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6·25를 생각한다>‘북진통일’과 ‘서울사수’
미군의 철수를 저지하지 못한 데다 기대했던 미국의 원조도 난항에 부딪치자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은 한국 국민을 단합시키고 한국민과 미국 정부를 자극하기 위해 단독으로라도 북진 통일을 하겠다고 주장했다.
‘북진 통일!’ 그야말로 매력적인 구호다. 그러나 다분히 정치성을 띤 구호다. 신성모(申性模)국방부장관은 기회 있을 때마다 대통령의 주장을 대변했다.
“만일 명령만 내린다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습니다. 국군은 오직 명령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채병덕(蔡秉德)육군총장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국군은 동양 제일입니다. 만약 남침 기세가 보인다면 이쪽에서 먼저 압록강까지 쳐 밀고 갈 것입니다.”
북진 통일은 당시 대한민국 국민의 기대였고 희망이었으며, 그때의 시대적 분위기였고 추세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구호에 그친 북진 통일은 한국 국민에게 통일의 환상과 국군이 세계 최강이라는 허황된 바람만 불어넣어 주었고, 국방 수뇌들에게는 터무니없는 허풍만 일삼게 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에는 한국에 군사 원조를 제공하면 한국이 먼저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까 해 원조를 꺼리게 만든 역효과를 가져왔다. 후일 북한이 국군이 오히려 북침했다는 엉터리 주장을 펴는 데 역이용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을 제공했다.
‘서울 사수!’도 마찬가지다. 의정부가 적의 수중에 떨어지기 직전인 1950년 6월26일 오전 10시 군 원로 회의가 있었다. 이 회의에서는 ‘서울 사수냐, 한강선 방어냐’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먼저 광복군 출신의 김홍일(金弘壹)장군이 서울 사수론에 문제를 제기했다.
“지금 우리는 가장 불행한 방법으로 난국을 수습해야 할 처지가 됐습니다. 서울 사수만을 고집해 아까운 병력을 소모시킬 것이 아니라 효과적인 지연전으로 병력을 한강 이남으로 철수, 한강선을 방어해야 합니다.”
그러자 채육군총장이 벌떡 일어났다. “대통령 각하의 명령은 서울 사수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 몸을 바쳐 서울을 사수할까 합니다.”
신장관이 총장을 옹호하고 나섰다. “채장군 말대로 서울은 사수해야 합니다. 대통령 각하의 명령입니다.”
김장군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통령 각하가 서울 사수를 명령했다고 해도 그것이 국가나 민족에게 커다란 손실을 가져온다고 판단될 때는 바른 건의를 드려 명령을 다시 내리게 해야 합니다.”
수도 서울을 적에게 빼앗기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어떤 일이 있어도 서울은 지켜야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적절한 군사적 대응책과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이를 무시하고 군 지휘부가 무턱대고 서울 사수만을 고집함으로써 그 결과는 어떻게 됐는가.
서울 사수 방침 때문에 한강 이북의 국군 부대는 병력과 공용화기·장비의 태반을 잃고 말았다. 국군의 서울 사수 말만 믿고 남아 있던 서울 시민들은 적 치하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희생을 치러야 했다.
국회의원을 비롯한 많은 인사가 납북돼 갔다. 이대통령과 정부는 허둥지둥 서울을 빠져 나갔고 “몸 바쳐 서울을 사수하겠다”던 채육군총장도 한강교가 폭파되기 직전 한강 다리를 건너 서울을 빠져 나갔다.
북진 통일과 서울 사수로부터 우리는 정치가의 정치적 구호나 수사(修辭)에 군인이 휘말려서는 안 된다는 것과 군인이 군사적 판단을 내릴 때 정치 논리에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 6·25가 우리에게 준 또 하나의 교훈이다.
<국방일보/조승옥 철학박사·육사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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