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월남 패망의 교훈(4) 채명신 전 주월사령관 인터뷰

역사는 흥망성쇠를 되풀이하며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흘러간 역사 속에서 교훈 찾기를 주저한다면
언젠가 아픈 역사는 되풀이되기 마련이다.
한국전쟁과 월남전이라는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역사의 현장에서
군인으로 한평생을 살아온
채명신 장군(蔡命新,78. 전 주월사령관, 예비역 중장)을 만나
자유월남 패망 특집 그 네번째 순서를 꾸며 보았다.
베트남참전 전우기념사업회 회장을 오랫동안 역임하셨는데 최근엔 6.25참전전우기념사업회 회장도 맡게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우선 축하드립니다.
우선, 언제 월남에 가게 되셨는지요.
1965년 9월 25일 전투부대 파병을 위해 창설되는 주월 한국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당시에는 맹호사단장을 겸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1965년 10월 22일, 맹호사단을 지휘하여 퀴논에 상륙하였다. 그 후 사이공에 주월 한국군 사령부를 개소하고 초대 사령관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1969년 5월 1일부로 후임자에게 인계한 뒤 귀국하였다.
4월 30일은 월남패망 29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주월 사령관으로서 감회가 남다르다고 생각되는데 국군이 월남 파병할 당시의 상황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나라는 1950년 6.25전쟁을 자유우방의 지원에 힘입어 승리를 이끌수 있었다. 그 후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 국가방위의 한 축을 주한미군에 의지하고 있었는데, 1964년 베트남 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존슨대통령으로부터 파병요청을 받고 있었는데 우리나라는 1차로 1964년 9월 22일 140명 규모의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을 파병했다.
이어 2차로 2천명 규모의 비전투부대인 건설지원단을 파병하여 남베트남 정부의 재건사업을 지원했는데 남베트남 사태가 계속 악화됐다. 그러자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가 거듭 한국에 파병을 요청하게 됐고 전투부대까지 파견하면서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월남은 미군과 한국군의 대대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패망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는데 월남전 패망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또 월남 패망으로 인해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지금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가 월남패망 직전 상황과 똑같다는 지적을 많이 한다. 월남패망 원인 첫째는 손자병법에도 있지만 知彼知己다. 즉, 월남이 북월맹과 공산주의를 제대로 보지못했고 보려고도 안했고 제대로 알지못했다는 데서 모든 비극은 시작됐다. 당시 호치민이 앞으로 공산화되면 지금보다 10배나 잘산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것은 지금 김정일이 앞으로 통일되면 지상낙원이 된다고 말하고 다닌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북한 김정일과 호치민은 정말 다른 사람이다. 김정일은 온갖 호사스런 짓에 북한에 김일성 동상만도 3만개나 있다. 하지만 호치민은 그런 짓 안했다. 절대 동상을 못세우게 했고 베트콩처럼 똑같이 까만 옷에 샌들(그걸 호치민 샌들이라고 불렀다)을 신고 다녔다. 그래서 남북사람 모두 호치민을 존경하고 그를 따른다. 게릴라들은 최고지휘자 한사람을 보고 싸운다. 그러나 호치민이 69년 9월에 사망하고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아마 호치민이 끝까지 살아있었으면 월남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호치민 밑에 있던 사람들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호치민이 공산화 안한다는 말만 믿고있다가 호치민 사망..이후 달라졌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좌경세력들이 많다. 이 사람들 김정일 내려오면 자기들이 다 한자리 할 줄 알고 있지만 큰 오산이다. 6.25때 남로당 어떻게 됐나? 다 숙청됐다. 마찬가지다. 남쪽 베트콩들도 자기 가족 희생시켜가면서 충성했는데 북쪽 베트콩들한테 다 숙청당했다.
월남패망의 두번째 이유는 반미감정이다. 원래 베트콩들이 양민들 많이 죽이지 않았느냐. 자기들이 죽이고도 미군이 죽인 것처럼 선전하고 다녔다. 팔다리 날아가고 온통 피투성이가 된 잔인한 사진들만 찍어서 미 상원이며 하원에 뿌리고 다니면서 자 봐라 너희들의 아들과 남편이 월남에서 저지른 죄악상을 보라며 선전하니까 반미감정 생기고, 미국내에서도 빨리 철수하라고 아우성한 것이다.
