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국빈자격으로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고 본 공항에 도착했을 때와 길거리에서 태극기를 들고 환영한 사람들은 우리 교포들이 아니라 독일 국민들이었다"며 그 이유가 광부와 간호사가 독일 국민에게 보여준 성실성의 결과로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동력이었다고 말해 숙연함 속에서도 큰 박수가 계속 이어졌다.

 백 원장은 "그 역사의 눈물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며, 대통령 방문 당시의 감동적인 장면을 그대로 전하면서 "이제 조국의 역사 앞에서 잊혀진 1백년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 뒤 "독일 통일의 역사적 현장을 현지에서 지켜본 여러분들이 이제 대한민국 통일을 위한 통일기금 모으는데도 앞장서 줄 것을 당부 드린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날 백영훈 원장이 특별강연을 하는 동안 장내는 숙연하고 간간이 웃음도 퍼졌지만 곳곳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장면도 보였다.(konas)

코나스 이현오 기자(holeekv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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