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54돌- 당시의 안보환경 재연(再演)은 안 된다
사상 유례가 없는 민족상잔극(劇)이 시작됐던 54년 전의 6•25-. 놀랍고 안타까운 것은 역사의 교훈으로 우뚝 서야 할 '6•25의 진상과 실체'가 지난 54년 동안의 풍진(風塵) 속에서 정치적•이념적 잣대에 의해 흠집이 나고, 덧칠이 가해지는 수모를 겪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은 새벽 4시 서쪽 옹진반도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38선 전역에 걸쳐 총공격을 개시했다. 우리 국군은 3일만인 6월28일 서울이 함락되고, 7월4일 한강 방어선이 무너졌으며, 7월5일 오산전선에 배치된 미(美)스미스부대마저 참패하여 계속 밀리던 끝에 두 달도 안 되어 낙동강전선까지 후퇴해야 했다.
당시 낙동강선(線)에서의 방어진지 구축과 그 해 9월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안겨 준 '9•28 수복' 그리고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후퇴한 후 그 이듬해 3월14일 수도 재탈환은 거의 전적으로 미군의 막강한 전력(戰力)과 희생에 힘입은 것이었다.
알고 보면 젊은 세대들이 오늘 ‘반미(反美)를 외칠 수 있는 자유’까지도 미국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역사의 반전(反轉)은 이처럼 어이없을 정도로 아이러니컬하다. 그 후 54년이 흘렀지만, 오늘 우리가 맞고 있는 안보환경은 당시와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오늘 우리는 미국의 해외미군 재배치계획(GPR)에 따라 주한미군 1/3 철수에 이어 주한미군의 추가적인 철수가 예상되는 시점을 맞고 있다. 6•25 직전 미국 국무장관 딘•애치슨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하던 54년 전과 마찬가지로 ‘안보 공백(空白)’을 우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당시 우리 국군은 병력과 장비 면에서 북한의 1/2수준의 열세에 놓여있으면서도 북한 인민군을 과소평가하고 방어계획도 수립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아침은 서울에서, 점심은 평양에서”라는 구호를 외쳐대며 실속 없이 '북침(北侵)통일'만을 외치고 있었다.
육본 정보국은 수차 ‘북한의 남침(南侵) 임박 보고’를 상부에서는 묵살 또는 외면했었고, 50년 5월1일 노동절을 기해 발령된 영내대기 및 비상경계령을 6월 23일 24시를 기해 해제함으로써 전군(全軍)은 사실상 휴무에 들어갔으며, 6월24일(토요일) 12시를 기해 병력 1/3민이 영내 대기하고 나머지 2/3의 병력은 외출 외박 영농휴가를 떠난 상태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6월24일 저녁 사단장급 등 주요지휘관이 총망라되다시피 장교클럽 개관연회(宴會)에 참석하여 밤새워가며 주석(酒席)과 댄스파티를 벌였고, 6•25발발 2개월 전인 4월22일 전군의 사단장 연대장 급의 대폭적인 인사이동으로 각급 지휘관들이 부대상황과 전황을 익힐 여유가 거의 없었으며, 북한의 기습남침이 있은 후에도 일부 지휘관의 소재가 묘연했던 점이다.
오늘의 우리 안보환경은 어떤가. 주한미군 전력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235억 달러 상당이고, 우리가 그 자산을 대체하려면 290억 달러(약 35조원)의 예산이 필요하며, 한반도에 유사시 미군이 동원하는 장비까지 포함할 경우 그 가치는 3470억 달러(464조원)에 달한다. 열우당 조성태 의원(전 국방부장관)이 밝힌 내용이다.
사정이 그러한데도 좌파 민족주의자들은 ‘친북•반미’(親北•反美)를 외치며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지켜내고 이만큼이나마 발전시켜온 정통보수 세력을 ‘수구꼴통’으로 몰아붙이면서 새 판을 짜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북한의 ‘대남(對南) 체제전복을 위한 오판’을 부를 수도 있는 위기상황이다.
우리는 제헌국회 시절의 ‘남로당(南勞黨)프락치사건’을 기억한다. 당시 국회는 주한미군이 철수를 결의하여 미군(美軍)이 떠났고, 6•25 발발 1개월 전 육군 작전국의 ‘방어진지 공사를 위한 예산요구’를 거부했었다. 6•25’가 발발한 것은 미군철수 1년만의 일이었다. 17대국회의 향방을 주시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6•25 직전 1년간 북한의 위장(僞裝) 평화공세는 기만(欺瞞) 그 자체였다.
북한의 김일성은 49년 6월30일 ‘평화적 통일방책 선언서’라는 것을 발표하면서 그 후 5개월간 인민유격대를 8차례나 남한에 침투시켰다. 6•25발발 한달 전(5월말) 그는 남침 작전계획을 최종 승인하고도 6월7일 이른바 ‘평화적 통일방책 추진에 관한 호소문’을 위장 발표했었다.
바로 그 시점으로부터 3일 후인 6월10일 김일성은 비밀군사작전회의를 열어 전(全)전투부대에 ‘6월23일까지 38선 병력 배치를 끝내도록’ 지시하고도 북한에 억류 중인 조만식(曺晩植)선생과 남한에서 검거되어 구금 중이던 북한 거물간첩 김삼룡•이주하를 맞교환하자고 남한정부에 제의했었다.
우리 정부는 6•25 발발 직전 북한의 ‘통일협상을 위한 납북국회회담 제의’를 받고서 저들의 위장(僞裝) 평화공세 계략도 읽지 못한 채 그들이 제시한 회담일(7월6일)을 앞두고 국회회담 준비에 몰두하고 있을 때 북한은 기습 남침을 감행했다. ‘국회회담 제의’는 철저한 6•25 남침 위장용(用)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의 상투적인 수법은 이렇듯 악랄하다.
한국정부의 햇볕정책은 북한당국의 '민족공조론‘과 맞물려 그간 북한에 지난 10여년동안 대(對)북한 경제지원 규모는 비료와 쌀 등 모두 33억 4200만 달러 상당에 달하는 것으로 얼려져있다. 금강산관광과 관련하여 북한에 건너간 금액만도 5억6800만 달러(약 6610억원)에 이른다.
우리는 '평화비용' 명목으로 이 엄청난 경제지원을 하면서도 북한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남북대화와 남북교류가 물꼬를 텄다지만, 북핵문제•생화학무기•120만의 군(軍)병력•엄청난 양(量)의 장사정포(長射程砲) 휴전선 근접배치 등 ‘군사적 긴장상태’는 여전하다.
6•25남침전쟁이 있은 지 54년이 지났지만, 그들의 기만과 허위에 찬 대남 전략전술과 군사적 대치상황 역시 달라진 것은 전혀 없다. 우리의 대북(對北)지원에 따라 저들이 남북대화와 교류에 응하고 있다고 해서 북한이 남침야욕을 포기했다고 보는 시각은 망발이다.
우리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에 일희일비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6•25전쟁은 우리가 적(敵)의 말만 믿고 안보를 게을리 했을 때 그 결과가 얼마나 혹독한가를 우리에게 일깨워주었다. 평화와 통일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열망 속에서 남북교류 빈도는 높아졌을망정, 김정일의 대남 적화폭력혁명 노선도 그대로이고, 남북한 불신과 군사적 대치 역시 그대로이다. 달리 말해 현시점의 한반도 안보환경은 54년 전과 다를 것이 없다.
국방과 안보는 우리의 생명선이다. 국가안보에 대한 방심은 위난(危難)을 불러들인다. 당시의 안보상황이 재연되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 (konas)
정 준 (코나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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