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뉴스 글씨확대글씨축소스크랩

停戰 3일 앞두고 붙잡힌 어느 국군포로!

Written by. 이현오   입력 : 2015-07-25 오전 11:43:08
공유:
twitter facebook
소셜댓글 : 1

 “제가 중공군에 붙잡힌 날은 7월24일 이었습니다. 바로 금성지구 전투에서였습니다”. 가녀린 목소리, 이어질 듯 끊어질 듯 이야기가 조금 더 길어질수록 앉아 있음에도 힘이 들어 보였다. 말이 꼬이기도 한다. 알아듣기가 어려워진다.

 대한민국재향군인회가 24일 주최한【국군포로 송환정책 추진방향 토론회】에 참석한 한 귀환 국군포로의 얘기다. 순간 객석에서는 ‘아!’ 하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휴전협정 조인을 불과 3일 앞두고 적에게 붙잡혀 형언키 어려운 인고(忍苦)의 세월을 겪어야 했던 한 노병의 피맻힌 삶이 떠올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의 불법남침으로 3년1개월에 걸쳐 동족간의 처절한 피를 흘린 6·25한국전쟁이 정전협정 조인을 바로 눈앞에 두고 양측이 한 치의 땅이라도 더 빼앗기 위해 밀고 밀리는 접전이 전 전선에 걸쳐 이어지는 속에 중공군은 한국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으로 아군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이 금성지구 전투에서 위생병으로 참전해 분투하다 생포돼 북한에 억류 포로생활을 하다 귀환한 국군포로 000씨가 향군 주최 토론회에 참석, 자신이 북에서 겪은 포로생활의 일 단면을 증언해 나가자 청중석에서는 한마디라도 더 듣기 위해 귀를 세우는 모습이 역력했다.

 “저는 19세에 제주도에서 입대해 훈련을 받고 부산을 거쳐 대구 육군병원에서 위생병으로 근무했습니다. 그러다 1952년 7월 상부의 명에 의해 금성지구 전투에 참전했습니다. 53년 7월 중공군은 3, 5, 6사단 등 6개사단을 포위했습니다. 저는 포로가 돼 북으로 끌려가 생활하게 됐습니다.”

 말소리는 낮고 어눌했지만 차분하게 그 때 그 날을 또박또박 발표해 나갔다. 간혹 어떤 부분에서는 복받치는 음성으로 떨림이 이어지기도 했다. “북한에서 국군포로는 인간 이하의 천대와 압박을 받았습니다. 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북한은 인간으로서는 살 수가 없는 나라입니다.” 19세에 참전, 꽃다운 나이에 적의 포로가 돼 동토의 땅 김일성 - 김정일 치하에서 인간 이하의 모진 고초 아래 목숨을 부지해야 했을 한 참전용사, 국군포로의 참담한 인생이 감내하기 어려운 아픔으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그래도 김일성 때는 식량을 배급받아 먹고 살 정도의 실정은 됐습니다. 그러나 김정은 때는 배급에는 관심도 없고 된장 간장도 자체 해결을 해야만 했습니다. 천대와 멸시는 뭐라 말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파서 병원이라도 가야하면 진단서를 떼야하고 감시가 바로 따릅니다. 집을 옮기려 해도 멀리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20년 동안 탄광생활을 했는데, 탄가루를 다 마셔야 했으며, 본연의 일을 하면서 시간 연장근무를 해야 하고 다른데 가서 또 일을 해야만 합니다. 하루 이틀이 아닌 그 생활이 얼마나 고달픈지...”

 “김일성 때는 노동임금을 지급했습니다. 하지만 김정일 때는 임금은 고사하고, 배급도 없습니다. 노동자들은 스스로 살길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산에서 나무를 베어내고 강냉이라도 심어야 먹고 살수가 있습니다. 국가가 생산을 해서 그 생산된 물건을 노동자들이 내다 팔아야 국가에도 들어가고, 그래야 노동자들이 먹고 사는데 생산을 못하니 그럴 수가 없는 겁니다. 장마당에서 물건을 팔려고 하면 보안원들이 또 빼앗아 갑니다. 어떻게 살수가 있겠습니까?” 아마 90년대 중반 이후 기근과 식량부족으로 300여 만명으로 추측되는 아사자가 발생한 ‘고난의 행군’ 기간을 곁들여 표현한 듯 했다.

