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박 전 대통령 지시로 추진한 '핵 개발' 설계도 발견
Written by. 손자영
입력 : 2004-08-02 오전 8:40:21
197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추진됐던 핵무기개발 프로젝트를 말해주는 핵연료 재처리 시설 설계서와 설계도면이 발견됐다.
당시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핵연료 재처리 사업담당 실무책임을 맡았던 김철(65) 아주대 명예교수는 "원자력연구소가 프랑스 상고방사에 의뢰해 1974년 10월 1일자로 작성한 핵연료 재처리시설 개념설계서와 부속설계서 두 권, 75년 1월 10일자로 작성된 재처리시설 관련 기본 설계도면을 24년 동안 개인 소장하고 있다"고 1일 밝혔다.
지금까지 박 전 대통령이 추진한 핵무기 개발과 관련, 비밀보고서 등 일부 문서가 공개된 적은 있지만 당시 핵무기 개발이 어느 단계까지 진행됐는지를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설계자료가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문가들은 "김 교수가 소장한 개념설계서에는 핵폭탄 원료가 될 수 있는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NRX연구로'와 관련한 내용이 담겨 있어 당시 정부의 핵무기 개발 의지가 드러난다"고 평가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한국 원자력연구소 재처리 시설 개념설계서'라는 제목의 주개념설계서는 200여쪽 분량이고 100여쪽 분량의 다른 개념설계서는 주개념 설계서의내용을 보충하는 부속서이다.
주개념 설계서에는 핵연료 재처리 공정에 대한 설계와 제품의 종류, 예산 및 소요인력 등 재처리 시설을 짓기 위한 내용이 상세하게 담겨 있으며 설계서에는 핵폭탄의 원료인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NRX 연구로'와 관련한 내용까지 명시되어 있다. 또 기본설계도면에는 플루토늄 정제과정, 우라늄 산화물과 플루토늄 산화물의분리추출과정, 플루토늄 저장 및 이동과 관련한 각종 도면이 포함되어 있다.
김 교수가 소장하고 있는 이 핵연료 재처리시설 개념설계서와 설계도는 1970년대 우리나라의 비밀 핵개발사업을 한 눈에 보여주는 것으로 사료(史料)로서의 가치가 큰 것으로 전해졌다.
김 교수는 "내가 갖고 있는 것은 핵 재처리 시설의 기본설계개념서"라며 "당시극비문서였지만 상고방사와 함께 일했기 때문에 설계서와 설계도면을 개인적으로 보관해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기본 설계도면은 ▶플루토늄 정제과정▶우라늄 산화물과 플루토늄 산화물의 분리추출 과정▶플루토늄 저장 및 이동과 관련한 각종 도면이 포함돼 있다.
김 명예교수는 "이 자료들은 한국의 핵무기 개발이 어느 단계까지 도달했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며 "계획대로 진행됐다면 80년 초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 재처리시설이 완성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美軍 철수통고에 '안보 홀로서기' 시동
[70년대 극비추진 核프로젝트 발굴]시작서 중단까지
한국의 핵무기 개발은 1970년 7월 월리엄 로저스 미국 국무장관이 베트남 사이공(현 호치민)에서 열린 베트남전 참전국 회의에서 최규하 당시 외무장관에게 통고한 ‘주한미군 2만명 철수’가 발단이 됐다. 미국의 보호막에 안주해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이 일로 ‘안보 홀로서기’ 필요성을 절감했고 그 결과 비밀리에 핵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핵무기 개발 시작=핵무기 개발은 72년 9월 8일 당시 청와대 오원철 경제수석이 박 대통령에게 보고한 A4용지 9쪽 분량의 비밀 보고서에서 최초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오 수석은 박 대통령에게 ‘원자 핵무기 개발계획’이란 보고서를 통해 플루토늄탄을 사용한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결론과 함께 핵무기 개발 방향을 제시했다.
당시 핵무기 개발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진행됐다. 핵폭탄과 핵폭탄 운반체인 미사일 개발은 국방과학연구소(ADD)가 맡고, 핵폭탄의 연료가 되는 플루토늄 생산을 위한 연구용 원자로와 핵연료 재처리 시설의 확보는 원자력연구소 특수사업부에서 담당하는 식이었다.