월남패망의 세 번째 이유는 극도의 부패다.
월남에 가서 제일 처음 조사한 것이 월남 지도층 자녀 가운데 전쟁에 참가한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도 없더라. 돈 있고 권력있다는 집 자식들은 죄다 유학가고 군에 가도 편안한 곳만 차지하고 있더라.
월남이 얼마나 부패한지 예를 하나 들겠다.
내가 주월사령관 할 때 월남 대위와 소령 두사람 데리고 있었는데 상당히 엘리트들이었다. 그런데 그중 소령이 보직을 마칠 때쯤해서 나에게 추천서를 써달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자리가 '탄약보급소장' 자리더라.
그때부터 이렇게 군대가 썩었는데 싸워서 이기겠는가? 도저히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생각을 바꿨다. "이럴 때 차라리 우리가 챙길 수 있는 것을 모두 챙기자"라는 생각들더라 그래서 장병들에게 말했다. "월남에서의 戰果는 우리 장병들 피 한방울 흘리지 않는 게 전과다. 희생자 낼 이유가 없다. 작전은 국가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꼭 필요할 때만 하라" 는 지시를 내렸는데 부패라는 것이 아다시피 나라 망치는 길이다.
우리나라 부패한 걸 봐라..정치가 전부 기업과 결탁해서 자동차에 돈 넣고 얼마나 실을 수 있나 하는 걸 테스트할 정도니 당시 월남과 뭐가 다르냐..
네번째는 월남 각계각층에 월맹 스파이들이 거미줄처럼 깔려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국방장관 부관이 월맹이니 말 다하지 않았느냐... 대통령 측근 중에도 스파이가 있어서 회의하면 바로 1시간만에 베트콩이 다 알고있는 실정이었다. 군사나 정치 모든 분야에 베트콩 첩자들이 깔려있어서 정보획득도 하고 심지어 이간질까지 하고 다녔다.
무엇보다 월남전은 한국경제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중요한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보는데 월남전을 전후해 남북 경제상황과 파병을 하게 된 경위를 소개해 주십시오.
당시 남북관계를 보면 북한이 훨씬 우세했다. 춘궁기만 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엄청나게 굶어죽어가는데 북한은 1인당 800그램의 식량이 돌아갔다. 우리 국민소득 78불일 때 북한은 120불이었다. 우린 공군 전투기 한 대도 없었다. 북한은 야크기 211대, 대포 등 상대가 안되는 우세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걸 우박처럼 가지고 내려오는 바람에 3일만에 서울까지 함락당했다.
65년 당시 군사력은 우리보다 더 우세했다. 그때는 우리가 암흑이었고 북한은 전력이 남아돌아갔다. 그런 상태에서 미군이 빠져 나간다면 그날로 우리는 끝장이다. 미군이 월남에 지상군을 투입하면서 한국에 도와달라는데 안도와줄 수가 있나? 우리가 안 도와주면 한국에 주둔해 있던 미군을 빼가는데 그렇게 되면 북한이 도 언제 도발할지 모르는 상황인데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월남파병이라는 어려운 결정을 내린 것이다.
월남전은 민사작전을 성공한 전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도 이라크에 병력을 파견하는데 파병시 민사작전에서 유의해야할 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인민은 물이요 게릴라는 물고기다' 이것은 모택동의 유명한 게릴라 전략이론의 핵심이다. 전쟁의 승패는 누가 국민(물)들의 마음을 사로잡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베트남전 같은 상황에서는 주민(물)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 물과 고기를 분리시킬 수 있어야만 전쟁이 승리할 수 있다. 우리는 월남전을 치르면서 전쟁 내내 100명의 베트콩을 잡기보다 한명의 양민을 보호하라ꡓ는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특히 베트남은 노인을 공경하는 국가라 노인 공경을 최우선으로 했다. 그 점에서 미군 대민지원과 큰 차이를 보였는데 예를 들면, 똑같이 쌀을 주더라도 미군은 쌀을 싣고 부락을 다니면서 쌀부대를 몇 개씩 던져주고 갔다. 그렇지만 우리는 쌀담는 상자를 별도로 만들어서 촌장을 만나 공손하게 인사하고 쌀을 전달하다보니 자연히 친숙해지고 상대방도 감동하게 되었다.
