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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모은 군인연금, 향군에 장학금으로.. 김명희(예.육대령) 인터뷰

Written by. 한영숙   입력 : 2004-07-06 오후 4: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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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행동으로 옮기기 어려운 일이 있다. 자신이 평생 모은 연금 6천만원을 뜻있는 곳에 써달라고 선뜻 내놓는 일도 아무나 할 수 없기에 아름답다.

그런 점에서 예비역 육군대령 김명희(女,80세,뉴욕거주)씨의 장학금 희사는 각박한 우리 사회에 한줄기 오아시스와 같은 싱그러움을 안겨준다.

재향군인회가 주관한 6.25전쟁 54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장학금을 향군회원 자녀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6월 중순 입국했던 김 여사를 7월 3일 오후 코나스 기자가 만나 보았다. 간호병과 후배인 김명숙 대령집에서 만난 그녀는 여군으로서, 또 6.25를 직접 경험한 참전군인으로서 살아 온 일생을 담담히 토해냈다.


▲ 강원대 경제무역학교 1년 김인숙 양에게  '제1회 김명희 장학금'을 수여하는 모습


“나도 남자라면 나라를 위해 저렇게 봉사하면 좋을텐데... .”



“나도 남자라면 나라를 위해 저렇게 봉사하면 좋을텐데... .”


하늘을 수없이 날아다니는 미군 B-29폭격기가 일본군을 향해 화염을 뿜는 모습을 보면서 18살 소녀 김명희씨는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조국을 위해 용감하게 싸우는 모습에 남다른 동경심을 가졌다.



14살 때  일본 게이오대학 의과대학에 다니는 형부를 따라 고향(평북 의주)를 떠나 동경에서 학교에 다녔던 김명희씨에게 연합군의 대공습을 받으며 사선을 넘나드는 군인들의 모습은 어린 소녀에게 애국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제가 다녔던 일본 산파학교는 5층짜리 건물인데 일본 왕족들이 와서 아기를 낳을 정도로 유명한 학교였습니다. 당시 공습이 퍼붓는 과정에도 지하에서는 아기를 낳고 있었고, 어린 우리들은 공습구경하느라고 위험을 무릅쓴 채 잽싸게 밖으로 나와서 포탄 터지는 장면을 구경하곤 했는데 그때 나도 조국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비로소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가슴 속에 일렁이는 애국심을 키우며 김명희씨는 부지런히 공부했다. 그러나 집으로부터 한달에 10원씩 오던 학자금이 전쟁통에 갑자기 끊기자 생활이 막막해지는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고향에서 부쳐오는 돈으로 공부도 하고 생활도 해야하지만 졸지에 학자금이 끊겨버린 김명희씨에게 당시 일본 담임선생님의 장학금 제의는 구세주와도 같은 목소리였다.



“곤도 노부에상(김명희씨의 일본이름) 걱정말아요, 학교에서 곤도 노부에상에게 장학금을 주기로 했으니 열심히 공부하세요”

하늘이 무너질 것같은 상황에서 선생님의 장학금 제의는 천군만마를 얻는 기분이었다.


“장학금을 받으니까 얼마나 좋던지...생각해봐..얼마나 힘이 날지..그러다보니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되더라구요”



어쩌면 이것이 그녀가 평생 모은 군인연금을 선뜻 향군 장학금으로 기부하게 된 계기가 됐는지 모르겠다.



“1969년에 전역했는데 70년도부터 연금이 나왔습니다. 당시 연금이 3만 9천원이었는데 그때부터 계속 모았지. 그래서 목돈을 마련했는데 문제는 어디에 써야할지 잘 모르겠더라는 거야. 그래, 작년에 참전용사 방문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왔을 때 재향군인회 국제협력실에 문의했지.. 연금을 모았는데 나라를 위해 뜻있게 쓸 수 있는 방법이 없느냐고. 그러자 재향군인회에서 향군 장학금을 만들자고 해서 얼마나 반갑던지... 돈은 모았지만 막상 그 돈을 어떻게 써야할지 몰랐는데 재향군인회가 그 길을 열어줬으니 얼마나 반갑던지..그래 올해 처음으로 장학금을 수여하게 된겁니다. 감사한 일이야...감사하지..“



간호장교 2기생 입교... 나라 위해 일할 수 있어 뿌듯



해방이 되자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마침 사촌오빠(서울대 1기, 백기호 박사) 도움으로 병원에 취직해 있는데 국경수비대 창설을 알리는 소식과 함께 간호장교 모집을 알리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간호장교가 되기위한 국가고시에 낙방해 1기에는 못가고 1948년 12월 간호장교  2기생으로 입교했다.



“합격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 나라를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외출도 안나가고 근무만 섰지. 2기는 총 25명이 지원했는데 21년동안 그야말로 앞만 바라보며 생활했어.... 11대 간호병과장을 끝으로..”



그녀는 야전병원 근무중의 일화를 소개해 주었다.



“한번은 공산당 한명을 치료하는데 얼마나 악질인지...아침에 인사를 해도 대답도 안하고 쌀쌀맞기 이를 데 없어. 그래도 어떡해 우리가 간호사다보니 적군이든 아군이든 친절하게 해야지. 그래서 친절하게 대해줬는데 그 사람이 총살당하면서 하는 말이 '간호장교가 너무너무 친절하게 대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지 뭐야“



그런데 정보원들이 나한테 와서 “너 공산당한테 얼마나 잘했길래 공산당이 너무너무 고맙다고 말하냐?"며 "너 공산당이가?” 하는데 너무 충격받아서 막 울었지..나중에 원장이 와서 정보원들이 나 놀리느라고 그랬다며 위로를 해서 풀렸지.



