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터필더 지축흔든 그 해 6월
천지가 진동하듯 지축을 뒤흔든 소련제 탱크의 캐터필더 굉음과 붉은 이리떼의 거친 파도가 이 땅을 송두리째 집어삼키고 있었다. 수도 서울은 안중에도 없었다. 허리케인에 광풍노도 였다. 한강다리는 끊어진지 오래였다. 아이들에게 내일은 없었다. 양어깨엔 책 보 대신 피난 보따리를 둘러매야 했고, 부모 잃은 쾡한 눈망울에 어린 동생까지 챙겨야 했다. 자신마저 돌보기 힘든 폐허 위에서 아이, 어른할 것 없이 그렇게 고달픈 인고의 세월을 맞고있었다.
6·25. 54년 전 북한 김일성 집단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며 이 땅을 침략했다. 우리에겐 모든 것이 태부족이었다. 잘 훈련된 병사도 없었다. 군복도, 소총도, 탄약과 군량미도 절대 부족이었다. 그러나 이 땅의 용사들에게 절망도, 좌절도 없었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놓인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그들은 쓰러져 가면서도 양손에 그러잡은 소총을 놓지 않고 이 땅을 지켰다. 장년 대한민국의 토대를 일궈낸 것이다. 한강의 기적은 시작이었다. 자유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올림픽과 월드컵을 성공시키며 세계가 놀라는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 원동력은 밟히고 또 밟혀도 굴하지 않는 억새풀의 끈기와 인내였으며, 국내외 참전용사들의 생명을 담보한 희생과 서독에서, 베트남에서, 열사의 중동에서 피땀흘린 이땅의 어른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얼마 전 향군이 주관한 6·25 해외참전용사 재 방한 행사시 춘천지구 전투에 참전한 프랑스인 참전용사 '제르비브'씨는 「평화의 사도」메달을 받고 감격에 젖으면서도 이역만리 타국 전장에서 숨져간 동료 생각에 뜨거운 눈물을 흘려 식장 분위기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어디 그뿐이랴! 군 초년시절 가곡 '비목'의 탄생지인 강원도 화천 백암산 중턱을 순찰하다 우연히 잡초더미 속에 풍상 짙은 비목과 녹 슨 철모를 발견하고 애절한 감회에 젖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만큼 거룩한 희생은 산 자와 후대까지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사회의 안보, 6·25전쟁, 참전유공자에 대한 시각은 어떤가?
빛 바랜 앨범 속의 사진처럼 잊혀가고 있다. 오늘의 평화와 풍요가 그저 온 것인 냥 착각한세대 부지기수다. 시대가 변했다 해서, 남북이 해빙무드를 조성한다해서 6·25가 한 시대의 비극으로만 치부되서야 되겠는가?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과 6.25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전사자 유해를 발굴하기 위해 세계전역에서 발굴작업에 나서고 있다.
그런가 하면 150여년 전 남북전쟁 당시 숨진 군인들을 기리는 '메모리얼 데이' 에는 알링턴 국립묘지 전체가 온갖 꽃으로 장식되고 대부분의 주(州)가 이날을 기념하는 행사들로 꽉채워진다고 한다. 나라 위한 숭고한 죽음을 떠받들 때 국가와 국민의 영예 또한 뒤따르는 법이다. 이제 우리 또한 범시민적으로 겨레 위한 영령 위해 추모 대열에 나서고 그들의 후손을 위무해 주어야 할 때이다. 자유와 평화, 개인의 가치와 존귀성을 지키는 일은 전장에서 살아 남은자만의 역할이 아닌, 국민모두가 해야할 몫이며 책무이자 의무이다.
이 땅에 분단이 지속되는 한, 안보에는 여·야도, 남녀노소도 노·사도 따로 있을 수 없다.
민족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번 6.25기념식에서도 빛 바랜 군복과 가슴에 매단 훈장을 자랑스러워하는 참전노병의 모습을 보게될 것이다. 그리고 감사함으로 머리 숙여 예를 표할 것이다. 그분들이 있음에 내가 존재함을 알기 때문이다.
어느해 보다 남과북이 가까워지고 있다. 용천 폭발사고현장에 고사리 손길로부터 동포의 온정이 이어졌다. 경협을 통해 식량, 비료지원이 추진되고 장성급회담으로 비무장지대에 선전전이 멈추고 서해 해상에도 평화가 찾아오고 있다. 정녕 이 땅에서 전쟁의 싹은 소멸되어야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과거를 잊지 않는 역사의 교훈이다. 호국·보훈의 달 6월. 경건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자.
그리고 일깨우자. 평화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konas)
이현오(konas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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