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46주기 추모식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서, 영원한 국부(國父) 이승만 박사 ‘우국충정’ 넋 기려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대한민국 건국의 초석을 다진 우남 이승만 박사(1875년 3월 26일~1965년 7월 19일) 46주기 추모식이 19일 오전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회장 이기수) 주관으로 열렸다.
추모식은 박희태 국회의장과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박세환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 독립운동관련단체장 및 광복회원, 기념사업회원, 유족, 학생 및 시민 등 600여명이 참석했다.
국민의례를 시작으로 추모기도, 이승만 건국대통령 장례식 영상 상영, 국회의장·국가보훈처장·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의 추모사에 이어 분향 및 이인수 박사의 유족인사 등으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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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태 국회의장은 추모사에서 “영원한 국부(國父)이신 우남 이승만 대통령님께서 우리 곁을 떠난지 46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대한민국이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일궈낸 ‘기적’의 나라로, 올림픽과 월드컵을 유치한 문화체육 강국으로, G20국가 정상회의와 G20국회의장회의의 의장국으로 자랑스럽게 변모 하는 등 최빈국에서 글로벌 중심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 대통령님께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만개할 수 있도록 건국과 헌정의 기틀을 올바로 놓아 주셨기에 가능했다”며 고인의 업적을 강조했다.
박 의장은 “뿌리가 깊은 나무가 많은 결실을 맺는 법이다. 나라와 사회의 근본을 바로 확립하고 존중하지 않으면, 나라가 바로 설 수도 없으며 결코 그 나라가 부강해질 수도 없다”면서 “건국과 호국의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신 이승만 대통령님의 위대한 업적은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든든한 토대가 되어 언제나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고 피력했다.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대통령님께서는 독립협회의 지도자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오로지 국권회복에 대한 불굴의 신념으로 헌신해 오셨다”며 “광복 후 극심한 좌우의 이념대립과 6·25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지켜내고 지금같이 자유롭고 풍요로운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난 시간동안 한미동맹을 중심으로 한 굳건한 국가안보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박 처장은 또 “지금 우리 젊은이들은 대한민국 건국과 호국의 역사에 대해 무관심하며 대한민국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고 있다”며 “이는 저희가 그동안 대한민국이 어떻게 건국되었는지, 미국을 비롯해 얼마나 많은 국가가 6·25전쟁에서 우리와 함께 싸워주었는지, 그리고 지난 60년 간 미국이 어떻게 대한민국을 지켜주었는지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기성세대로서 책임을 통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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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대한민국은 지금부터라도,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하고 국민들에게 대통령님의 업적을 바르게 전달함은 물론 지난날 대한민국이 걸어온 호국의 역사와 한미동맹의 중요성, 그리고 주한미군과 전시작전통제권의 중요성을 젊은 세대에게 제대로 알려 대통령님의 고귀한 뜻을 받들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세환 재향군인회 회장은 “조국의 분단과 공산화라는 환란 앞에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박사님의 외침은 국민들의 위기의식을 깨우쳤다”며 군정 3년 동안 민족진영이 온몸으로 투쟁하면서 대한민국을 건국하기까지의 과정을 피력했다.
박 회장은 “국제적 권력정치가 난무하고 국내 공산당과 각종 정파가 난맥상을 보인 해방정국에서 박사님은 참으로 세계정세를 달관한 군계일학(群鷄一鶴)의 경세가이었으며 우리를 공산화의 위기에서 구해주신 어른”이라면서 “대한민국의 건국은 우리 민족이 만난(萬難)을 극복하여 쟁취한 민족사상 초유의 민주공화국이었으며 이것은 오로지 박사님의 지혜로운 영단과 영도력의 소산”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대통령은 건국과 근대화의 혁명가요, 글로벌 엘리트이며, 현대 한국민족주의의 원류가 되는 사상가며 문필가며 애국시인이셨다”며 “평생을 통해 국가 재정이나 사생활에 근검절약하고, 독립정신과 민족애에 투철하며, 국익과 공익우선의 도덕성이 강했던 이대통령을 우리 국민들은 이 시대 지도자의 귀감으로 추앙하며 받들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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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태어나 1896년 서울에서 서재필의 지도로 협성회(協成會)를 조직, 협성회보(協成會報)라는 주간신문을 발간, 주필로 활동하며 정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전개하다 협성회보가 정부 탄압으로 폐간되자 일간지인 매일신문(每日新聞)을 발행, 주필로 활동했다.
1898년 광무황제의 노여움을 사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박사는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는 전단을 배포해 징역 7년형 언도 받고 옥고를 치른바 있다.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워싱턴 대학, 하바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 등을 순례하면서 새로운 문물과 학문을 접한 뒤 1910년 귀국했느나 1912년엔 세계감리교총회 한국대표로 임명돼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에 근거를 두고 ‘한국․태평양’ 신문을 발간하고, 박용만ㆍ안창호 등과 협력해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4월에 상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대통령으로 추대됐으며, 1921년 5월에는 워싱턴 군축회의, 1933년에는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해 일본의 침략성을 폭로했다.
1940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구미위원장이던 박사는 국민들의 단결을 호소하는 육성방송으로 희망과 용기를 북돋우고, 일본이 패망하자 1945년 10월 16일 귀국했다.
이 박사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정부에서는 박사의 공훈을 기리어 194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Konas)
코나스 이영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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