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권병사 수기37] 군대는 내 인생 성숙의 장
군대는 나를 성숙하게 성장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
2000년 12월29일,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까지 우리 세가족은 캐나다로 떠났다.
아버지가 잠시 휴식을 하기 위해 2년여 정도 해외로 나가 있을 예정이었으나, 당시 내가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면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나가는 시점이었고, 우리 가족은 나의 학업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캐나다에 머무르게 되었다.
10년 가까이 캐나다에 살게 되면서 한국에 계속 살던 친구들과는 달리 군 입대라는 주제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각이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2005년에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대학 입학 전에 한국을 방문하였다. 내 친구들 대부분은 당시에 이미 입대를 한 상태였기 때문에 나도 군 입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고, ‘혹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신체검사나 한번 받아볼까?’,‘나중에 가게 될 지도 모르는데 토익이나 봐서 카투사 지원이나 해볼까?’라는 생각과 함께 병무청을 방문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우리 가족은 영주권 신청이 들어가 있어 바로 입대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병무청 직원은 어차피 지금 군 입대를 할 게 아니라면 나중에 입대가 가능한 시기에 신체검사를 받아도 늦지 않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에이, 그냥 군대 가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하고 캐나다로 돌아와 버렸다.
그 후, 우리 가족은 영주권 신청을 거부당하였고 재신청을 들어갔지만 앞으로 3년은 걸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영주권 발급이 되기 전까지는 입대가 불가능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뒤로 군대라는 곳은 나와 상관없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였고 내 기억 속에서 점점 사라져 갔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군대에 가는 것을 원하셨는지, 가끔 “너 군대는 어떻게 할 거냐?”라고 물어보셨고, 그 때마다 난 “군대를 왜 가? 시간도 아깝고 난 이미 늦었지, 어차피 영주권 나오면 안가도 되잖아?”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대답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넌 애가 무슨 생각도 안하고 그렇게 이야기 하냐? 군대에 가서도 배울게 많다.”라고 화를 내셨다.
그러던 중 2009년 초에 우리 가족은 영주권을 받았고, 외국에 계속 거주하는 한 더 이상 군대라는 곳은 나와는 상관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내 인생의 전환점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 후에 찾아왔다.
2009년 여름이 끝난 후 난 학교생활에 지루함을 느꼈고, 더 이상 공부를 해봐야 성적만 나빠지겠다는 생각에 아무런 계획 없이 휴학을 하였다. 2~3개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보니 자신이 굉장히 한심해 보였고 ‘이럴 바에 차라리 군대나 갔다 올까?’, ‘군대 갔다 오면 정신 차리고 공부라도 열심히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아직은 학교에 돌아가 봤자 변한 게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고 이렇게 시간만 날릴 바에는 군대를 갔다 오는 게 나중에 내 인생을 생각해봤을 때 오히려 더 득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였다.
나는 그 생각을 부모님께 말씀드렸고, 부모님께서는 “그래, 잘 생각했다. 군대가 절대 2년이라는 시간을 날리는 곳이 아니고 배울 게 많은 곳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찬성하셨다.
하지만 나는 조국을 지킨다는 신성한 국방의 의무와는 거리가 먼, 남는 이 시간에 차라리 군대를 갔다 와야 나중에 제한이 없는 편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으로 군 입대를 결정했고, 2010년 3월 24일, 군 입대를 위해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한국에 도착한 것은 3월 25일이었고, 그 다음 날인 3월 26일, 대한민국에선 엄청난 비극이 일어났다. 바로 46명의 우리 전우들을 앗아간 ‘천안함 피격사건’이었다. 이때만 해도 난 북한을 향해 분노를 느끼거나, ‘아 내가 꼭 군대에 가서 우리나라를 지켜야겠구나!’라는 생각보다는 ‘아 괜히 왔다, 왜 하필 내가 군대 간다고 한국 들어오자마자 이런 일이 벌어지냐?’라는 한심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한 생각과 함께 나는 3월 30일, 신체검사를 받으러 서울지방병무청을 찾아갔고, 감기 기운이 있었던 나는 백혈구 수치가 높다는 이유로 재검 판정을 받았다. 나는 그 때 ‘차라리 잘 됐다. 시기도 뒤숭숭한데 부적합 판정이나 떠라, 그러면 나는 군대 가려고 했는데 안된다는 핑계거리도 생겼는데 뭐?’라는 정말 이기적인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는 달리 4월 30일 재검에서 정상 판정을 받았고, 결국 2010년 5월 10일 논산 육군훈련소로 입대하게 되었다.