반면에 이라크에서는 청소년을 잡아야 한다.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관심을 가지고 축구, 태권도 등을 가르치고 교육시설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면서 그들에게 친근함과 좋은 인상을 심어줘야한다. 즉 대민작전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우선해야할 것은 엄정한 군기와 예절, 그리고 친절함이 전쟁의 승패를 가늠하는 민사작전의 핵심이다
지금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는 사람들 주장에 의하면 한국의 젊은 청년들을 무모한 전쟁터에 보내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당시 월남전에도 파병을 기피하는 움직임이 있었을텐데 어떤 식으로 정신교육을 하셨는지요.
이라크 파병은 우리가 살기위해서 가는 것이다. 이라크 파병안하면 한미동맹은 그날로 끝이다. 동맹이 끝나면 여기 있는 미군 사단 다 빼겠다고 하지않았느냐. 그럼 그 다음에 어떻게 되나? 일차적으로 경제적인 혼란이 온다. 외국자본도 다 빠져나간다. 대학생 실업자 많다고 하는데 대학생들 어디가 취직하나...
그리고 군대라는 게 생명을 걸고 싸우러 가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때 우리 정말 죽으러갔다. 정글 속에서 싸워 이기지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지않느냐. 하지만 운명이란 건 모른다. 월남가서 죽을지 살지 모르지 않느냐. 모르는 운명 갖고 겁내기보다는 운명을 개척하려는 의지가 중요하다. 지금 어떻게 하나...걱정하며 벌벌 떠는 것보다 좋다, 한번 해보자. 죽더라도 한번 도전해보자며 운명을 극복하려는 용기와 결단력을 가지고 살 때 마음이 편하다. 그런데 우리 장병들이 그걸 쉽게 이해하더라. 한때 일부 언론이 월남전에서 한국군의 양민학살 문제를 크게 부각시켜 파장을 일으킨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군의 지휘관으로서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이 있어야할 것같습니다.
양민학살문제를 가지고 91년도인가...MBC 공개토론때 한양대 이영희교수,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 지만원박사, 나 넷이서 열띤 토론을 가진 적이 있다. 그런데 제네바협약에 전쟁의 규칙이란 것이 있는데 이에 의하면 게릴라건 뭐건 무기를 감춰갈 수 없다. 만약 감춰가면 정당한 행위가 아니라 테러다. .테러는 보복할 수 있다라고 명시돼 있다. 베트남에서 부락에 들어가다가 우리 장병들 많이 당하지 않았느냐..이렇게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테러를 당하면 상대방을 다 죽일 수 있는 것이다. 보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양민학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남녀노소 다 죽였으니 양민학살이라는 것이다.
원래 양민학살이란 일본군이 중국 쳐들어갈 때 남경주민 20만을 집단으로 죽이거나 2차대전때 독일군이 600만을 죽인 것처럼 조직과 명령계통을 통해 지시가 내려가서 학살한 경우를 말한다. 전투간에 이뤄진 것은 양민학살이 아니다. 그 말은 국제법상 법규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의 말이니만큼 논의할 가치도 없다.
주월 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하에게 사형을 선고한 사건이 있었지요.
바로 양민학살과 관련된 사건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당시 얘기를 들려 주십시오.
김종수 목사라고 비둘기 부대 소대장이었는데 월남에서 유일하게 사형을 언도한 사람이다. 김소위가 야간 매복 나갔다가 주민 7명이 접근하자 부대로 연행하는 과정에 주민들이 도망가자 총을 쏜 것이다. 그때 그 자리에서 5명이 주고 두명이 도망갔는데 그 사람들이 군청에 가서 한국군이 죽였다고 신고를 했다. 그 내용이 바로 언론에 보도되면서 문제가 확산됐는데 나중에 조사해보니 문제가 다소 있었다. 물론 전투중에 일어난 일이지만 엄정한 군기를 위해 사형을 언도했다. 그리고 무기징역을 받아 15년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월남전의 양상이 게릴라전이다보니 본의 아니게 민간인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그 이후에 김종수 소위는 형을 살고나와 전북 익산에서 목회일을 한다고 한번 연락이 왔더라. 그런데 자기가 사형수였다는 얘기를 신도들에게 얘기했더니 사람들이 말은 안해도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같다며 나를 한번 내려와서 당시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얘기를 해달라고 했다.
