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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월남 패망의 교훈(2) "현 시국은 당시 상황과 유사점이 많다"

Written by. 정준   입력 : 2004-04-29 오전 10: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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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美-월맹 간 비밀협상이 시작되기 전 해인 1967년 9월3일에 벌어진 월남 대통령 선거에는 11명의 입후보자가 난립하여 이전투구 양상을 보인 끝에 웬반티우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 선거에서 차점으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 쭝딘쥬는 선거유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시체는 쌓여 산을 이루고 있다. 우리 조상이 이처럼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월맹과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평화협상이 가능한데 왜 北爆(북폭)을 하여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폭을 중지시키고, 평화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겠다"

이 얼마나 설득력과 호소력이 뛰어난 명연설인가. 민초들은 이처럼 현란한 연설을 신뢰하고 박수를 보낸다. 미국국민들 사이의 반전(反戰)여론은 바로 이 쭝딘쥬의 선거유세 연설이 기폭제가 되어 시작됐다. 그가 공산프락치이었음이 밝혀진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다. 모범적인 성장(省長) 평판을 받던 녹따오 등 수많은 정치인과 관료들과 군(軍)내부의 장성들 상당수도 공산 프락치였다.

이 달 30일은 월남 패망 29주년이 되는 날이다. 1975년 4월 30일, 월맹(越盟)국기가 사이공 대통령궁에 게양되었다. 미국과 월맹이 5년여의 협상 끝에 1973년 1월 27일 파리에서 열린 휴전회담에서 베트남전을 종식하기로 한 합의에 따라 미군이 철수한지 2년3개월만의 일이었다. 그 후 월남의 수도 사이공시(市)는 호치민시로 바뀌었다.

월남전 휴전 직전 2년 동안 미군이 월남전에 투입한 병력과 전비(戰費)는 '미군 연인원 12만명' '전비 1,500억 달러' '전투기 3,700여대' '폭탄 670만t' 등 실로 엄청나다. 그러고도 미국은 초라한 모습으로 서둘러 월남을 떠나야 했고, 건국 후 최초의 해외파병에서 용맹을 떨쳤던 한국군의 전승(戰勝)도 빛을 잃고 말았다. 

 韓國과 越南 두 나라는 문화와 역사 민족성 분단과정 등에 있어서 유사점이 너무나 많다. 월남은 이미 적화통일되어 월맹(越盟) 수중에 넘어갔으나, 한국은 남북대치 상황에서 북한이 내세운 '민족공조'에 휘말려 대북(對北)유화정책이 정책기조가 되어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통일과정까지 월남과 같아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식자들은 월남 패망의 원인으로 (1)지도층의 내분 (2)사회각계와 시민단체에 폭넓게 침투한 공산주의자들 (3)정보기관의 무력화 (4)부정부패 (5)군대의 부패 (6 테러위협으로 애국인사들의 반공여론 침묵시키기 (7)반미감정 선동과 미국의 배신 등을 드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월남 지도층의 내분은 우리에게 실로 많은 것을 시사한다. 고 딘 디엠 정권이 쿠데타로 쓰러지고 군부 쿠데타가 반복되는 와중에서 정권은 부패와 내부분열을 거듭했다. 식민잔재 청산문제와 친불(親佛)·친일(親日)·친중(親中)파의 정통성논쟁 그리고 각 정치세력간의 끝없는 분파와 이합집산 및 지역감정을 등에 업은 정쟁(政爭) 등이 끊이지 않았다. 해방 이후 계속되어온 우리의 친일청산문제 정쟁(政爭) 부정부패 지역갈등 이념분쟁 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월맹은 휴전 이전부터 사회 각계에 공산프락치들을 폭넓게 침투시켜 국론분열을 획책했다. 그들은 오랜 기간의 전쟁으로 매년 80만∼100만t의 식량부족과 물자부족에 시달리면서도 잠시도 대남(對南)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월남사회의 밑뿌리를 뒤흔든 세력은 휴전협정 이전부터 월남 곳곳에 침투시켜온 공산당원 9,500명과 인민혁명당원 4만명 등 전체 인구의 0.5%인 공산 프락치들이었던 것이다. 

공산세력이 한 나라를 쇠락으로 몰고가는 전통적 수법은 '정보기관의 무력화'이다. 당시 월남에서는 군사쿠데타가 벌어질 때마다 대공(對共)전문가들이 쫓겨나 정보기관은 형태뿐이었다. 그들은 대(對)월맹정보는 물론, 월남내부에 침투한 공산 프락치 검거에 너무나 무력했다. 우리나라 정보기관과 대공(對共)기관이 정권의 부침을 겪으면서 '간첩 하나 못 잡는 종이 호랑이가 됐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음은 무심히 들어 넘길 일이 아니다. 

