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흔적을 안고 사는 사람들
영광의 뒤안길
전쟁의 흔적을 안고 사는 사람들

“내 남편 1951년 음력 5월2일에 아침 먹고 맘먹고 오는 그날은 논에 일을 간다고 가 논에 거름 펴고 집에 오는 길에 누가 술 먹자고 했는지 술 한 잔하고 집에는 아직 오지 않은 찰라, 이거 무슨 날 벼락. 면직원이 붉은 딱지 웬 말인가 한 장의 종이 줘 그거 가지고 접심에 밥도 못해주고 그날따라 밥도 없어 앞집 윤영운네서 밥을 그것 또한 음력 5,2일 날 오후 2시쯤 먹고 밥할 시간도 없어 오후 4시 집을 나서며 면 소 앞에 소집 이라 하며 남편 하는 말 ‘나오지 말고 들어가라 내가 지금 군인 가서 성공하면 만나고 아니면 이별이다’고 말한 그날 이별 37년 , 그 말끝에 영수, 민수 잘 부탁하고 자기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동생 부탁한 그날 지금도 내 눈에는 그 모습 변치 않고 잊을 수 없는 나, 고거 살고 죽는 걸, 가진 수모 다 나를 주고 간 당신, 여보, 자기라고 할까....”
남편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진 빛바랜 종이위에 눈물로 번져 얼룩진 일기장.
한국전쟁의 가슴 아픈 가정역사를 지닌 박현자(51)씨는 시어머니가 전쟁터에서 잃은 남편의 애절한 망부가를 37년이 지나서 다시 쓴 일기장을 꺼내 보면서 여전히 눈물을 닦아낸다.
지난 6일, 한국전쟁 당시 전사했던 박씨의 시아버지가 전쟁터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50여년 만에 공개한 그녀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거룩한 애국의 영광 뒤에 가려진 가족사를 풀어 놓는다
한국전쟁 당시 한 병사의 가족애와 애국심이 상세히 소개된 편지로 관심이 더욱 높아졌던 시아버지의 편지를 보훈처에 보낸 박씨는 얼마 전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형제애를 그려낸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본 후 감동을 받아 전쟁을 모르는 전 후 세대 젊은이를 위해 보훈의 달의 맞아 공개를 하게 됐다.
그녀의 시아버지인 고 김종섭하사는1953년 4월12일 강원도 금화지구 전투에서 전사를 했으며 그녀의 친정아버지 박병용씨(당시 상병) 역시 같은 해에 경기도 양구지구 전투에서 전사했다.
기름을 먹여서 50여 년간 보관된 편지를 김 하사의 부인이자 박씨의 시어머니가 지난 98년 세상을 떠나면서 며느리인 박씨에게 가보로 물려줬고 박씨는 남편과 함께 부모님이 그리울 때마다 자녀들을 앞에 놓고 편지를 열어보곤 했는데 2년 전 남편마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 홀로 편지를 지키고 있다.
“제 시할아버지는 33세에 돌아가셨고 시아버지는 24세에 전쟁터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남편이 4살 이었지요. 시어머니께서 가장의 역할을 잘 해냈듯이 남편 역시 세상을 떠났기에 시어머니처럼 가장이 되었지요. 그러기에 더욱 더 먼저 가신 분들이 그리워지네요”
말이 이어질 때마다 흘리는 그녀의 눈물은 감상적인 나약함이 아닌 영광의 뒤안길에서 겪어내야 하는 남겨진 가족들의 인고의 그림자다.
“제가 어머니의 태중에서 태어나기 2개월 전에 아버지도 전쟁터에서 돌아가셨어요, 하나 있는 오빠도 제가 태어나기 전에 피난길에서 죽었는데 아버지마저 그리 되시니 그 한을 못 이겨내신 어머니는 제가 8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철없는 저는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우리 아버지는 어디 있냐’고 어머니께 물었지요. 그때 어머니는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말씀을 주셨는데 ‘네 아버지는 김일성과 싸우다 김일성의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저는 김일성에게 복수하는 마음으로 원수를 무찔러야 겠다는 마음을 키워왔지요, 지금 생각하면 그 어린나이에 뭘 안다고 그런 마음을 가졌나 싶어요”
전쟁은 참으로 많은 흔적을 남기기도 하지만 있어야 할 것 마저 사라짐을 주기도 한다.
8살에 혼자가 된 그녀는 여러 곳의 친척집을 다니면서 성장을 해야 했고 가족의 정이 그리워 일찍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니 남편이 얼마나 잘 해주나 몰라요. 시어머니도 귀여워 해주시고 넉넉하진 않지만 어려서부터 외로움을 겪은 터라 4자녀를 낳고 재밌게 살았지요, 하지만 사업실패로 점점 무기력해진 남편의 모습을 지켜 볼 때면 가슴이 저리도록 아팠습니다. 그때마다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시아버지 생각이 많이 났지요”
남편이 4살 때 홀로된 시어머니는 시아버지의 유언처럼 남은 두 아들을 열심히 다독이며 키웠듯 그녀는 현재 성남시에서 작은 한복점을 운영하면서 근근이 생계만을 유지하고 있다.
“요즘사람들은 이렇게 작은 가게에선 한복을 맞추지 않아요. 다들 큰 곳으로 가서 하지요. 어떻게 여름을 날지 막연하네요. 막내인 아들이 5학년 때부터 바느질일을 해서 살아왔는데 점점 더 어려워져요. 이렇게 힘이 들면 남몰래 시어머니의 일기장을 보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시아버지가 그때 전쟁터에만 안나갔어도, 친정아버지가 그때 돌아가시지만 않았어도 저나 남편의 인생이 바뀌었을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 눈물이 멈추지 않아요"
박씨는 살아가는 것이 버거울 때면 시아버지가 잠든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는다.
"시아버지도 24세의 젊음으로 먼저 가셨고 제 남편도 단명을 했지요. 거기다 친정 식구는 모두 6,25전쟁으로 단명을 했고요. 이게 무슨 운명인지 모르겠어요"
현재 부녀방범대원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박씨의 고백은 질곡의 삶을 살아온 강한 희망으로 맺어진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인한 빚과 병원비가 빚으로 남아 있어서 제가 지금은 너무나 어렵지만 이 상황에서 조금만이라도 벗어나면 저와 같은 전쟁의 피해 이웃들을 위해 마음과 물질로 마음을 나누고 싶은 꿈이 있어요. 아직은 결혼 안한 아이가 셋이나 있고 아들도 이제 막 제대를 해서 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있어 전보다 더 어렵지만 먼저 가신 분들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그 분들의 삶까지 더불어 기리는 그런 인생을 살아야겠지요"
차라리 그녀가 신에게 전쟁으로 인한 자신의 가족사를 보상해 달라고 억지를 부릴 수 있다면 그녀 역시 고통이 덜 할 것이다.
전쟁은 남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전쟁은 어른들만의 것도 아니다.
전쟁을 좋아하는 국민도 위험하지만 전쟁을 잊어버리는 국민은 더 위험하다는 말이 있다.
쉼 없이 흐르는 그녀의 눈물은, 전쟁을 몸과 마음으로 처절하게 겪어 낸 남겨진 가족만이 영광의 뒤안길에서 흘리는 눈물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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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사연이다. 우선 국가는 이러한 원호/보훈가족을 좀더 보살필수 있는 노력을 북한 원조보다 우선해서 해야 할 일이다. 민주화공로자들의 보상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다 우선 순위를 자못 따르면 될것도 망할수 있음이라... 위정자들의 옳바른 치정이 아쉽구나....</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
2004-06-29 오후 6:47: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