停戰 51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Written by. 이현오
입력 : 2004-07-27 오후 2:48:00
지난해 7월27일 오전 9시 판문점 평화의 집 앞. 조영길(曺永吉)국방부장관을 비롯해 백선엽(예)대장, 리언 J 라포트 유엔군사령관, 헬렌 엘리자베스 클라크 뉴질랜드 총리,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 이상훈 재향군인회장, 참전국 주요 외교 사절 등 국내외 고위 인사와 참전 21개국 해외 참전용사 등 2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정전협정 조인 50주년 기념식이 열리고 있었다. 그날을 되새기기라도 하듯 장맛비는 굵은 빗줄기가 돼 쏟아지고 있었다.
“남북 분단의 상징인 이 자리에서 50년 전을 회상하니 깊은 감회에 젖게 됩니다. 53년 전 저는 이곳에서 용감한 부하들과 더불어 공산 침략군과 혈투를 전개했습니다. 이제 5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한반도는 완전한 평화가 요원한 채 북한 공산 측의 끊임없는 위협과 도발은 그치지 않고 있으며, 초긴장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냉전의 유일한 산물로 남아 있는 곳입니다…. 이제 경의선이 연결되고 남북의 도로가 개설된다 해도 교류와 왕래가 없다면 길이 없는 것이고, 길이 없더라도 진정한 교류·왕래가 있다면 평화의 길은 열릴 것입니다.”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연설문을 낭독하는 우리 군의 ‘살아 있는 전설’ 백선엽 장군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다시 1년. 이 땅에 전쟁의 포성이 멈춘 지도 어느새 새로운 반세기가 시작되는 51돌이 됐다. 27일은 정전협정 조인 51주년이 되는 날이다. 돌이켜보면 정전이 있기까지 6·25전쟁은 우리 민족 최대의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77만여 명의 국군과 유엔군의 희생, 250만여 명의 민간인 피해를 가져온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가장 크고 처절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지났어도 여전히 한반도는 비무장지대(DMZ)를 사이로 총성 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정전회담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7월부터 53년 7월27일 정전협정에 조인하기까지 만 2년간에 걸쳐 진행된 세계 역사상 가장 긴 회담이었다. 그럼에도 정전은 전쟁의 종결을 의미하는 평화조약이 아닌 양측 간 적대 행위를 일시적으로 정지시키는 한시적 협정에 불과했다. 본회담 159회, 765회에 이르는 각종 회담 결과 전투는 멈췄으나 전쟁은 끝나지 않은 미완의 상태로 오늘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북한은 정전 이후 지난 반세기 동안 서해 백령도와 강릉 무장 공비 침투, 8·18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등 해상과 비무장지대를 통한 도발은 물론 KAL기 납치·폭파, 청와대 기습 사건 등 43만100여 건에 이르는 정전협정을 위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한민국은 선열들이 피땀 흘려 지킨 나라다. 그분들이 피 흘려 이 땅을 지키지 않았다면 오늘의 이 평화와 번영, 개인의 자유는 어찌 됐을까. 지난 6월14일은 정전 이래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날이었다.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을 통해 서해상 남북 함정들이 북방한계선(NLL) 부근에서 무선 교신에 성공, 우발적 충돌 방지를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휴전선 지역의 확성기와 시각 선전물 제거에도 합의했다. 실로 53년 만의 일이다. 휴전선과 해상에서 통일을 위한 평화의 싹이 트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분명한 것이 있다. 수많은 도발과 만행을 자행하고도 이를 부인한 채 선전전 중지와 무력 충돌 방지에 북한이 앞장선 것을 말이다. 72년 7·4 남북 공동성명 이후 남북한 선전 중단을 합의해 놓고도 북한이 일방적으로 선전을 재개, 우리 군 당국이 곤경에 처한 기억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전이 성립된 지 51년이 지난 지금 남북은 불완전한 평화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활발한 남북 교류와 협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대남 적화혁명 전략은 변함없으며 유비무환(有備無患)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이다. 아직도 한반도에는 총성 없는 전쟁, 정전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konas)
이현오(konas 명예기자)
긴장과 위기는 군사분계선 위에 엄연히 존재
6·25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오늘(27일)로 꼭 51년을 맞았다. 정전(停戰)이란 전쟁이 끝났다는 종전(終戰)의 의미가 아닌 일단 멈춘다는 것, 곧 휴전(休戰)이다.