한국은 일단 고순도 플루토늄을 얻기 위한 연구용 원자로로 캐나다에서 ‘NRX연구로’를 들여오기로 하고 물밑접촉에 나섰다. 또 재처리 시설은 프랑스제를 도입키로 하고, 파키스탄 등 핵개발 국가들에 재처리 시설을 수출한 경험이 있는 프랑스 SGN(생고뱅)사와 협상을 벌였다.
이에 따라 73년 4월 원자력연구소와 SGN사 사이에 재처리 시설 건설을 위한 기술용역과 공급계약이 체결됐다. 또한 NRX 도입은 그해 7월 캐나다에서 CANDU(캔두)형 중수로를 들여오면서 몰래 끼워받기로 캐나다 정부와 최종 합의했다.
한편 ADD에서 추진한 핵폭탄 개발은 2차대전 말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된 것과 같은 20㏏짜리 플루토늄탄(공중투하식)으로 75년 초 기본설계가 마무리됐다.
이후 핵폭탄 제조와 기폭(起爆) 기술은 연구진이 프랑스에 있는 핵폭탄제조연구소 등에서 계속했다. 미사일 제조기술은 주한미군에 배치된 나이키 허큘리스(NH)를 생산하는 맥도널 더글러스사를 통해 개발이 진행되다 도중 독자개발로 선회했고 76년 12월 대전기계창이 설립되면서 본격화됐다.
◆미국 압력으로 개발 중단=핵무기 개발에 차질이 빚어진 데는 74년 5월 인도의 핵실험이 결정적이었다. 인도 핵실험 후 미국은 세계 각국의 미대사관과 정보분석가를 총동원, 각국의 핵무기 개발 여부를 확인하는데 혈안이 됐고 비밀리에 추진되던 한국의 핵개발은 그 표적이 되고 말았다.
핵개발 사실을 간파한 미국은 한국 정부에 핵개발 포기를 종용했고 관련 국가에도 압력을 행사했다. 이로 인해 75년 캐나다는 우리 정부와의 NRX연구로 판매 협상을 중단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프랑스로부터 도입을 추진하던 재처리 시설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핵무기 개발에 집착했던 박 대통령은 76년 재처리 기술 및 시설 도입사업을 ‘화학처리 대체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명칭만 바꿔 비밀리에 선진국으로부터 기술 도입을 추진했고 NRX연구로는 자체 설계를 통해 독자개발키로 결정했다.
미사일 개발도 78년 9월 사거리 180의 ‘백곰’이 시험발사에 성공함으로써 공중투하식이 아니라 미사일에 핵폭탄을 장착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 모든 사업과 계획은 79년 10월 박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12·12쿠데타로 등장한 전두환 정권이 미국으로부터 쿠데타 정당성을 추인받기 위해 핵개발을 포기하면서 물거품이 됐다.
■한국 핵개발 일지
▲70년 8월 스피로 애그뉴 미국 부통령 “5년 이내에 주한미군 완전 철수할 것”이라고 선언
▲71년 6월 ‘원자력개발 15년 계획’ 수립해 핵개발에 착수
▲72년 9월 오원철 제2경제수석, 박정희 대통령에게 ‘원자 핵연료 개발계획’ 보고
▲73년 3월 미사일 개발팀,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 개발계획 청와대에 보고
▲73년 7월 캐나다의 NRX형 연구로 도입, 설치키로 결정
▲74년 3월 한국, 프랑스 SGN사와 시험용 재처리 시설의 개념설계 용역계약 체결
▲75년 2월 핵폭탄 설계 마무리
▲75년 8월 미 국무장관 방한, 박 대통령에게 핵개발 포기각서 요구
▲75년 12월 NRX연구로 도입과 재처리 시설 확보사업 중단
▲76년 1월 미 국무부 관리 방한, 한국의 핵개발 중지 요구
▲78년 9월 사거리 180의 ‘백곰’ 미사일 시험발사 성공
▲78년 10월 핵연료 가공시설 준공
▲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 서거
▲81년 1월 전두환 정권, 핵개발 포기하고 핵개발 관련기관 해체(konas)
박 전 대통령 지시로 추진…플루토늄 추출 등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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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핵연료 재처리 사업담당 실무책임을 맡았던 김철(65) 아주대 명예교수는 "원자력연구소가 프랑스 상고방사에 의뢰해 1974년 10월 1일자로 작성한 핵연료 재처리시설 개념설계서와 부속설계서 두 권, 75년 1월 10일자로 작성된 재처리시설 관련 기본 설계도면을 24년 동안 개인 소장하고 있다"고 1일 밝혔다.
