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과거 親日派 숙청은 ‘민족주의자 청산’이었다
`친일(親日)진상규명법' 개정안- 어떻게 볼 것인가 (3)
우리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은 북한에서는 해방 직후 친일(親日)분자 숙청이 이뤄졌으나, 남한에서는 오히려 친일분자들을 중용하는 우(愚)를 범해 민족정기를 살리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친북(親北)좌경세력의 허구에 찬 주장일 뿐, 실상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북한에서의 최초의 ‘친일’ 숙청작업은 해방이 되던 1945년 8월말 북한지역에 소련의 각급 사령부가 설치되던 첫날부터 시작됐다. 친일,민족반역자 소탕은 이처럼 대일(對日)전쟁의 연장선상에서 소련군정(軍政)에 의해 진행됐다. 친일지주(地主)와 일제(日帝) 관속(官屬)들을 대상으로 소련군정의 지휘 하에 북한 공산당에 의해 초법적으로 이뤄진 작업이었다. 이들은 야간에 기습적으로 납치되어 재판도 거치지 않고 가족들도 모르게 멀리 시베리아로 실려 갔다.
소련군정에 의한 친일분자 소탕으로 북한 내부에서 서울이나 일본에 유학한 사람들을 ‘친일·민족반역자’로 몰아 몽둥이 세례를 퍼붓는 무법적(無法的)인 폭행이 빈발하자 소련군정은 북한 내에서 ‘북한 내 민족감정이 반소(反蘇)운동을 우려하여 그 해 9월20일 스탈린은 북한점령 소련군정당국에 “북한에 소련 식 소비에트정권 기관을 수립하거나 소비에트 질서를 도입하지 말고 부르주아 민주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북한점령 소련군 최고사령관 치스챠꼬프 대장이 20여일 후인 10월 12일 내놓은 포고문 역시 그런 배경에서였다. 이 포고문은 전문(前文)은 이렇다. “소련군대는 약탈자들을 타도하기 위해 북조선으로 들어왔다.… 조선인민의 공사유(公私有) 재산은 소련군사령부 당국의 보호 하에 둔다.…소련군은 일제침략세력을 타도하는 이외의 그 어떤 야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 북한지역에서의 격앙된 반소반공(反蘇反共)의 민심을 잠재우려 흔적이 엿보인다.
그러나 무법천지의 공포시대는 다소 완화된 것은 4개월간의 이중정권(二重政權)기간이었을 뿐, 그 직후 태동한 사실상의 북한정권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이른바 ‘인민민주의 혁명수행’을 내걸고 ‘스탈린 팽창주의’를 위한 이념적 도구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착수했다. 스탈린 지령에 따른 부르주아 민주정권은 끝내 수립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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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북한에서의 친일파·민족반역자 숙청작업이 식민지시대의 친일파와 해방 후의 민족반역자(=공산주의 거부 민족주의자)를 한 묶음으로 다루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이 ‘민족반역자’였다. 당시 북한의 ‘친일파 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이 이를 잘 말해준다.
<8·15 해방 후 민주주의(=스탈린 공산주의) 단체를 파괴 또는 그 지도자 암살 음모를 꾸몄거나, 테러단을 조직하고 그것을 직접 지도 또는 그와 같은 단체들을 배후에서 조종한 자와 테러행위를 직접 감행한 자> <8·15 해방 후 민족반역자들의 반동(=민족주의)단체에 의식적으로 가담한 자> <8·15 해방 후 민족통일전선 (=공산적화통일)형성을 방해하는 반동단체의 일원으로서 의식적으로 밀정행위를 감행했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허위선전한 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 인해 8·15해방 후의 반소(反蘇), 반공(反共)주의자들이 모두 ‘동질(同質)의 범죄구성 대상’으로 묶여 희생됐다. 그것은 반소(反蘇)·반공(反共)을 정치적·법률적으로 민족분열로 정의하여 고착시켰음을 뜻한다. 광복을 계기로 일본제국주의 대체(代替)세력으로 등장한 러시아의 적색(赤色)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한반도가 새로운 식민지로 바뀌는데 반대하는 저항 민족주의자들의 매장(埋葬)이 주목적이었던 것이다.
