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명신 "죽을 놈은 월남서도 죽고, 국내서도 죽는다"
"군인은 높은 자리로 가기 위해 하는 군인은 맞지 않다, 모두가 평화를 원하지만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전쟁이라는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장군의 말처럼 싸움터에 가기 싫다는 군인을 데리고 억지로 나가봤자 전장에서 승리를 위한 효과적인 전투는 물론 그 자신의 생명의 안전은 물론 동료 전우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장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월남에 가는 것은 너희들이나 나나 운명이다. 운명은 개인의 일생을 따라 다닌다. 죽고 사는 것은 누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6.25때도 그랬다. 죽을 놈은 죽고, 살 놈은 산다. 운명은 우리가 개척하는 것이고, 너희에게 달려있다. 우리 이제 월남 불 속에 화약을 짊어지고 기어들어간다. 어차피 너희 중 죽을 놈은 월남에 안 가도 여기 국내에서 죽는 거야. 어떠냐. 날 따라 올래?" 80대 중반을 넘긴 장군의 목소리엔 힘이 실려 있었다.
"그 다음부터 도망자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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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야전사나이"로 남기를 자처하는 '영원한 주월 한국군 총사령관' 채명신(86) 장군이 당시를 회상하며 TV앞에서 거침없이 월남파병과 관련한 비사들을 털어놨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진행자의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속사포처럼 토해내는 노(老) 장군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그대로 우리 군 현대사의 한 단면이었다.
휴일인 18일 아침 7시10분 KBS1-TV의 'TV 자서전' 인터뷰에 나선 채명신 사령관은 박정희 대통령의 호출로 청와대에 들어가 박 대통령과 면담하면서 주월 사령관으로 나서게 된 배경과 월남전 파병에 대한 개인적 입장, 당시 우리 군이 월남전에 파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 월남에서 한국군이 미군의 지휘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작전을 지휘할 수 있게된 과정, 10월유신과 중장예편 후 스웨덴 대사로 떠나게 된 이유 등을 소상하게 밝혔다.
이 날 채명신 장군은 월남전과 관련해 "전쟁에서는 중요한 두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하는데, 첫째는 전쟁에 대한 명분이 뚜렷해야 할 것과 두 번째는 그 전쟁을 지휘하는 지휘자가 누구냐는 것"이라고 가장 크게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월남전은 북베트남을 지휘하는 호치민이라는 카리스마 있는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나 외세를 배격하는 反불란서를 명분으로 절대적 지위와 권위를 발휘하고 있었던 반면 월남 쪽에서는 군대가 부패해 결과적으로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고 말했다.
그러던 1965년 4월 어느 날, 채명신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청와대에 들어가게 된다. 박 대통령이 월남 파병에 대한 채 장군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에서 채명신 장군은 조심스러우면서도, 하지만 단호하게 반대의사를 밝힌다. 이유는 당시 미국은 전 세계로부터 명분 없는 전쟁에 참가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고, 게다가 그는 이미 한국전쟁을 통해 게릴라전의 어려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날 "대통령도 고심을 많이 했지만 나도 대통령에게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러자 대통령이 상당히 불쾌해 하더라. '왜 채 장군이 그렇게 반대해? 왜 그래?' 하고 목청을 높이셨다"고 돌이켰다.
그러나 채 장군은 그 때 많은 국민들이 반대에 나섰지만 결국은 우리가 파병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임을 분명히 밝혔다.
"당시 북한 김일성은 북한에 '4대군사노선'('전인민의 무장화', '전군의 간부화', '전지역의 요새화', '전군의 현대화' 를 말함. 1962년 12월 조선노동당 제4기 5차 전원회의에서 국방력 강화를 위하여 채택한 군사노선) 을 기치로 대남 적화혁명전략을 강화하며 큰 소리를 뻥뻥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전방에 미 2사단과 7사단이 버티고 있어서 김일성은 미군이 무서워 쳐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은 한국이 파병을 거부할 경우 한국에 주둔하던 미 2·7사단을 한국에서 철수시킬 태세였다. 만약 미군이 빠지면 한국은 끝장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대통령의 고민도 그런 것이다."
장군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나 자신도 미군이 한국에서 빠질 경우 위험성은 불을 보듯 뻔함을 알기에 한국의 안보를 위해서는 미군을 붙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군이 빠지지 않기 위해 월남전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은 이런 사정을 모르기에 '국민의 생명'을 주장하며, 무조건 반대였다"고 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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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그 해 8월 박 대통령의 부름으로 초대 파월 총사령관으로 출병하게 된 그는 파병과 동시에 미군과 맞닥뜨리게 된 게 우선 지휘권 문제였다고 했다. 미군 측에서는 2만의 우리국군 병력을 미군 통제 하에 둘 것을 강요한 것이다.