“6.25때? 말도 마...하루종일 환자들이 몰려와 살려달라고 울부짖는데 밥먹을 시간도 없었어.. 한번은 창자가 터진 환자가 들어왔는데 수술을 해도 살릴 수가 없었지. 얼마나 불쌍하던지, 당시 생각하면 우리 군인들 너무너무 고생했어, 말도 못하게..."



한국은 요즈음 젊은이들 사이에 '반미'가 애국인양 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  6.25전쟁 54주년 참전용사 위로연에 참석,노무현 대통령 내외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모습.
1952년도 소령때 미국 덴버에 있는 병원에서 교육을 받았어. 그곳은 대통령이 입원하는 병원으로 루즈벨트 대통령도 입원해 있었는데 병실이 완전 별장이야. 그때 그곳에서 근무하면서 '미국은 이렇게 잘사는데 못사는 우리나라를 위해 도와주는 걸 생각하면 너무도 고맙다'는 생각을 했지. 요즘 미국에서 오후 8시부터 2시간정도 한국방송을 해주는데 학생들이  미군 물러가라고 데모하는 걸보면 콱 때려주고 싶어. 미국은 자기들 잘 사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기꺼이 참전해준 나라야, 그런데 감사할 줄 모르고 데모하는 걸 보면 안타까운 거 말로 표현할 수 없어.."



아직 미혼이신데 결혼에 대한 생각은?



"정말 일만 열심히 했어. 남자는 쳐다보지도 않았지. 오죽 냉정했으면 '얼음장같은 여자'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였겠어. 계급이 올라가니까 더 힘들어지더라. 오죽하면 영화구경 한번 못갔겠어?  아쉬움? 그런 거 몰라...왜냐면 한번 결혼한 사람은 외로움을 느끼겠지만 난 원래부터 혼자여서 그런가보다...하며 살았지... "



미국으로 이민하신 게 1972년도라고 들었는데..미국생활 좀 들려주십시오.



"그러니까 마흔이 넘은 나이에 미국 갔어. 미국가서 간호사 자격증을 땄는데 영어가 딸리는 거야. 그래서 저능아병원으로 옮겨달라고 했지. 왜냐면 거긴 아무래도 영어가 좀 서툴러도 괜찮으니까. 미국의 저능아병원은 한 3천여명이 수용돼 있는데 한사람당 4명을 맡게돼 있어. 그만큼 미국이란 사회가 약자에 대한 복지가 확실해...근데 아이들 덩치가 얼마나 큰지...

아이큐는 5나 8이어도 덩치는 엄청나...게다가 먹을 것에 대한 욕심이 얼마나 강한지, 음식물 나눠주다가 넘어져 허릴 다쳤어. 지금도 다리가 많이 아파 그때 후유증으로...근데 문제는 일을 할 수 없게된거지. 얼마나 황당하겠어..혼자 사는 여자가 미국에서 일을 할 수 없게됐으니...  그러나 다행히도 그곳이 국립병원이고 나라에서 연금을 줄테니 퇴직하라고 해서 정말 고맙게도 지금까지  연금을 받으며 사는 거야."



북한에 동생분들이 살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14살 때 고향을 떠난 후로 한번도 못만났으니 죽기 전에 한번 봐야지. 평북 의주가 내 고향이야.  김명찬 김명호...두 동생들 한번 보고 죽는게 소원이야. 뉴욕에 있을 때 북한 방문한다고 나보고도 가자고 했어. 그러나 단호하게 거절했지. 내가 대한민국 육군대령인데 한국이 통일되면 당당히 들어가야지 비공식적으로는 갈 수 없다며 거절했어. 왜 나라고 동생이 안보고 싶겠어. 그러나 절대로 비공식적으로는 못간다고 했지."



이번 방한일정 중에 가장 인상 깊은 행사가 있었다면?



"6.25참전용사 위로연때 영부인곁에서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이 개인적으로는 큰 영광이었어. 또 간호병과 후배들 도움으로 간호사관학교는 물론 동기생들이 안장돼 있는 국립묘지에도 가봤어. 특히 간호사관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6.25때 경험담을 얘기해주고, 간호원이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사람들이니 열심히 공부해서 군인들 잘 간호해달라고 하니 막 박수를 치더라. 요즘 학생들 달라진 여건이나 질높은 교육수준이 우리가 근무할 때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뛰어나. 그걸 보니 부럽기도하고...그런 환경에서 공부하니 더 잘 하리라고 믿어."  




▲ 나는 영원한 군인. 간호장교 후배들이 만들어준 새 군복을 입고..
개인적으로 포부나 소망이 있으시다면...



"오늘날까지 이렇게 잘 살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해. 이제 여든을 살았으니 더이상 무슨 소원이 있겠나.  소원이 있다면 KBS 열린음악회 한번 가보는 것이야. 미국에서 TV를  가끔 보는데 담에 오면 꼭 한번  가보고 싶어.  또 이산가족 상봉신청을 했는데 죽기 전에 이북에 있는 동생들 만나보는 것...그게 내 소원이야..내 소원  전부야." 




토요일 오후 1시에 시작된 인터뷰는 3시가 다 돼서야 끝을 맺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기자가 준비해 간 태극기 뺏지를 선물로 주자 그렇게 반가와할 수가 없었다. 곧바로 입고 있던 옷깃에 뺏지를 달면서 감사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김명희 대령.. 여든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활기찬 음성에 당찬 모습 뒤로 평생 그녀를 지탱해 온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고귀한 마음과 조국을 생각하는 애국심..그리고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는 자세가 바로 오늘의 그녀를 만든 원동력이 아닌가 싶다.
(konas)

안보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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