나는 캐나다에서도 많은 한국인들과 어울렸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나름 무서운(?) 형들과도 알고 지냈었기 때문에 다른 영주권 병사들과 달리 군 문화나 군 생활에 대한 걱정은 적었다.
그런 것보다 나는 병사로서는 적지 않은 나이에 입대하는 터라 나의 욱하는 성격 때문에 ‘선임들이래 봤자 다 나보다 어릴텐데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내가 참을 수 있을까?’라는 점을 걱정했다. 부모님도 그런 면이 걱정되셨는지, “요한아, 군대에서는 무조건 참아야지 안 그러고 대들어봤자 너만 손해야.”라고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그 외의 자잘한 걱정들과 함께 나는 10년 만에 밀어버린 짧은 머리의 어색함을 느끼며 군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입소대대에서 만난 13명의 영주권 자원입대 병사들과의 5주간의 훈련소 생활이었다.
훈련소 생활은 내가 밖에 있을 때 생각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내가 입대를 결정했을 때 복무를 하고 있던 한 친구는 “야 훈련소 5주, 엄청 지겹다. 난 훈련소 5주가 다섯달 같더라.”라는 말을 했었고, 그 말을 듣고 걱정도 많이 됐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열세 명의 영주권 병사들과 서로서로 도우며 열심히 훈련을 받았던 탓인지 몸은 힘들었지만 나름 보람차고 재미있게 훈련소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분대장 훈련병으로 임명되어 훈련병 시절부터 임무를 전달하고 분대에 대한 책임을 지는 임무를 가져 어깨가 무거웠지만, 그 분대에서 최고 연장자였고, 또 이미 전역한 친구들의 조언으로 인해 군 생활도 어느 정도는 아는 상태였기 때문에 기꺼이 그 책임을 맡았다.(물론 그 조언 중에는 귀찮으니까 분대장 훈련병 절대 하지 말라는 조언도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굉장히 이기적인 생각으로 입대했던 내가 왜 훈련소 생활을 그렇게 열심히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입대를 한 순간 나는 ‘기왕 입대한 거 즐기면서 해야지, 안 그러면 시간도 더 안가고 지겹기만 할 거야.’라는 생각을 은연 중에 하고 있었다.
그렇게 5주간 지내면서 밖에서 흔히들 어렵다고 말하는 화생방, 행군, 각개전투 등의 훈련을 모두 열외 없이 마치고 정신교육을 통해 나의 마음가짐을 다지면서 훈련소 생활이 끝났다.
훈련소 생활이 끝나고 우리는 자대를 배정받았다. 나와 다른 영주권 병사들은 나중에 ‘군 생활이 끝나고 나서라도 다시 한 번 만나자’라는 약속을 하고 서로의 자대로 떠났고 두 명의 영주권 병사와 함께 대전 인근에 있는 32사단으로 배정받았다.
32사단 보충중대에서 또 5일간의 대기를 하고, 주특기 재분류를 거쳐 미국 출신 한 명의 영주권 병사는 위병보직을 받았고, 나와 일본 출신의 또 다른 한 명은 정보통신대대로 배치를 받았다.
전입 당일, 마침 동원 훈련 기간이었던 우리 부대는 동원훈련장에 있었고 첫 날부터 우리는 대대가 아닌 그 곳으로 갔다.
훈련장이라 아무래도 시설이 열악할 수밖에 없었지만, 전입신병이었던 우리는 그곳이 우리 막사가 아닌 훈련장이란 사실을 몰랐고 우리는 서로 “야 우리 큰 일 났다. 이렇게 낡은 곳에서 1년 반 넘게 생활해야 돼?”라고 말하며 걱정했다. 그 모습을 보고 우리들을 인솔하던 간부님께서는 “걱정 안 해도 돼, 여긴 훈련장이야”라고 말씀하시며 안심시켜 주셨다.
하지만 우리를 또 한 번 놀라게 하는 일이 있었는데, 훈련장에 들어가서 보니 군인들 머리카락이 엄청나게 길었다. 그 사람들이 예비군들인걸 알 리가 없어서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던 우리에게 예비군들은 ‘여기는 두발자유 부대’라고 속이면서 놀렸다. 그렇게 전입 첫 날부터 예비군들의 장난감(?)이 되는 고통을 겪으며 전입 첫 날이 지나갔다.