그래서 당장 내려갔다. 내려가니 그 지역 면장도 오고 그 지역 월남전 전우들도 다 모이고... 그래 교회가서 사실을 다 얘기하니까 그 이후부터 목회가 한결 수월해졌다고 하더라. 어쨌든 당시로는 어쩔 수 없는 형을 선고했지만 양민학살이라는 말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이다.
지난 해 동아일보 기자도 이 문제때문에 3일동안 와서 취재했는데 그 기자들이 나중에 그러더라...김소위에 대한 벌이 너무 엄정하지 않았느냐라고...미군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는데 우리만큼 과하지 않았다. 그리고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다 조사해보고 나서 앞으로 양민학살이란 말을 쓰지않기로 했다더라... 양민학살 운운은 어불성설이라며 그 표현은 안쓰기로 했다는데 옳은 말이다.
공산월맹이 '한국군은 미국의 용병이다'. '하루 1달러 받고 미국의 청부전쟁인 월남전에 끌려온다' 이렇게 악선전하면서 한국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려고 했다.
사령관님은 월남전 당시 미군과의 대등한 관계유지를 위해 많이 애쓰신 걸로 알고있습니다.
미군과의 대등한 관계유지와 일부에서 주장하는 용병이란 말에 대한 견해를 들려 주십시오.
한국전 당시 우리는 '미군의 희생의 대가로 생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한 역사적 진실이다. 그런데 이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우리 군은 미군과 대등한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들을 우위의 위치에 놓고 상대하는 풍토가 관행처럼 되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도 당당한 자유우방의 일원으로 파병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월남에서는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작전에 임하고 월남 정부와 협조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한국군 고유의 작전권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한국군이 미군의 작전지휘에 들어간다면 우리의 국익을 추구하는 것은 물론 공산군으로부터도 한국군이 미국의 용병으로 월남전쟁에 파병되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그래서 내가 직접 미군 지휘관들을 설득해서 한국이 독자적인 작전지휘권을 갖는데 성공했다. 또 파월국군은 우리나라 헌법상 3대 의무 중 하나인 징병제에 따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바탕으로 국가의 명에 의해 참전한 군인이다. 용병이란 말은 군사적 지식이 없는 識者들의 잘못된 표현이다.
젊은 네티즌들, 특히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패망할 당시 자유월남은 군사력이나 뭐나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월맹은 상대가 안됐다.
하지만 월남은 미군 최신의 대포나 탱크 한번도 제대로 못써보고 망했다.
전쟁은 무기가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한다. 사람중에서도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 즉 싸우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진 사람이 한다. 즉 전쟁의 주체는 사람이다.
그리고 사태를 똑바로 알아야 한다.
6.25나 월남을 봐라...자기 나라를 제대로 지킬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떤 가혹한 시련이 가는지 잘 알 수 있지않느냐. 역사를 똑바로 알아야한다.. 또 그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어야한다. 성공한 역사든 실패한 역사든 역사속에서 배울 점을 찾지못하는 민족은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다. (konas)
* 채명신 장군 약 력
1926년 출생
1948년 육사 5기 임관
5사단장
육본작전참모부장
주월 한국군 사령관 겸 맹호사단장
제 2군사령관
그리스, 브라질 ,스웨덴 대사
베트남참전 전우기념사업회 회장
현, 6.25참전전우기념사업회 회장
* 저 서
베트남 전쟁과 한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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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이 월맹에게 패망할당시의 정황이 오늘의 우리와 흡사하다고 하느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알려 주엇으면 좋겠다.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언론에서는 이것도 김정일의 비위를 건드릴까봐 보도를 않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4-04-30 오후 7:23: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