당시 조인된 정전협정은 3년이 넘는 동족상잔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정착시키지 못한 채 전쟁 상황을 미봉하는 선에서 그치고 말았다. 정전협정의 의미와 과정, 이후 북한의 도발 사례 등을 살펴보며 이 땅에 전쟁의 잔불을 완전히 끄고 평화의 새 불씨를 지피기 위한 각오을 다지고자 한다.
“어느 일방이 선제 공격을 감행한다면 정전협정은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이 되고 맙니다.”
1983년부터 94년까지 주한 유엔군사령관 정전담당 특별 고문이었던 이문항(미국명 제임스 리)씨는 “정전협정이 한반도 평화를 영구 보장해 주는 문서가 아니라 전쟁 당사국 사령관끼리 단지 ‘발포 중지’(cease fire)를 합의한 문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 같은 지적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동안 북한은 휴전선 비무장지대(DMZ)에서 수많은 도발 행위를 자행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무려 43만여 건의 정전협정을 위반했다. 실제로 정전협정은 반세기를 거치면서 형체만 유지하고 있을 뿐 사실상 효력 정지 상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북한은 91년 3월 본회의를 거부하고 중립국감독위원회(중감위)의 체코·폴란드 대표를 강제 철수시키면서 유엔군사령부 해체를 요구하는 등 정전 체제 무력화를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94년 5월 군사정전위원회(군정위)를 대신해 인민군 총정치국(국장 조명록)의 지휘를 받는 ‘북한군 판문점 대표부’를 설치한 데 이어 같은 해 12월 군정위 중국 측 대표단 소환, 95년 2월 중감위 폴란드 대표단 강제 철수, 95년 9월 중감위 사무실 봉쇄 등의 조치를 잇따라 내놓았다.
이어 96년 4월4일 판문점 대표부 담화를 통해 정전협정 제1조(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유지·관리) 이행 의무를 포기한다고 선언하면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DMZ에 출입하는 북측 인원과 차량에 대해 식별 표지를 착용하거나 부착하지 않았다.
특히 북한은 96년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을 비롯해 서해안·남해안 잠수정 침투 사건 등 정전 체제 파괴 행위를 계획, 저지른 데 이어 99년 서해 북방한계선(NLL)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면서 ‘새로운 해상분계선’과 ‘서해 5도 통항 질서’를 잇따라 내놓았다. 이 주장의 핵심은 서해 5도를 제외한 주변 수역은 자신들의 영해이므로 남측은 북측이 지정해 준 곳으로만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남북은 NLL 인근 수역에서 99년과 2002년 두 차례 무력 충돌을 빚었다.
현재의 정전 체제는 98년 6월부터 가동에 들어간 북한군 판문점 대표부와 유엔사 군정위 간 장성급 회담을 통해 유지되고 있으나 그나마 지난해 2월17일 북한은 “미국이 대북 제재를 가한다면 정전협정 이행 의무를 포기하겠다”고 말한 바 있으며 같은 해 3월26일 판문점 연락 장교 파견을 거부하기도 했다.
물론 참여정부 출범 이후 매년 15~20회 정도 발생하던 북한 경비정의 NLL 침범이 급격히 감소했고 지난해 2월20일 미그-19기의 연평도 NLL 상공 침범 사례 외에 영공·육상에서는 북한군이 군사분계선(MDL)까지 와 수색 정찰하는 등 도발 직전의 상황은 보고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지난 14일 북한 경비정이 또다시 NLL을 침범하는 등 북한의 정전 체제 무력화 기도는 끊이지 않고 있다.
