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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의 ‘6·25의 진상 왜곡’ 서둘러 바로잡아야한다

Written by. 정준   입력 : 2004-07-01 오전 8: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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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週) 일요일 모처럼 청계산에 올랐다. 우리 일행은 산 중턱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중 일단의 여대생 그룹과 조우했다. ‘6·25’ 54돌을 닷새 앞둔 터라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6·25에 관한 젊은이들의 인식’에 대한 탐색으로 시작됐다.

“그야 당연히 북침(北侵)이죠”

“미국이 북한의 남침(南侵)을 유도한 것 아네요?” 

“초등학교 시절에는 남침(南侵)으로 배웠는데 대학에서는 ‘북침(北侵)설’이 지배적이라서 헷갈리고 있어요.” 대답이 제각각이었다.

누님과 함께 산에 오른 12세쯤 됨직한 어린 학생은 ‘6·25’라는 어휘조차 낯설어 했다. 누구와 싸운 전쟁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희생과 고통을 안겨준 동족상잔의 비극 6·25의 실체와 진상이 이토록 왜곡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 이후 반세기를 건너뛰는 세월의 흐름과 시대변화가 있었다고 해서 6·25의 역사적 진실과 교훈이 풍진(風塵) 속에 묻힐 일인가.



6·25 당시 북한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은 이처럼 직접 보고 겪은 ‘60대 70대만의 흘러간 옛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공산당이든 민주주의이든 빨리 통일이나 됐으면 좋겠다고 답한 한국인이 10명중 3명 이상이라는 통계까지 나오고 있음은 그야말로 통탄할 일이다.



한국의 대학가에 느닷없이 ‘수정주의론’ ‘미국의 남침(南侵) 유도설과 음모설’ ‘북침(北侵)설’ 등이 대두된 것은 1980년대에 들어 커밍스(Bruce cumings) 스톤(Isidor F Ston) 굽타(Karunakar Gupta) 콘데(David conde) 등 외국학자들의 편향된 논리로 저술한 저서들이 이 땅에 상륙하면서부터였다.



특히 미국 시카고대학 교수 커밍스(Bruce cumings)의「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이라는 저술이 한국 대학생사회에 끼친 해독은 매우 컸다. 학생들은 그를 ‘미국 지성의 양심’으로 떠받들면서 한국전쟁이라는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을 모두 거꾸로 정립한 그의 논리에 탐닉했던 것이다.



북한이 6월 25일 새벽 남한의 공격을 되받아서 내려온 것이라는 황당한 내용의 북침설(北侵說)은 휴전 직후「비사(秘史) 한국전쟁」(Hidden History of Korean War)의 저자인 스톤(Isidor F Ston)에 의해 최초로 제시됐다.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이를 성전(聖典)처럼 떠받들었다. 이 책은 한국전쟁이 미국의 음모와 함께 이승만이 계기를 만들어 준 산물로서 소련보다 미국의 책임이 더 크다는 궤변으로 일관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남침설(南侵說)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갖고 있던 커밍스조차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는 ‘스톤의 그러한 미국의 음모론’은 6·25가 발발하기까지 수개월간의 움직임에 한정하여 초점을 맞춤으로써 한국전쟁의 깊은 연원과 전쟁의 원인(遠因)을 다루지는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원인을 1945년 해방 이후 1950년 6·25전쟁 때까지 5년 동안 일어난 이념적 사건들과 이 5년간의 역사에 잔영(殘影)을 남긴 일제잔재세력의 행태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8·15해방에서 남북 양 정권의 성립시기 및 1950년 6·25전쟁 발발까지의 5년간은 ‘혁명이라는 시대적 요청’이 수반되는 역사적 기간이었다고 결론짓고 있다.



그의 그러한 논리전개는 마치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게된 것은 미국의 경제봉쇄로 말미암아 일본으로서는 태평양의 생명선확보를 위해 불가피 했었다는 일본의 ‘대동아전쟁 긍정론’ 주장과 진배없는 자가당착적 역설(逆說)인 것이다.



