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의 업적
유영익, “장기집권 통해 많은 과오(過午)와 실정(失政) 저질렀지만 치적은 ‘功7 過3’ 채점이 마땅”
“이승만 대통령이 이룩한 업적은 조선왕조의 제도적 기반을 다진 제3대 왕 태종(太宗), 터키의 서양화 개혁을 주도한 터키공화국 초대 대통령 케말 아타튀르, 고대 중국의 문자와 제도를 통일한 진시황,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출하고 그들에게 율법을 전수환 모세 등 일련의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의 업적에 비교될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자신의 업적들을 시대착오적인 독재와 무리한 장기집권을 통해 달성했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최고 가치로 받드는 현대인들로부터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9일 오후 중구 정동의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제12회 이승만 포럼에서 유영익 한동대 석좌교수는 "이 대통령이 장기집권 통해 많은 과오(過午)와 실정(失政) 저질렀지만 그의 치적을 총체적으로 평가하자면 ‘功7 過3’ 채점되어야 마땅하다"며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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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부터 이승만을 연구해 온 유 교수는, 4.19 이후 학계를 재배해 온 반(反)이승만적 분위기와 ’80년대 말 동서 냉전의 종식과 함께 이승만을 새롭게 긍정적으로 조명한 움직임을 소개하면서, 이승만에 대한 공(功)과 과(過)를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함을 강조했다.
유 교수는 먼저 “이 대통령은 12년간의 장기집권을 통해 허다한 과오(過午)와 실정(失政)을 저질렀다”며 구체적인 사례들을 언급했다.
“건국 초기 친일파 문제를 시의적절하게 처리하지 않아 후환을 남겼고, 6.25전쟁 발발 직후 영부인과 함께 수도를 남몰래 탈출하면서 그릇된 전황으로 서울 시민을 안심시켜 그들의 피난 기회를 박탈했으며, 예고없는 국군의 한강 인도교 폭파, 거창 양민 학살사건, 국민방위군사건, ‘사사오입’이란 억지논리로 장기집권 획책, 3.15 부정선거, 정경유착과 부정부패” 등은 국가 최고 통치권자로서 묵과할 수 없는 책임이라는 것이다.
유 교수는 그러나 “이승만이 남북분단이나 6.25전쟁 발발 등 중대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4.19 이후 이승만을 다룬 국내외 학자들과 언론인들이 그의 치적을 논함에 있어 그가 범한 과오를 파헤치는데 열중한 나머지 그의 공적을 살피고 인정하는 작업에는 등한시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치, 외교, 군사 경제, 교육, 사회, 문화·종교 분야에서의 이 대통령의 업적을 설명했다.
먼저 정치분야에서 이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해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미국식 대통령 중심제 통치체제를 확립했다. 언론의 자유를 비교적 폭넓게 허용하고 중단없는 국회의원 선거 실시와 의회제도의 존속, 양당제도의 발달 조장, 지방자치제 실시 등 적어도 형식상 민주주의의 외피를 유지하고 한국 국민의 민주주의적 자치능력을 향상시키는데 이바지했다는 것이다.
외교분야에서 이 대통령의 업적은 대한민국 수립후 유엔과 미국을 위시한 30여 개 국가로부터 승인을 획득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립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1952년 ‘대한민국 인접 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을 일방적으로 선포해 독도를 포함한 한반도 해역의 어족 및 해저자원을 보호하는데 기여했고, 1953년 10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한국이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여러 분야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성취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군사분야에서는 6.25전쟁 발발 직후 대미외교를 통해 미군의 참전을 유도하고, 유엔군과 국군의 긴밀한 공조체제를 통해 북한 침략군과 중공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전쟁 발발 이전 10만 명에 불과했던 한국군 규모를 1954년 65만명 이상으로 대폭 증원하면서 질 역시 획기적으로 향상시켰고, 대한민국을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질높은 상비군을 보유한 동아시아에서 무시하지 못할 군사강국으로 격상시켰다.
경제분야에서 이 대통령은 해방 후의 만성적인 인플레이션을 극복하고 미국으로부터 20억 달러 이상의 무상원조를 받아내 전후 경제복구에 성공하고, 수입대체산업을 육성해 공업화의 단초를 열었다.
뿐만 아니라 6.25전쟁 발발 이전에 농지개혁을 개시해 총 소작지 면적의 40%에 달하는 58.5만 정보의 땅을 유상 매입, 유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소작농들에게 분배해 자작지의 비율이 92.4%에 달하게 했다.
이 대통령은 교육분야에서도 6년제 의무교육제도를 도입, 실시해 1959년까지 전국 학령 아동의 취학률을 95.3%로 높이고 성인 위주의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해 해방 당시 80%에 달했던 문맹율을 22%로 낮추는데 성공했다.
이 외에도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대폭 증설하고 해외유학을 장려해 과학기술의 발달과 경제개발에 필요한 고급인재를 양산했다.
사회분야에서는 농지개혁을 통해 지주제를 붕괴함으로써 양반제도에 종지부를 찍고 남녀에게 동등한 교육 및 취업기회를 보장해 한국 사회의 평등화에 기여했으며, 전통문화의 계승 및 보존조치 강구와 기독교 교세 확장에 기여하는 등 문화·종교분야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이렇듯 유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의 사회 각 분야에서의 괄목할만한 업적을 세세히 열거하면서, “이 대통령이 집권기간에 대한민국이 근대적 국가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 요건을 구비했기에 1961년 이후 대한민국이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비약적인 경제 및 문화 발전을 성취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1948∼1960년간 이 대통령의 치적은 적어도 ‘공7 과3’으로 채점되어야 마땅하다”고 결론을 맺었다.(konas)
코나스 최경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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