지금까지 박 전 대통령이 추진한 핵무기 개발과 관련, 비밀보고서 등 일부 문서가 공개된 적은 있지만 당시 핵무기 개발이 어느 단계까지 진행됐는지를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설계자료가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문가들은 "김 교수가 소장한 개념설계서에는 핵폭탄 원료가 될 수 있는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NRX연구로'와 관련한 내용이 담겨 있어 당시 정부의 핵무기 개발 의지가 드러난다"고 평가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한국 원자력연구소 재처리 시설 개념설계서'라는 제목의 주개념설계서는 200여쪽 분량이고 100여쪽 분량의 다른 개념설계서는 주개념 설계서의내용을 보충하는 부속서이다.
주개념 설계서에는 핵연료 재처리 공정에 대한 설계와 제품의 종류, 예산 및 소요인력 등 재처리 시설을 짓기 위한 내용이 상세하게 담겨 있으며 설계서에는 핵폭탄의 원료인 플루토늄을 추출하는 'NRX 연구로'와 관련한 내용까지 명시되어 있다. 또 기본설계도면에는 플루토늄 정제과정, 우라늄 산화물과 플루토늄 산화물의분리추출과정, 플루토늄 저장 및 이동과 관련한 각종 도면이 포함되어 있다.
김 교수가 소장하고 있는 이 핵연료 재처리시설 개념설계서와 설계도는 1970년대 우리나라의 비밀 핵개발사업을 한 눈에 보여주는 것으로 사료(史料)로서의 가치가 큰 것으로 전해졌다.
김 교수는 "내가 갖고 있는 것은 핵 재처리 시설의 기본설계개념서"라며 "당시극비문서였지만 상고방사와 함께 일했기 때문에 설계서와 설계도면을 개인적으로 보관해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기본 설계도면은 ▶플루토늄 정제과정▶우라늄 산화물과 플루토늄 산화물의 분리추출 과정▶플루토늄 저장 및 이동과 관련한 각종 도면이 포함돼 있다.
김 명예교수는 "이 자료들은 한국의 핵무기 개발이 어느 단계까지 도달했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며 "계획대로 진행됐다면 80년 초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 재처리시설이 완성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美軍 철수통고에 '안보 홀로서기' 시동
[70년대 극비추진 核프로젝트 발굴]시작서 중단까지
한국의 핵무기 개발은 1970년 7월 월리엄 로저스 미국 국무장관이 베트남 사이공(현 호치민)에서 열린 베트남전 참전국 회의에서 최규하 당시 외무장관에게 통고한 ‘주한미군 2만명 철수’가 발단이 됐다. 미국의 보호막에 안주해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이 일로 ‘안보 홀로서기’ 필요성을 절감했고 그 결과 비밀리에 핵개발에 착수하게 된다.
◆핵무기 개발 시작=핵무기 개발은 72년 9월 8일 당시 청와대 오원철 경제수석이 박 대통령에게 보고한 A4용지 9쪽 분량의 비밀 보고서에서 최초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오 수석은 박 대통령에게 ‘원자 핵무기 개발계획’이란 보고서를 통해 플루토늄탄을 사용한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결론과 함께 핵무기 개발 방향을 제시했다.
당시 핵무기 개발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진행됐다. 핵폭탄과 핵폭탄 운반체인 미사일 개발은 국방과학연구소(ADD)가 맡고, 핵폭탄의 연료가 되는 플루토늄 생산을 위한 연구용 원자로와 핵연료 재처리 시설의 확보는 원자력연구소 특수사업부에서 담당하는 식이었다.