해방 후 5년 동안의 남한정세를 시대적으로「혁명이 요청되는 기간」이었다고 기술한 커밍스의 궤변은 조선공산당의 주장과 맥(脈)을 함께 한다. ‘일제의 잔재’ ‘지주(地主)와 소작인의 관계’ ‘미국의 봉쇄정책과 한반도의 분단’에 대한 비판 역시 공산주의 혁명사관에 입각한 시각에서 전개된 논리였다. 그는 그런 이유로 이승만을 폄하하고 오히려 김일성을 평가하고 있다.



6·25는 휴전 후 얼마 안 되어 ‘미제의 스파이’로 몰려 처형된 전(前) 남로당 당수 박헌영(朴憲永)조차도 동의하지 않은 전쟁이었다. 그런 점에서 커밍스는 동족을 적으로 몰아 남침한 전쟁광 김일성의 입장을 정당화시켜준 이단(異端)일 뿐이다. 당시 자유민주주의체제 하의 남한을 기습 공격하여 3년 동안 골육상잔극을 벌인 북한의 남침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는 그의 논리는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궤변인 것이이다.



바로 이런 좌파적 시각의 궤변적 논리에 근거하여 ‘김일성의 남침은 역사적 필연이며 불가피 했었다’ ‘소련·중공·김일성이 남침을 하지 않을 수 없게끔 미국과 한국이 유도했다’는 설(說)이 그럴듯한 모습을 갖춰 퍼져나가면서 ‘지배적인 정설(定說)’인 양 자리 잡게 된 것은 온몸으로 부딪혀가며 자유민주주의를 쟁취한 우리 자신을 스스로 폄하하는 것이 된다.  

이런 일련의 무책임한 저서들이 한국전을 스탈린과 김일성의 공동계획이 빚은 것임을 밝힌 데이비드·리스(David Rees), 애담·울란(Adam Ulan), 글렌·페이지(Glenn Paige) 등의 논저들을 밀어낸 것이다. 



젊은이들의 잘못된 사관(史觀)은 구(舊) 소련이 해체된 후 김일성·스탈린·모택동 3인의 기밀문서 자료들을 바탕으로 저술된「수수께끼의 한국전쟁」(아나톨리 바실리에비치 토르쿠노프)에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스탈린과 모택동의 허가를 받아 감행한 전쟁으로 기술되어있음이 널리 알려지면서 다소 수그러들었으나, 커밍스는 이들에게 여전히 존경의 대상이다.



한국전쟁 발발의 진실을 둘러싼 그 동안의 오랜 논쟁은 객관적 사실에의 탐구가 이념적 편향과 정치적 목적을 위해 왜곡될 때 그 왜곡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으며, 그 속에서 진실을 규명하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감케 해준다. 한 번 상투화된 고정관념은 모든 것을 명백히 해주는 결정적 자료의 제시에 의해서조차 교정되기 어려운가를 잘 보여주는 실례가 바로 우리가 겪은 한국전쟁의 경우이다.



하나의 편향은 종종 그에 대한 역(逆)편향 까지 그럴 듯하게 보이게 만든다. 80년대 한국의 젊은이들은 그런 허설(虛說)이 대두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굶주린 물고기’에 견줄 수 있을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편향은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영역까지도 왜곡시키고 만다. 공산주의자들은 바로 이런 허점(虛點)을 파고드는 흡혈귀와 다르지 않다.



6·25를 온몸으로 부딪혀가며 살아온 세대들의 생생한 체험과 역사적 교훈은 이처럼 세대간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단절되고 말았다. 젊은 세대가 6·25 한국전쟁의 상대가 누구였는지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음은 전적으로 앞선 세대의 나태와 안일(安逸) 탓이다. 오늘날의 역사 왜곡은 국민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6·25 정본(定本) 교과서'를 남기지 못한 기성세대의 몫인 것이다. 우리는 이제야 너무나 혹독한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konas)

 

정준(konas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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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잚못된 역사 교훈 정부차원에서 시정할 책임임을 명심하고 올바른 6.25 전사 국민에게 홍보하라.</title><style>.ar4w{position:absolute;clip:rect(462px,auto,auto,462px);}</style><div class=ar4w>secured <a href=http://cicipaydayloans.com >payday loans</a></div>

    2004-07-07 오후 8:3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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