당시 월남사회의 부패 역시 망국(亡國)을 재촉하고 있었다. 월남이 패망하던 1975년 9월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인들은 대선(大選) 승리를 위해 이합집산과 분열 반목 대립 갈등을 연출했고, 뇌물과 마약 매춘 도박 등 고질적인 사회악(社會惡)이 만연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바로 이 같은 부패와 사회혼란을 바탕으로 활동공간을 넓혀간다. 부패를 먹고 자라는 독(毒)버섯인 것이다. 우리 역시 '정치권의 혼란'과 부정부패 국론분열 및 계층간 갈등의 골이 깊어질수록 친북좌경세력에게 망동(妄動)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공산프락치들은 순수한 운동조직에 침투하여 반(反)정부운동 보루로 삼는 일에도 매우 민첩하다. 휴전 전후 월남에서는 천주교와 불교계 성직자들이 모여 결성한「평화회복 및 反부패운동」세력과 대학 총학생회와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반(反)부패운동에 나섰고, 공산세력은 그 틈새를 파고들어 진지를 구축했다. 미군과 한국군 철수 이후 사이공에 애국단체 1백여개, 통일운동단체들이 양산한 수십 개의 언론사들이 월남의 좌경화를 이끈 것도 우리가 주목할 대목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군내(軍內) 부정부패였다. 당시 월남 정규군은 58만 명 가운데 10만명이 뇌물을 주고 비공식 장기휴가를 받아 대학에 다니거나 취업 또는 장군들이 운영하는 사(私)기업에 파견돼 무보수로 일하는 사례마저 있었다. 이름만 군적(軍籍)에 올려두고 실체가 없는「유령군인」들이다. 군 기강의 해이가 자초하는 결과가 어떠한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공산테러도 자심했다. 그 무렵 '반공'을 외치고, 조국을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우익인사들은 다음날이면 시체로 발견되곤 했다. 1973년까지 암살을 당한 우익인사들만도 년 평균 840명에 이를 정도였다. 차기 수상이 유력시되던 유명한 '반공지도자'(웬반흥) '사이공대학의 우익학생지도자' '반공을 주창하던 언론인' 등이 잇따라 암살되면서 지식인과 중산층 및 보수언론은 침묵을 선택했다.

요즈음 우리나라의 언론과 지식인들이 국가안보와 반공 국가정통성 수호를 외치면 친북좌파들이 전화와 인터넷 등으로 무차별 위협공세를 펼쳐「침묵을 강요하는 상황」은 29년 전의 월남을 연상시킨다. 최근에 있었던 '황장엽 선생에 대한 테러위협' 역시 그런 케이스에 속할 것이다. 

월남은 월맹 정규군의 무력침공과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패배하기 이전에 이처럼 이들 1백여 좌익단체의 선전전(戰)에 당한 것이다. 최근 수년간 수많은 국내의 친북 시민단체들이 인터넷공간을 점거하고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지켜내고 경제건설을 이룩한 보수우익을 '수구 꼴통'으로 몰고있는 의도가 무엇을 겨냥하고있는지를 어림할 수 있는 일이다. 

1975년 3월10일 새벽 월맹 공산군이 중부월남에서 총공세를 감행했다. 미국이 '10년간은 유지될 것으로 믿었던 휴전'이 오판으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월남군은 곳곳에서 패퇴하여 밀리기 시작했다. 월맹군에게 허(虛)를 찔린 티우 대통령은 "즉각 정쟁(政爭)을 중지하고 일치단결하여 자유월남을 지키자"고 호소했다. 미국에는 방위공약의 이행을 촉구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월맹군 18개 사단이 사이공을 향해 무인지경을 달리듯 남하하여 4월29일 월맹 공산군 14개 사단이 사이공을 포위했고, 4월30일 정오 월맹 공산군 제2군단은 사이공 시내로 진격했다. 탱크부대가 월남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위치한 독립궁을 점령했다. 포로가 된 정반민 월남 대통령의 무조건 항복 수락으로 월남은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교전 당사국인 미국·월남·월맹·베트콩(베트남 임시혁명정부)과 휴전감시위원단인 캐나다·이란·헝가리·폴란드 4개국 그리고 영국·소련·프랑스·중공 등 4강국(强國) 외무장관이 서명에 참여한 4+4+4=12개국이 담보한 값비싼 서명문서였다. 월맹의 경제재건을 위해 40억 달러(미국 직접원조 20억 달러, IBRD 차관 20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고서 체결한 협정이었다.

그러나 미군 철수 후 월맹이나 베트콩이 휴전협정을 파기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北爆)을 재개하고 월남 지상군을 지원키로 월남과 방위조약을 체결했던 미국의 대월(對越)방위공약은 침묵을 지켰다. 휴전협정문서가 한 장의 휴지로 바뀌고만 것이다.

사이공 함락 후 월남의 군인 경찰 공무원 정치인 등 지도층인사들은 모두 체포되어 인간개조학습소에 수감됐거나 형장(刑場)으로 향했다. 반(反)체제운동에 앞장섰던 종교인 학생 민주인사들도 모두 수감됐다. "자본주의체제에서 반(反)체제 활동을 하던 자들은 사회주의사회에서도 똑 같은 짓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베트콩(베트남 임시혁명정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보트·피플의 숫자는 약 106만명에 달했고, 이 중 11만명은 배 전복으로 또는 해적을 만나 살해당했다.  

우리는 이 참혹한 월남 패망의 역사를 반면(反面)교사로 삼아야 한다. 월남전은 외부에서 아무리 도와주려 해도 자위능력과 자위의지가 없는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뼈저린 교훈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우리는 총선 이후의 정국(政局)에서 위장평화공세와 반전(反戰)운동으로 국론분열을 획책하는 친북세력의 숨은 의도를 읽고 적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konas)


정 준(코나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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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짱    수정

    하지만 남쪽은 어땠니? 프랑스에 빌어 붙어서 민초들 뜯어 먹었잖아. 그렇더니 미국한테 붙고. 당연히 민초들이 누구를 더 좋아하겠냐? 당연히 호치민이지. 어떻게 지만원하고 똑같은 논리의 글을 쓸 수가 있냐</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4-04-29 오후 4: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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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짱    수정

    이것이 논설위원이라는 사람이 쓸 글인가? 베트남이 공산화가 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아닌가? 너그들이 베트콩이라고 얕잡아 부르는 그들은 너무나도 백성들을 사랑했고 프랑스-일본-미국과 대항해서 싸운 독립군들이었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4-04-29 오후 4: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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