기독교문명의 교육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전통적 민족주의를 고집하던 천도교도들이 남한으로 피신한 일부인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때 희생됐다. 그 해(1946년) 북한각지에서 잇따랐던 농민반항·학생반항·청년단체들의 반소·반공투쟁과 1948년 봄 북한 내 도처에서 봉기한 천도교도들의 ‘3·1재현 지하운동’은 당시 민족주의자들의 거센 반항의 수위(水位)를 알려준다.
광복 초기 북한지역의 극좌(極左) 모험주의에 들뜬 지식인들 중에는 자신의 아버지를 ‘친일 지주(地主)의 본보기’로 고발하고 자신은 ‘공산당의 혁명전선’에 가담한 자들도 적지 않았다. 적색(赤色) 이데올로기의 중독성(中毒性)은 그래서 혐오(嫌惡)대상일 수밖에 없다.
일제식민지 통치는 지주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대중 착취를 감행했기 때문에 민족주의에 눈을 돌린 ‘젊은 사상가들’ 또는 ‘이렇다할 교육배경을 갖춘 지식인 아들’ 중에는 ‘친일적 사고(思考)’의 아버지를 배격하는 감정을 품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들은 결국 아버지가 지주이거나 남한으로 피신했다는 이유만으로 공산당에 대한 충성마저 무시되고 급기야 숙청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지향하는 적색(赤色)도식주의는 ‘부자(父子)지간의 인권까지도 무참하게 짓밟고 마는 사악한 이념인 것이다.
김일성 집단이 ‘친일파 청산’을 명분으로 지주(地主)성분 계층을 무분별하게 적대시한 것은 휴머니즘 차원에서 보면 엄청난 죄악이다. 지주성분의 계층이 모두 ‘친일’한 것이 아니며, 지주성분의 후대(後代)가 공산당을 반대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수급(首級)만을 처벌한다고 했지만, 면장(面長)과 면(面)사무소 서기들도 공산당원의 고발로 처벌됐다. 시골 면장이 생계에 쫓겨 숨어살면서 송아지 한 마리를 밀도살하여 암매하다 발각되는 경우 그는 ‘인민경제계획 파괴죄’로 15년 이상의 형(刑)에 처해졌다.
당시 북한 거주민들이 고향을 저버리고 남한으로의 피신은 달리보면 ‘정치적 망명’ 이고, ‘민족의 대이동’이었다. 북한당국은 자유를 찾아 나선 이들 정치적 망명자들을 다시 붙잡아 민족반역자로 처벌했다. 공산 북한이 ‘민족적 양심과 자존(自尊)으로부터 고립된 것은 당연한 자업자득의 결과이다.
식민지시대의 친일적 독소를 말끔히 정화하는 일은 더 없이 중요하다. 민족적 슬기를 갖고 진행되어야 마땅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은 ‘매국적 친일’ 단죄만으로 족할 뿐, 주류권(主流圈) 밖에서 살아온 선민(善民)이 그 대상이 될 수는 없다. 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의 친독(親獨)행위자에 대한 처벌수위 고민’이 우리에게 귀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민족적 장점을 더욱 배가하고 승화시키는 노력이다. 그것이 민족을 ‘민족 되게’ 하는 슬기일 것이다. 우리가 북한처럼 낡은 이데올로기에 묶여 ‘닫힌 마음’ ‘닫힌 문화’ ‘폐쇄적 민족주의’ 속에 우리 스스로를 결박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진정한 애국의 길을 해방 60년을 맞아 새삼 ‘과거사(過去事) 지향’으로 돌아가기보다는 ‘민족공조’라는 허울 좋은 북한의 간계(奸計)를 간파하고 이미 구멍이 뚫리기 시작한 ‘국가안보의 틀’을 새롭게 구축하는 일일 것이다. (konas)
정 준 (코나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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