한반도에 평화 체제를 구축하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54년 4월26일부터 7주간 열린 제네바 평화회담과 97년 12월부터 여섯 차례에 걸쳐 개최된 남북한과 미국·중국이 참여한 4자회담 등이 있다. 미국의 대북 포용 정책 기조 위에서 추진된 4자회담은 그러나 6차 회담이 결렬된 이후 현재까지 중단된 상태에 있다.
2000년 6월15일 남북 정상회담을 비롯, 지난 5월의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개최 등 이 땅에 전쟁의 잔불을 완전히 끄고 평화의 새 불씨를 지피기 위한 노력과 영구적 평화 보장 체계 수립이 필요한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그 같은 새로운 평화 보장 체계가 마련되는 시점까지 현 정전 체제를 유지해 나가는 것 또한 두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 긴장과 위기는 MDL 위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기사제공 국방일보)
전 종군기자동우회장 문제안(文濟安)옹의 정전협정 취재기
6·25전쟁 당시 본디 널문리로 이름하던 판문점은 이미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지명이 됐다. 더욱이 꼭 51년 전인 1953년 7월27일 세계 언론의 집중적 조명을 받았다. 3년1개월을 조금 넘긴 전쟁을 일단 멈추는 정전(휴전)협정이 체결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기자들이 아침 일찍부터 이곳 판문점으로 잔뜩 몰려들었다. 정전협정 조인식장에는 관계자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기자들은 밖에서 유리창을 통해 사진도 찍고 취재도 해야 했다.
이윽고 오전 10시, 유엔측 수석대표인 해리슨 장군을 비롯한 대표 네 명과 공산측 대표인 남일(南日) 등이 자리에 앉았다. 악수도, 목례도 없었다. 분위기는 얼어붙은 듯 차갑고 조용했다. 다만 유엔군의 전폭기 근처에 쏟아 붓는 포탄의 작렬음이 들리곤 했다.
10시9분, 우리말·영어·중국어로 된 정본 9통과 부본 9통의 협정문서에 서명이 끝났다. 사무적이었다. 서명 의식에 따르는 어떤 극적인 요소, 화해의 모습도 없었다. 조인식 모습은 그렇게 썰렁하다 못해 참담했다.
당시 서울신문 취재팀의 일원으로 회담을 취재한 문제안(文濟安·84·사진)기자는 지금의 통일로를 달려 편집국에 도착, ‘전투는 일단 정지, 9분 만에 조인 완료’ 제하의 기사를 넘겼다.
“북진통일이라는 우리의 의지와 달리 휴전선이 그어진다는 사실에 불만이 없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사에 ‘또 하나의 비극의 남북 분단선이 될 것’이라고 썼지요.”
문옹의 회고에 따르면 이날 조인식을 취재한 한국 기자는 50여 명. 당시 기자들은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져 수많은 젊은 병사가 죽어 나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전쟁을 통해 공산주의·공산당의 실체를 깨달았던 터라 휴전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한다.
한국의 운명은 또 한 번 한국인의 참여 없이 결정됐다는 사실도 불만이었다. 문옹은 “그때 조선일보 최병우(崔秉宇·58년 타계)기자는 ‘기이한 전투의 정지’라는 제목으로 이 분위기를 묘사했는데 우리에게 너무나 비극적이며 상징적이었다”고 탄식했다.
해리슨 장군과 남일은 서명을 마치자 최후 통첩을 내던지고 퇴장하듯이 대표를 데리고 나가버렸다. 관례적인 합동 기념 촬영도 없었다. 문옹은 이를 두고 “이날 조인식이 어디까지나 ‘정전’이지 ‘평화’의 과정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문옹은 정전협정이 조인된 지 51년을 훌쩍 넘겼으나 세계 유일의 분단민족·분단국가로 지구상에서 가장 중무장화한 한반도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 통일 전망이 여전히 불투명한 점에 대해 다시 한 번 아픈 감회에 젖어 든다.