 그의 회한어린 삶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북한에서는 우리들 국군포로들을 ‘국군포로’가 아닌 ‘괴뢰군’이라고 불렀습니다. 국가가 인정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남한에 대해서도 ‘남반부 인민들을 식민지에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하면서 ‘민족해방운동’한다고 했습니다. 6·25전쟁을 자기들이 저질러 놓고도 남한이 했다고 억지주장을 계속 했습니다.”

 지금까지 ‘북한에는 국군포로가 단 1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며 아예 우리 정부의 국군포로 송환 얘기에는 귀부터 닫아 버리는 북한집단에 대해서도 이유 있는 얘기를 꺼냈다. “국군포로가 없다고 하는 이유는 1956년 5월 (북한당국이) 국군포로들을 제대시키고 공민증(우리의 주민등록증에 해당)을 주었습니다. 공민증을 주었으니, 우리는 사실상 국군포로지만 공민(북한주민)이 된 겁니다. 억지주장입니다.”

 정부에 대한 항변의 말도 이어졌다. “대한민국은 북한의 술법을 모릅니다. 본질을 알아야 하는데, 모르니 그런 겁니다.”

 북에서 태어난 자녀들의 진로에 대한 설움도 털어놨다. “국군포로들도 북에서 배우자가 있고 자식들이 있습니다. 국군포로 자녀는 대학에도 가지 못합니다. 경제문제도 그렇지만 성분 자체가 (대학에 갈) 형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이 소학교 때는 모르지만 중학교에 들어가면 (자기 자신이) 국군포로 자식인 것을 알고 부모에 대한 원망의 마음을 갖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성분이 나쁘면 대학도, 좋은 직장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

 통일 이야기도 꺼냈다. “여기 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한국사람 기술이 얼마나 좋은지, 통일되면 중요하지요. 후손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북에 억류되면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그의 말에 힘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만큼 노쇄하고 심약해진 때문으로 보인다. 더 많은 얘기를 듣고 싶었지만 서둘러 마무리 지어야 했다.

 지금 우리사회는 1994년 故 조창호 육군소위가 국군포로로는 최초로 귀환해 2010년(이후 현재까지 없음) 까지 총 80명의 국군포로가 귀환했다. 이 중 39명이 사망하고, 41명이 생존해 있다. 이들 생존자들의 평균 연령이 85세, 최고령자는 91세에 이른다.(국방부 발표)

 국군포로 송환에는 여러 가지 문제와 난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어떤 난제보다도 ‘시간이 없다’는 게 가장 큰 포인트일 수 있다. 인간의 수명은 한정이고, 시간의 흐름은 그 어떤 것도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 날 토론회에서 많은 얘기가 나왔다. 일의 우선순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토론회를 참관하면서 요구하고 싶은 것은 이 ‘시간이 없다’는 의미를 무엇보다 잘 각인해 달라는 주문이란 것이었다.

* 금성지구 전투란?

금성 전투는 한국 전쟁 말기인 1953년 7월 휴전이 임박해질 즈음, 경기도 금성 지역 북방에 위치한 중공군과 국군이 치른 전투이다. 7·13 공세라고도 한다. 중공군은 한국군 1만5천명에 대한 소멸계획을 수립, 중공군 4개 군 산하 12개 사단의 병력을 동원하여 국군 3사단과 5, 6사단 등 5개 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금성 지역의 돌출부에 대한 공세를 감행했다.

전투 결과 국군은 1,701 명의 전사자와 7,548명의 부상자 발생 외에 4,136명이 사로잡히거나 실종되었으며, 실종자 대부분은 포로가 되어 휴전회담에서 논의된 포로와는 별도로 취급돼 포로 교환 당시에도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중공군은 27,216명이 전사하고 38,700명이 부상당했으며, 186명이 포로가 되었고 1,428점의 무기를 노획 당했다.

이현오 (코나스 편집장. holeekva@hanmail.net)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관련기사보기
facebook twitter 책갈피저장 메일보내기
소셜댓글
로그인선택하기 트위터 페이스복
원하는 계정으로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여 주십시요.
입력
  • 순창군(승민)(gidrns0626)   

    현존하는 국군 포로의 귀환에 향군이 앞장서야 한다.아니 억울하게 포로로 생활하다 돌아가신 분들의 혼 까지도 모셔올수 있도록 향군이 노력해야 한다.

    2015-07-28 오전 9:04:13
    찬성0반대0
1
로그인하세요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