한국은 일단 고순도 플루토늄을 얻기 위한 연구용 원자로로 캐나다에서 ‘NRX연구로’를 들여오기로 하고 물밑접촉에 나섰다. 또 재처리 시설은 프랑스제를 도입키로 하고, 파키스탄 등 핵개발 국가들에 재처리 시설을 수출한 경험이 있는 프랑스 SGN(생고뱅)사와 협상을 벌였다.
이에 따라 73년 4월 원자력연구소와 SGN사 사이에 재처리 시설 건설을 위한 기술용역과 공급계약이 체결됐다. 또한 NRX 도입은 그해 7월 캐나다에서 CANDU(캔두)형 중수로를 들여오면서 몰래 끼워받기로 캐나다 정부와 최종 합의했다.
한편 ADD에서 추진한 핵폭탄 개발은 2차대전 말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된 것과 같은 20㏏짜리 플루토늄탄(공중투하식)으로 75년 초 기본설계가 마무리됐다.
이후 핵폭탄 제조와 기폭(起爆) 기술은 연구진이 프랑스에 있는 핵폭탄제조연구소 등에서 계속했다. 미사일 제조기술은 주한미군에 배치된 나이키 허큘리스(NH)를 생산하는 맥도널 더글러스사를 통해 개발이 진행되다 도중 독자개발로 선회했고 76년 12월 대전기계창이 설립되면서 본격화됐다.
◆미국 압력으로 개발 중단=핵무기 개발에 차질이 빚어진 데는 74년 5월 인도의 핵실험이 결정적이었다. 인도 핵실험 후 미국은 세계 각국의 미대사관과 정보분석가를 총동원, 각국의 핵무기 개발 여부를 확인하는데 혈안이 됐고 비밀리에 추진되던 한국의 핵개발은 그 표적이 되고 말았다.
핵개발 사실을 간파한 미국은 한국 정부에 핵개발 포기를 종용했고 관련 국가에도 압력을 행사했다. 이로 인해 75년 캐나다는 우리 정부와의 NRX연구로 판매 협상을 중단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프랑스로부터 도입을 추진하던 재처리 시설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핵무기 개발에 집착했던 박 대통령은 76년 재처리 기술 및 시설 도입사업을 ‘화학처리 대체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명칭만 바꿔 비밀리에 선진국으로부터 기술 도입을 추진했고 NRX연구로는 자체 설계를 통해 독자개발키로 결정했다.
미사일 개발도 78년 9월 사거리 180의 ‘백곰’이 시험발사에 성공함으로써 공중투하식이 아니라 미사일에 핵폭탄을 장착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 모든 사업과 계획은 79년 10월 박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12·12쿠데타로 등장한 전두환 정권이 미국으로부터 쿠데타 정당성을 추인받기 위해 핵개발을 포기하면서 물거품이 됐다.
■한국 핵개발 일지
▲70년 8월 스피로 애그뉴 미국 부통령 “5년 이내에 주한미군 완전 철수할 것”이라고 선언
▲71년 6월 ‘원자력개발 15년 계획’ 수립해 핵개발에 착수
▲72년 9월 오원철 제2경제수석, 박정희 대통령에게 ‘원자 핵연료 개발계획’ 보고
▲73년 3월 미사일 개발팀, 장거리 지대지 미사일 개발계획 청와대에 보고
▲73년 7월 캐나다의 NRX형 연구로 도입, 설치키로 결정
▲74년 3월 한국, 프랑스 SGN사와 시험용 재처리 시설의 개념설계 용역계약 체결
▲75년 2월 핵폭탄 설계 마무리
▲75년 8월 미 국무장관 방한, 박 대통령에게 핵개발 포기각서 요구
▲75년 12월 NRX연구로 도입과 재처리 시설 확보사업 중단
▲76년 1월 미 국무부 관리 방한, 한국의 핵개발 중지 요구
▲78년 9월 사거리 180의 ‘백곰’ 미사일 시험발사 성공
▲78년 10월 핵연료 가공시설 준공
▲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 서거
▲81년 1월 전두환 정권, 핵개발 포기하고 핵개발 관련기관 해체(ko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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