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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서는 안 될 형제의 나라 터키

Written by. 장은정   입력 : 2014-06-21 오전 10:3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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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를 나눈 형제, 칸카르데쉬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 We are brother!"

 터키를 여행하면서 아마도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일 것이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유난히 반가워하고 먹을 것을 나누어 주기도 하며, 심지어 어떤 식당은 멀리에서 형제가 왔다며 돈을 받지 않기도 한다.

 어느 날은 블루모스크 앞의 의자에 앉아있는데 한 할아버지가 다가오시더니 대뜸,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으신다. 한국에서 왔다는 대답을 들으신 할아버지는 금세 눈시울이 붉어졌고, 주름 가득한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한국으로 파병되었던 군인이었고, 그 전쟁에서 친형을 잃었다는 이야기, 그 형의 시신이 대한민국 부산의 UN기념공원에 있다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전해 주신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에 터키는 15,000명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군인들을 한국으로 파병했고 이는 미국과 영국, 캐나다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숫자였다. 터키군은 1951년 금양장리(현재의 김량장동) 전투에서 중공군에 대승을 거두면서 그들의 명성을 세계에 떨쳤으며, 그 과정에서 1,131명의 숭고한 생명을 잃었고, 그 중 407명은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형제의 나라 한국을 위해 싸우는 일에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고, 한국인들을 피를 나눈 형제라는 뜻의 ‘칸카르데쉬’ 라 부르며 한국의 승리를 진심으로 기원했다고 한다.

 그들의 한국전쟁 참전에는 물론 국가적 이익이라는 목적이 있었다. 북쪽으로 구소련을 접하고 있던 당시, 소련으로부터 끊임없는 압박과 공격을 당해왔던 터키는 NATO 가입을 조건으로 한국에 군대를 파견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한국을 위해 싸우는 것은 곧, 조국을 위해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1차 파병을 위해 모집한 5,000명에 20,000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렸으며 떠나는 자도, 떠나보내는 자도 모두 슬픔보다는 기쁨으로 가득 찬 얼굴이었다고 전해진다.

  터키 군인들이 설립한 고아원, 앙카라 형제회

  진심으로 한국을 도왔던 그들은 전쟁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상처 입은 한국인들을 치료하고, 전쟁고아가 된 아이들을 돌보는 등 몸과 마음을 다해 한국을 도와주었다. 길가에 홀로 버려져 울고 있는 아이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막사로 데려와 재워주고 먹여주며 보살펴주었다. 때때로 그들은 아빠를 잃은 아이의 아빠가 되어주었고, 엄마를 잃은 아이를 엄마처럼 따뜻하게 보듬어주었다. 그렇게 데려와 보살피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면서 아예 고아원을 설립했고 그 이름을 ‘앙카라 학원’ 이라 지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 이름을 유지하던 앙카라 학원은 지금은 다른 이름을 사용하는 보육원으로 바뀌어있지만, 그 당시 앙카라 학원에서 함께 생활하던 아이들은 성인이 된 지금도 ‘앙카라 형제회’ 라는 이름으로 그 모임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아수라장의 전쟁터에서 아이들을 보살피고 사랑해주었던 터키군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에 다시 한 번 뜨거운 감사의 마음을 느낀다.

  애증과 감동의 세월, 50년

  길었던 한국전쟁이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간 용사들은 자신이 보고 느낀 한국에 대해서 여기저기 전달해주기 시작했고, 그들 사이에서 퍼져나간 한국은 어느새 터키인 모두의 형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진심으로 한국을 형제라 생각하며 도움을 주었던 터키에 대해서 한국을 그렇지 못했다. 1988년 한국에서 올림픽이 열렸을 당시에 한국을 방문했던 터키의 기자들은 한국 사람들에게 형제의 나라, 터키를 아느냐고 자랑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한국인들로부터 돌아온 것은 터키란 나라를 잘 모르고 있다는 실망스런 대답이었다. 형제의 나라라고 칭하며 늘 마음속으로 한국을 그려온 터키인들에게 그것은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스스로를 코렐리(한국인)라 부르며 한국을 짝사랑해온 참전용사들에게는 더없이 슬프고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전쟁의 폐허속에 나라를 일으키겠다는 일념으로 바쁘게 살다보니 주변을 둘러 볼 여유조차 없었던 까닭이다. 터키로 돌아간 기자들로부터 ‘이제 짝사랑은 그만하자’ 라는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들은 홀로 눈물을 훔치고 가슴속에 한국을 묻어야만 했다.

  46년이 지나서야 갚은 은혜

  그런 그들의 마음이 멀고 먼 한국 땅까지 전해진 것일까. 한국인들 사이에서 터키라는 나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그 첫 번째는 1999년 8월, 터키에서 발생한 대지진이었다. 100년만의 대지진으로 인해 14,000여 명이 사망하고 50,0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던 최악의 대참사였다. 당시 한국 정부에서는 적은 액수(당시 약 7,000만원)를 구원자금으로 보냈는데, 이를 보다 못한 몇몇 사람들에 의해 자발적인 모금운동이 벌어졌다.

 신문사와 유명인들까지 합세한 모금운동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터키라는 나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만들었고, 두 나라 사이의 스토리를 알게 된 사람들이 그제서 터키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며 모금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됨으로써 모금운동은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40일 동안 계속된 모금운동으로 23억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성금이 모이게 되었고, 이 모금운동의 과정이 그대로 터키의 방송을 타게 되면서 터키 국민들이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운명처럼 만난 두 나라, 2002 한일월드컵 3.4위전

  또 하나의 사건은 모두가 기억하는 2002년 한일월드컵이다. 터키는 48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게 되었고,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경기를 치룰 수 있기를 기도했다고 한다. 그들의 바람대로 그들은 한국에서 경기를 하게 되었고, 마치 운명처럼 한국과 3,4위전에서 만나게 되었다.

 터키와 한국은 형제의 나라라는 말이 인터넷을 통해 빠르게 확산되면서 경기장에는 터키와 한국을 동시에 응원하는 한국인들의 붉은 물결이 춤을 추었으며, 터키인들이 한 번도 보지 못한 초대형 터키 국기가 관중석에 펼쳐지면서 터키인들은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 때의 감동을 보답이라도 하듯이, 2006년 독일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한국인들을 응원하기 위한 터키인들 약 100여 명이 사비를 털어 독일까지 날아와 붉은 악마가 되어주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한국인들이 터키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전쟁에서의 터키의 업적에 대해 누구하나 자세히 설명해주는 이가 없었고, 전쟁으로부터 50여 년의 시간이 흐르도록 터키를 방문한 한국의 대통령은 단 한명도 없었다.

 2005년 故 노무현 대통령이 한국의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터키를 방문했을 때, 수많은 인파들이 몰려 환영의 물결을 이루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집집마다 창문에 태극기와 터키 국기를 내걸었고, 한국의 대통령을 환영한다는 현수막도 자발적으로 제작했다.

 한국전쟁 이후 55년 만에 터키 땅을 처음 밟은 한국의 대통령을 그들은 열렬히 환영하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한국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의 한국에 대한 사랑이 더 이상 짝사랑이 되지 않도록, 그들이 다시는 서운한 마음을 가지지 않도록 한국인들이 좀 더 터키에 관심을 갖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길 바란다.

 60여 년 전, 그들의 숭고한 희생과 사랑으로 인해 오늘날의 한국이 있다.

 부디 그것을 잊지 말아주기를, 저 멀리 어딘가에 한국을 사랑하고 형제라 칭하는 터키인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장은정 여행작가

* 출처 : 월간 자유 6월호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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