“남북 철도 연결 공사가 이뤄지고 있고 바다·육지로 금강산 관광을 다니고, 또 최근에는 철책의 각종 선전물을 제거하는 등 화해 무드가 조성되고 있다 해도 알 수가 없어요. 서해 교전 등에서 보듯 북한은 군사적으로 변한 게 실제로 하나도 없어 보이거든요.” (기사제공 국방일보)
정전협정당시 관련기사 보기(조선일보 53.7.29일자/최병우 기자)
“남북 분단의 상징인 이 자리에서 50년 전을 회상하니 깊은 감회에 젖게 됩니다. 53년 전 저는 이곳에서 용감한 부하들과 더불어 공산 침략군과 혈투를 전개했습니다. 이제 5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한반도는 완전한 평화가 요원한 채 북한 공산 측의 끊임없는 위협과 도발은 그치지 않고 있으며, 초긴장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냉전의 유일한 산물로 남아 있는 곳입니다…. 이제 경의선이 연결되고 남북의 도로가 개설된다 해도 교류와 왕래가 없다면 길이 없는 것이고, 길이 없더라도 진정한 교류·왕래가 있다면 평화의 길은 열릴 것입니다.”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연설문을 낭독하는 우리 군의 ‘살아 있는 전설’ 백선엽 장군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다시 1년. 이 땅에 전쟁의 포성이 멈춘 지도 어느새 새로운 반세기가 시작되는 51돌이 됐다. 27일은 정전협정 조인 51주년이 되는 날이다. 돌이켜보면 정전이 있기까지 6·25전쟁은 우리 민족 최대의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77만여 명의 국군과 유엔군의 희생, 250만여 명의 민간인 피해를 가져온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가장 크고 처절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지났어도 여전히 한반도는 비무장지대(DMZ)를 사이로 총성 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정전회담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7월부터 53년 7월27일 정전협정에 조인하기까지 만 2년간에 걸쳐 진행된 세계 역사상 가장 긴 회담이었다. 그럼에도 정전은 전쟁의 종결을 의미하는 평화조약이 아닌 양측 간 적대 행위를 일시적으로 정지시키는 한시적 협정에 불과했다. 본회담 159회, 765회에 이르는 각종 회담 결과 전투는 멈췄으나 전쟁은 끝나지 않은 미완의 상태로 오늘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북한은 정전 이후 지난 반세기 동안 서해 백령도와 강릉 무장 공비 침투, 8·18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등 해상과 비무장지대를 통한 도발은 물론 KAL기 납치·폭파, 청와대 기습 사건 등 43만100여 건에 이르는 정전협정을 위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한민국은 선열들이 피땀 흘려 지킨 나라다. 그분들이 피 흘려 이 땅을 지키지 않았다면 오늘의 이 평화와 번영, 개인의 자유는 어찌 됐을까. 지난 6월14일은 정전 이래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날이었다.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을 통해 서해상 남북 함정들이 북방한계선(NLL) 부근에서 무선 교신에 성공, 우발적 충돌 방지를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휴전선 지역의 확성기와 시각 선전물 제거에도 합의했다. 실로 53년 만의 일이다. 휴전선과 해상에서 통일을 위한 평화의 싹이 트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분명한 것이 있다. 수많은 도발과 만행을 자행하고도 이를 부인한 채 선전전 중지와 무력 충돌 방지에 북한이 앞장선 것을 말이다. 72년 7·4 남북 공동성명 이후 남북한 선전 중단을 합의해 놓고도 북한이 일방적으로 선전을 재개, 우리 군 당국이 곤경에 처한 기억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전이 성립된 지 51년이 지난 지금 남북은 불완전한 평화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활발한 남북 교류와 협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대남 적화혁명 전략은 변함없으며 유비무환(有備無患)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이다. 아직도 한반도에는 총성 없는 전쟁, 정전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konas)
이현오(konas 명예기자)
긴장과 위기는 군사분계선 위에 엄연히 존재
6·25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오늘(27일)로 꼭 51년을 맞았다. 정전(停戰)이란 전쟁이 끝났다는 종전(終戰)의 의미가 아닌 일단 멈춘다는 것, 곧 휴전(休戰)이다.당시 조인된 정전협정은 3년이 넘는 동족상잔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정착시키지 못한 채 전쟁 상황을 미봉하는 선에서 그치고 말았다. 정전협정의 의미와 과정, 이후 북한의 도발 사례 등을 살펴보며 이 땅에 전쟁의 잔불을 완전히 끄고 평화의 새 불씨를 지피기 위한 각오을 다지고자 한다.