그는 파병 결정 후 이 지휘권 문제와 관련해 박 대통령과 독대하자 "대통령께서는 미군 지휘 하에 들어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못 들어간다고 내 주장을 폈다"고 지휘권과 관련한 논란에 대해 얘기했다. 그가 미군의 지휘를 거절한 이유는 "미군이 월남전을 잘못 파악하고 판단을 잘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랬다"며 "(잘못되면)대통령께서도 국민도 다 곤란하게 된다. 그래서 못 들어간다. 사령관에게 임무를 주십시오"하면서 이어 미군과 담판 지은 사실을 소개했다.
장군은 명분이 타당하지 못한 것을 들어 국군의 작전권을 독립적으로 확보해야만 참전할 수 있다고 계속적으로 주장했다. 미군과 한국 파월 사령부 측이 팽팽하게 맞서는 상황. 결국 그는 월남에 건너가 웨스트 모얼랜드 장군과 라슨 장군을 만나 담판을 지었다.
한국군의 용맹성을 확인하고, 채명신 장군의 분명하고도 합당한 논리에 라슨 장군이 100% 인정하고 공감하면서 흔쾌히 모든 전략, 전술을 한국군이 단독으로 독자적 지휘권을 인정하고 협력하겠다고 한 사실을 전했다.
월남전이 '군사적인 전쟁'만이 아닌 '정치적 전쟁'임을 강조한 그는 월남에서 한국군이 승리를 하고 월남민들에게 칭송을 받을 수 있었던 요인을 그의 소신이기도 한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지론을 예로 들었다.
특히 '물은 인민이요, 물고기는 게릴라'라고 한 모택동 전술을 적용, 베트콩과 양민을 분리시키는 전략을 쓰면서 주민들의 의료지원과 식량 지원 등 대민활동을 적극 전개하되 지역 내 촌장을 통해 지원하면서 우리 군이 최선을 다해 월남 주민을 돕는다는 예의를 다함으로써 주민들이 한국군에 우호적으로 나서게 한 결과라며, "한국군이 주둔했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을 하게 되면 주민들이 우리 군이 떠나지 못하게 데모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장군은 또 '고보이' 지역 전투를 예로, 1966년 5월29일자 영국 런던타임지가 보도한 '미군이 3개월 동안 전투를 벌여도 점령하지 못한 이 지역을 한국군이 했더라면 벌써 전쟁은 끝났을 것이다' 할 정도로 한국군은 최선을 다했다며 "베트남전쟁을 단순히 이기고 진 전쟁으로 보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 한국군은 최선을 다해 싸웠다. 그리고 오늘의 대한민국 경제번영의 토대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외국 군인들은 흥청망청 하는데도 우리 한국군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군이 있는 지역에는 월남 아가씨들이 없었다. 젊은이들이 어찌 술 생각, 아가씨 손목 잡고 싶은 생각이 없었겠나. 피 눈물 나는 돈을 모아 조국에 달러를 보냈다."는 말로 월남전을 평가했다.
1969년 5월 4년간의 주월 사령관 임무를 마치고 2군사령관으로 명령받아 임무 중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그는 10월 유신 선포를 앞에 놓고 박 대통령과 나눈 대화의 일단도 언급했다. “각하. 정권을 연장하시겠다는 건 결국 이중플레이 아닙니까? 71년 연설에서도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입에 침도 마르기전 정권을 연장하겠다고 하는 것은 이중플레이입니다. 무슨 명분으로 그러십니까? 정치라는 건 국민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 이게 지도자의 생명인데 그렇게 나가시면 스스로 생명을 끊는 것 아닙니까”고 했다. 그러면서 "이 때 정치생명의 끝이라는 말은 부하의 손에 죽게 된다는 그런 뜻의 말은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모든 사람이 4성 장군으로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4성 장군이 되지 못하고 예편한 것과 관련해서는 후일담을 전하기도 했다. '채 장군이 현역에 있으면서 4성 장군이 되면 참모총장도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유신체제는 안 된다'고 한 말을 이후락씨 측근이 대통령께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 채 장군은 예편 후 스웨덴 대사로 나간 것은 순전히 자의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10월 유신 선포는 그가 대사로 나간 이후 선포됐다.
1972년 5월 2군사령부 연병장에서 간소하게 전역식을 하고 많은 장병들의 눈물의 환송에도 꾿꾿하게 참았다가 막상 고속도로로 진입하는 순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는 채명신 사령관은 "나에게 맞는 건 군인밖에 없다. 다시 한다 해도 최전방 지휘관을 하고 싶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군인은 높은 자리로 가기 위해 하는 군인은 맞지 않다, 모두가 평화를 원하지만 평화는 공짜가 아니고,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전쟁이라는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며 국방 대비태세의 중요성을 후배들에게 전한 그는 "내 고집, 내 인생관대로 살았다는 그런 평가를 받고 싶다"는 말로 인터뷰를 끝냈다. '영원한 사령관. 채명신 장군'!(konas)
코나스 이현오 기자(holeekv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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