그 다음 날, 부대로 복귀한 뒤 난, 내 상상과는 다르게 엄청나게 깔끔한 부대 모습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리고 내 걱정과는 달리, 우리 부대에서는 내 할 일만 열심히 하면 선임들은 나를 전혀 부당하게 대하지 않았기에 안심하고 군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무전병 보직을 받아 열심히 생활하던 중 8월에 행정병으로 보직변경을 하게 되는 일이 있었고, 그러면서 나의 실질적인 군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1월 23일, 천안함 피격사건에 이은 또 다른 큰 사건이 터졌다. 바로 북한군이 연평도에 포격을 하여 군인 2명, 민간인 2명이 사망했던 ‘연평도 포격사건’이었다.
나는 ‘쟤네는 나 입대하려고 한국 오자마자 한 번 일 터뜨리더니, 입대해서 군 생활하고 있는데 또 저러네?’라는 생각을 하였지만 마음가짐은 오히려 그때와 딴판이었다.
그 사건 때문에 우리는 한달여간 총기휴대를 한 단독군장 상태로 다녀야 했고, 일과 이후에도 편히 휴식을 취할 수 없었지만, 내가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니고 무조건 도망가려고만 했던 입대전과 달리 우리나라에 아무렇지도 않게 포격을 가하는 북한에 분노를 느꼈고, 이런 시기에 군대에 와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그 때부터 난 내가 군대에 온 지 6개월 만에 내가 육체적, 또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사건들을 거치면서 부대 생활도 순조롭게 흘러갔다. 1월에 막사 이전을 위해 이사도 하고, 2월에는 영주권자인 내 특기를 살려 한미 연합훈련인 Key Resolve/Foal Eagle 훈련을 위해 서울 용산에 있는 합동참모본부에 어학병 파견도 갔다 왔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훈련 및 부대 생활을 하면서 14개월의 시간이 흘러 어느덧 벌써 상병이 되었다. 그 동안 군 생활을 하면서 난 정말 많은 것을 얻은 것 같다.
첫 번째로, 지금까지 같이 군 생활을 해 온 전우들이다. 전역을 하는 순간까지 계속 같이 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싫든 좋든 계속 마주쳐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외아들이라 친구들을 굉장히 좋아하는 나로서는 군 생활동안 쌓아온 인맥들이 지금은 선후임 관계이지만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는 좋은 친구 또 좋은 형, 동생으로 좋은 인맥 형성을 할 수 있어서 좋다.
두 번째로, 행정병이라는 보직을 맡게 되면서 문서 처리 능력은 엄청나게 향상된 것 같다. 보고서 작성, 워드 프로세서 및 기타 프로그램 사용 능력 등은 하기 싫어도 해야 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군대에서 배우는게 최고인 것 같다.
세 번째, 간부님들 및 선임 병사들을 대하면서 윗사람을 대하는 예의, 눈치, 센스 등이 군 입대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늘었다. 또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는게 아니라 하기 싫은 일도 참고하는 인내심이나 타인을 배려하는 배려심, 서로 돕는 협동심 등 사회에서는 돈 주고도 배우기 힘든 것들을 배우게 된다.
네 번째, 규칙적인 생활과 꾸준한 운동으로 신체적인 건강도 군대에서 챙겨갈 수 있다. 드라마나 소설 등을 보면 처음에는 철없이 행동하던 주인공이 여러 가지 사건과 시련 등을 극복해 나가면서 더욱 성숙된 모습으로 탈바꿈해 나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처음에 자대에 왔을 때 제일 많이 들었던 질문이 “너 군대 안 와도 되는데 왜 왔냐? 후회 안돼?”라는 질문이었다. 그 때는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제약 받는게 싫기 때문에 후회는 되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 군 생활을 해나가면서 변화해 나가는 내 스스로의 모습을 보면서 만일 군대에 오지 않았더라면 나의 마음가짐이 이렇게 단시간에 성장할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에 군대에 온 것이 후회가 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오기를 잘 했다라는 생각을 스스로 해본다.
결국 군대는 나를 성숙하게 성장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이며 소설에 비교하면 ‘내 인생 성숙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남은 7개월간의 군 생활동안 더욱 성숙하게 성장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직도 군 입대를 피하려고만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얘기를 해 주고 싶다.
“22개월간의 군 생활은 결코 시간낭비가 아니며, 자신의 인생을 한 단계 더 성숙하게 성장시킬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다”라고...(konas)
김요한(상병) 32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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