“어느 일방이 선제 공격을 감행한다면 정전협정은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이 되고 맙니다.”
1983년부터 94년까지 주한 유엔군사령관 정전담당 특별 고문이었던 이문항(미국명 제임스 리)씨는 “정전협정이 한반도 평화를 영구 보장해 주는 문서가 아니라 전쟁 당사국 사령관끼리 단지 ‘발포 중지’(cease fire)를 합의한 문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 같은 지적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동안 북한은 휴전선 비무장지대(DMZ)에서 수많은 도발 행위를 자행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무려 43만여 건의 정전협정을 위반했다. 실제로 정전협정은 반세기를 거치면서 형체만 유지하고 있을 뿐 사실상 효력 정지 상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북한은 91년 3월 본회의를 거부하고 중립국감독위원회(중감위)의 체코·폴란드 대표를 강제 철수시키면서 유엔군사령부 해체를 요구하는 등 정전 체제 무력화를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94년 5월 군사정전위원회(군정위)를 대신해 인민군 총정치국(국장 조명록)의 지휘를 받는 ‘북한군 판문점 대표부’를 설치한 데 이어 같은 해 12월 군정위 중국 측 대표단 소환, 95년 2월 중감위 폴란드 대표단 강제 철수, 95년 9월 중감위 사무실 봉쇄 등의 조치를 잇따라 내놓았다.
이어 96년 4월4일 판문점 대표부 담화를 통해 정전협정 제1조(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유지·관리) 이행 의무를 포기한다고 선언하면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DMZ에 출입하는 북측 인원과 차량에 대해 식별 표지를 착용하거나 부착하지 않았다.
특히 북한은 96년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을 비롯해 서해안·남해안 잠수정 침투 사건 등 정전 체제 파괴 행위를 계획, 저지른 데 이어 99년 서해 북방한계선(NLL)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면서 ‘새로운 해상분계선’과 ‘서해 5도 통항 질서’를 잇따라 내놓았다. 이 주장의 핵심은 서해 5도를 제외한 주변 수역은 자신들의 영해이므로 남측은 북측이 지정해 준 곳으로만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남북은 NLL 인근 수역에서 99년과 2002년 두 차례 무력 충돌을 빚었다.
현재의 정전 체제는 98년 6월부터 가동에 들어간 북한군 판문점 대표부와 유엔사 군정위 간 장성급 회담을 통해 유지되고 있으나 그나마 지난해 2월17일 북한은 “미국이 대북 제재를 가한다면 정전협정 이행 의무를 포기하겠다”고 말한 바 있으며 같은 해 3월26일 판문점 연락 장교 파견을 거부하기도 했다.
물론 참여정부 출범 이후 매년 15~20회 정도 발생하던 북한 경비정의 NLL 침범이 급격히 감소했고 지난해 2월20일 미그-19기의 연평도 NLL 상공 침범 사례 외에 영공·육상에서는 북한군이 군사분계선(MDL)까지 와 수색 정찰하는 등 도발 직전의 상황은 보고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지난 14일 북한 경비정이 또다시 NLL을 침범하는 등 북한의 정전 체제 무력화 기도는 끊이지 않고 있다.
한반도에 평화 체제를 구축하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54년 4월26일부터 7주간 열린 제네바 평화회담과 97년 12월부터 여섯 차례에 걸쳐 개최된 남북한과 미국·중국이 참여한 4자회담 등이 있다. 미국의 대북 포용 정책 기조 위에서 추진된 4자회담은 그러나 6차 회담이 결렬된 이후 현재까지 중단된 상태에 있다.
