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와 온정주의
“친구가 차를 몰고 가다 과속을 해서 사람을 치었는데 당신은 그 차에 동승하고 있었다. 유일한 증인인 당신이 과속 사실을 숨기면 친구는 가벼운 처벌만 받게 되나 사실대로 얘기한다면 큰 벌을 받게 된다. 당신은 친구를 위해 법정에서 당시 그가 과속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할 용의가 있는가?”
네덜란드의 비교문화경영학자 폰스 트롬페나스 박사는 위와 같은 딜레마 상황을 설정하고 글로벌 기업의 지사에서 근무하는 40여 개국 매니저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졌다.
결과는 놀라웠다. ‘아무리 친구라 하더라도 진실을 이야기한다’는 비율이 캐나다 사람들은 96%에 이르렀고 미국·영국·서독도 90%를 넘었다. 반면 프랑스·일본·싱가포르 등은 60%대, 중국·인도네시아·러시아가 40%대를 기록했다. 한국은 26%에 불과했다. 38개 조사대상 국가 중 꼴찌였다.
트롬페나스 박사의 연구 결과는 국가별로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서 문화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차이를 보편주의와 특수주의로 설명하고 있다. 연구 결과는 캐나다·미국·영국·서독 같은 나라에서는 ‘보편주의 문화’가, 한국·중국·인도네시아·러시아 같은 국가에서는 ‘특수주의 문화’가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편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문화에선 규칙과 규범이 사회를 지배하며 사회구성원들은 규칙과 규범의 준수에 익숙하고 그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이런 사회에서는 규칙과 규범이 인간관계와 개별적 상황에 우선한다.
이에 비해 특수주의 문화란 원칙이 있기는 하지만 상황이나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문화적 특성을 말한다. 이 문화가 우세한 국가에서는 가령 범죄자는 처벌을 받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 사람이 친척이거나 친한 친구인 경우에는 원칙이 변경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방과의 친밀도에 따라 판단기준이 달라지는 것이다.
한국은 인간관계를 중시하고 인간관계에서도 정(情)이 중요한 ‘정(情)의 사회’다. 규칙과 약속도 중요하지만, 정을 위해서는 규칙과 약속을 과감히 왜곡하고 적절히 변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규칙대로 하거나 원칙을 너무 강조하면 살아가기 힘들다. ‘벽창호’이거나 ‘고지식한 사람’, ‘인정머리가 없는 사람’으로 통하기 쉽다.
이런 온정주의가 어쩌면 초고속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만든 힘이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인은 서로 의기가 투합하기만 하면 폭발적인 힘을 발휘한다. 야근도 불사하고, 주말도 반납하며, 공기를 단축시키고, 해외 오지시장을 개척한다.
개발도상국 시절에는 이러한 ‘온정주의’가 가난에서 탈출하는 데 추진력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한국은 세계 13위의 경제 대국이자 한국을 본받고자 하는 국가들을 거느린 선도국가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규칙보다는 인간관계를 앞세우고, 규범보다 정을 우위에 두는 온정주의를 고집하다가는 세월호 사고와 같은 대참사를 부를 수 있다.
이번 세월호 침몰사고는 법령과 규정이 없어서, 전담 기구와 인력이 없어서, 감독기관이 없어서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사고와 관련된 모든 기관에 규정대로 자신의 직무를 다하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일어난 인재(人災)였다.
앞뒤가 꽉 막힌 벽창호 같은 공직자, 편법이 통하지 않는 공직자들이 많아지길 기대한다.
김세원 (가톨릭대 교수)
* 출처 : 국방일보 20일자 16면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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