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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파락호’

Written by. 조동성   입력 : 2014-05-26 오전 9: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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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락호(破落戶)란 지난날 행세하는 집의 자손으로서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혹자는 근대 한국의 3대 파락호로 흥선대원군 이하응, 형평사(衡平社) 운동의 투사였던 김남수, 그리고 학봉 김성일의 종손인 김용환을 꼽는다.

 퇴계 이황의 제자로서 영남 남인의 시조이며 임진왜란에도 참전한 학봉 김성일의 13대손인 김용환(金龍煥, 1887∼1946)은 조선에서 몇 손가락에 꼽힌다는 노름꾼으로 안동에서 이름을 날리며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종갓집과 전답 18만 평, 현재 시가로 약 200억 원을 불과 십수년 만에 모두 거덜내고 만다. 도박에 빠져 아내가 아이를 낳는 줄도 모르고 땅 7백 마지기를 노름으로 날리고, 아내 손을 잡으며 “미안하오, 깊이 뉘우쳤소. 이제 달라지겠소”라고 굳게 약속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땅문서를 들고 투전판으로 달려갔다.

 안동의 노름판이란 노름판에는 모조리 끼었던 김용환은 초저녁부터 노름을 하다가 새벽녘이 되면 판돈을 모두 걸고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돈을 따면 좋고, 실패하면 도박장 둘레에 숨겨놓은 아래 사람들을 시켜 판돈을 덮쳐 유유히 사라졌던 김용환. 그러던 끝에 사당 신주까지 팔아치우려는 것을 문중 사람들이 뜯어말리기도 여러 차례. 그것도 모자라 시집 간 무남독녀 외동딸이 시댁에서 받은 돈마저 가로채 노름으로 탕진했다. 김용환은 노름꾼 아비를 둔 탓에 지은 죄도 없이 주눅들어 시집살이 하는 외동딸을 애써 외면한 무심한 아버지였다.

 그러던 김용환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세상을 등지고서야 그간 노름빚으로 탕진했다고 믿었던 돈은 모두 만주 독립군에게 군자금으로 보낸 사실이 알려졌으며 파락호 행세는 왜경의 눈을 피하기 위한 철저한 위장술이었음이 밝혀졌다. 김용환이 전 재산을 털어 남몰래 독립운동을 돕게 된 데는 어릴 적 일화가 크게 작용했다.

 할아버지 김흥락이 사촌인 의병대장 김희락을 숨겨줬다가 일제 경찰에게 들켜 종가 마당에서 무릎을 꿇는 치욕을 겪는 모습을 본 김용환은 항일운동에 몸바치겠다고 마음먹고, 식구들이 고초를 겪지 않게 하려면 은밀히 해야 한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거금을 아낌없이 희사한 것도 경탄할 일이지만 주색잡기, 노름꾼 등 불명예스런 비난 속에서도 식구들에게조차 절대 함구한 의지력 또한 놀라울 따름이다.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군 군자금을 대려고 철저히 노름꾼 노릇을 했던 김용환.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고 평생 주색잡기,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썼지만, 숨을 거두기에 앞서 “선비로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며 눈을 감았다. 또한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명가로서의 자긍심을 지키라고 가르쳐 후손들은 비록 가난하게 살게 됐으나 잘 사는 친일파의 후손보다 자랑스럽다고 했다. 반세기가 흐른 1995년에야 정부는 김용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우리는 과연 미래세대들에게 어떤 것을 가르치고 무엇을 물려 줄 것인가

조동성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안중근의사기념관장)

* 출처 : 국방일보 5월26일, 16면 ‘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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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인미소(pjw3982)   

    독립운동은 끝없이 해야한다...

    2014-05-26 오전 9:54:53
    찬성1반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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