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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가르기 총선수업’은 안된다

Written by. 남승희   입력 : 2004-03-22 오전 9: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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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지역번호가 ‘054’인 낯선 전화를 받았다. “어…, 나 이용상이오.” “아, 선생님”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셨다. 5년 전 신문에 난 ‘늙은’ 제자를 알아보시고 전화를 하셨는데, 그 때는 바쁘다는 핑계로 찾아뵙지 못했다. 1년후 학교로 전화를 드렸더니 정년퇴임하신 뒤였고, 찾아봬야겠다며 차일피일 미루던 차에 최근 방송을 보시고 또 손수 전화를 하신 것이었다.

어느새 나도 주례를 서서 장가 보낸 제자들을 두었으니 선생님 뵈러 갈 때는 그 녀석들도 데리고 가서 줄줄이 큰절 올리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제지간의 대(代)는 이렇게 이어지는 게 아니겠는가? 우리는 교육을 통해서 보편적 가치를 전수하고 공유하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살아간다.

교권이 무너졌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교실 안에서의 교사의 ‘권력’은 학생들에게는 절대적이다. 교사의 일거수 일투족은 학생들에게는 ‘살아 있는 교본’이고, 교사의 말 한 마디는 학생들에게 평생을 좌우할 길잡이가 되기도 하고 상처가 되어 두고두고 괴롭히기도 한다.

교사의 지위나 권한을 ‘권력’으로 비유한 것은 교사와 학생 간의 차등적 관계 또는 영향력 관계의 한 형태로서의 지도력을 말하는 것이니 오해 없기를 바란다. 이러한 교사의 권력은 학생들에게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또, 학생들의 활동 방향을 설정하고 조정하는 데 개입하는 특정한 행동과 설득의 형태이기도 하다.

수업권은 교사가 학생들에게 어떤 행위를 하도록 행동을 보임으로써 영향을 미치는 설득의 행위를 말한다. 또한, 교육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학생들을 자극하고 동기를 유발하며 조정하는 지도성을 보이는 입장을 의미한다. 궁극적으로 교사는 학생들의 행위를 변화시키기 위해 교육 활동을 주도한다.

이렇듯 교사의 수업권은 정말 대단한 ‘권력’이다. 그러나 대단한 권력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잘못 써서도 안 된다. 외부에서 누가 보든 보지 않든, 듣든 듣지 않든 간에, 언제나 ‘열린’ 교실에서 학생들을 만나야 한다. 교실이 ‘나만의 왕국’이 아님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런데 ‘정치의 계절’에 또 전교조가 정치를 가르치겠다고 나섰다. 탄핵에 대한 내용을 포함한 ‘총선 수업’을 실시하겠다는 것이다.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을 실제 상황에 접목해 볼 좋은 기회라는 것이다. 옳은 얘기다. 그렇다면 학교의 학생회장이나 학급회장 선거는 제대로 시행되도록 가르치고 있는가?

문제는 편향성과 독점성이다. “탄핵 찬반 토론이나 특정 정당에 편향된 총선교육은 없을 것”이라고 전교조는 주장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전교조가 보여 왔던 이념적 성향으로 봐서 총선 수업이 공정성과 객관성을 갖고 진행될 것이라고 믿는 학부모가 많지 않다는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이러한 이슈를 늘 전교조가 독점하는 것도 문제다. 민주 시민을 양성하기 위해서 총선 수업이 필요하다면 이념적 편향성에 대한 사회적 우려가 없고 내용과 방법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있을 때 가능하다. 그리고 모든 교사가 모든 학생에게 실시해야 한다. 특정한 단체가 독점할 사안이 아니다.

교육부는 ‘교육과정에 없는 교육을 실시할 때는 학년이나 교과협의회 등과의 협의를 거치고 학교장의 승인을 받도록 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학부모의 동의 절차를 거치도록 해야 한다. 차제에 학부모의 의견을 수렴하고 권리를 대변할 ‘학부모회’를 법제화해야 한다. 소수의 학부모만 참여하는 학교운영위원회로는 미흡하다.

한 편에서는 총선 수업에 쓸 교수·학습 자료를 ‘자체적으로’ 제작해서 보급하겠다고 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총선 수업에 대한 ‘학생·학부모 감시단’을 결성하겠다고 하니, 이것이야말로 사회의 ‘편가르기’ 행태를 학교에서 재생산해내는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의결되던 날, 흥분한 제자가 도저히 이 나라에서 살기가 싫다며 전화를 했다. 이 친구가 생각을 정리하도록, 흥분을 가라앉히도록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게 전화해 주시는 선생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참으로 ‘복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제지간은 이런 것이 아닐까?

남승희 (명지전문대 교수 / 출처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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