2000년 6월15일 남북 정상회담을 비롯, 지난 5월의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개최 등 이 땅에 전쟁의 잔불을 완전히 끄고 평화의 새 불씨를 지피기 위한 노력과 영구적 평화 보장 체계 수립이 필요한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그 같은 새로운 평화 보장 체계가 마련되는 시점까지 현 정전 체제를 유지해 나가는 것 또한 두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 긴장과 위기는 MDL 위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기사제공 국방일보)
전 종군기자동우회장 문제안(文濟安)옹의 정전협정 취재기
6·25전쟁 당시 본디 널문리로 이름하던 판문점은 이미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지명이 됐다. 더욱이 꼭 51년 전인 1953년 7월27일 세계 언론의 집중적 조명을 받았다. 3년1개월을 조금 넘긴 전쟁을 일단 멈추는 정전(휴전)협정이 체결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기자들이 아침 일찍부터 이곳 판문점으로 잔뜩 몰려들었다. 정전협정 조인식장에는 관계자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기자들은 밖에서 유리창을 통해 사진도 찍고 취재도 해야 했다.
이윽고 오전 10시, 유엔측 수석대표인 해리슨 장군을 비롯한 대표 네 명과 공산측 대표인 남일(南日) 등이 자리에 앉았다. 악수도, 목례도 없었다. 분위기는 얼어붙은 듯 차갑고 조용했다. 다만 유엔군의 전폭기 근처에 쏟아 붓는 포탄의 작렬음이 들리곤 했다.
10시9분, 우리말·영어·중국어로 된 정본 9통과 부본 9통의 협정문서에 서명이 끝났다. 사무적이었다. 서명 의식에 따르는 어떤 극적인 요소, 화해의 모습도 없었다. 조인식 모습은 그렇게 썰렁하다 못해 참담했다.
당시 서울신문 취재팀의 일원으로 회담을 취재한 문제안(文濟安·84·사진)기자는 지금의 통일로를 달려 편집국에 도착, ‘전투는 일단 정지, 9분 만에 조인 완료’ 제하의 기사를 넘겼다.
“북진통일이라는 우리의 의지와 달리 휴전선이 그어진다는 사실에 불만이 없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사에 ‘또 하나의 비극의 남북 분단선이 될 것’이라고 썼지요.”
문옹의 회고에 따르면 이날 조인식을 취재한 한국 기자는 50여 명. 당시 기자들은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져 수많은 젊은 병사가 죽어 나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전쟁을 통해 공산주의·공산당의 실체를 깨달았던 터라 휴전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한다.
한국의 운명은 또 한 번 한국인의 참여 없이 결정됐다는 사실도 불만이었다. 문옹은 “그때 조선일보 최병우(崔秉宇·58년 타계)기자는 ‘기이한 전투의 정지’라는 제목으로 이 분위기를 묘사했는데 우리에게 너무나 비극적이며 상징적이었다”고 탄식했다.
해리슨 장군과 남일은 서명을 마치자 최후 통첩을 내던지고 퇴장하듯이 대표를 데리고 나가버렸다. 관례적인 합동 기념 촬영도 없었다. 문옹은 이를 두고 “이날 조인식이 어디까지나 ‘정전’이지 ‘평화’의 과정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문옹은 정전협정이 조인된 지 51년을 훌쩍 넘겼으나 세계 유일의 분단민족·분단국가로 지구상에서 가장 중무장화한 한반도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 통일 전망이 여전히 불투명한 점에 대해 다시 한 번 아픈 감회에 젖어 든다.
“남북 철도 연결 공사가 이뤄지고 있고 바다·육지로 금강산 관광을 다니고, 또 최근에는 철책의 각종 선전물을 제거하는 등 화해 무드가 조성되고 있다 해도 알 수가 없어요. 서해 교전 등에서 보듯 북한은 군사적으로 변한 게 실제로 하나도 없어 보이거든요.” (기사제공 국방일보)
정전협정당시 관련기사 보기(조선일보 53.7.29일자/최병우 기자)
- 관련기사보기
-
소셜댓글
원하는 계정으로 로그인 후 댓글을 작성하여 주십시요.
- 입력 된 100자 의견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