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자원 병역이행 병사 군생활 수기②] 아들, 인생 최고의 선택을 하다
본 내용은 병무청이 주관한 「지원 병역이행 병사 군생활 수기 2016」‘우수’ 글이며, 자원입대한 병사들의 계급은 체험수기 응모 당시의 계급임(편집자 주)
장하다 내 아들!
아차! 왜 아들에게 제식(制式)의 기본에 대해 설명해 줄 생각을 못했을까? 입대를 앞둔 신병들이 연병장에 집결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나는 소스라쳤다. 기본적인 군대 용어를 인터넷에서 찾아 정리하여 프린트를 해주면서도 제식훈련에 관해서는 까맣게 잊었던 것이다. ‘어이없다’가 이런 순간을 두고 한 말일 것이었다.
방법을 찾을 수도 없는 순간이었다. 아들은 이미 몸으로 부딪치고 있었다. 제식의 기본을 알 턱이 없는 아들이 1천여 명 입소자들 틈에서 이리저리 눈치를 봐가며 대열과 하나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우향우, 좌향좌, 뒤로 돌아’ 등 제식훈련 용어조차 알아듣지 못할 아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장하다 내 아들! 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고 또 쳤다.
입영자들이 대열을 갖춰 연병장을 빠져 나간 뒤 재외 영주권을 가진 입영자의 부모들을 위한 설명회가 이어졌다. 그렇지만 여전히 내 생각은 아들에게 멈춰져 있었다. 신병 교육과정과 영내 생활에 대해 매우 친절한 설명을 들으면서도 아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대견함이 쉬 가시지 않았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몇 개국 언어에 대해 통역 가능한 요원이 분대마다 있습니다. 신병의 한국어 구사능력이 좀 모자라도 괜찮습니다. 안심하세요.” 소대장의 설명에 귀가 번쩍 뜨였다. 나는 이 말을 어리둥절해 하는 아내에게 통역해 주었다. 아내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아내에게도 아들의 언어장벽은 무엇보다 걱정거리였을 것이다. 나는 아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 대한민국, 남편의 조국 대한민국의 국군장병으로 아들을 떠나보내는 엄마의 심정을 어찌 다 헤아리랴. 그러나 아내는 나보다 훨씬 의연했다. 군 입대, 훈련소 입소식 등 생소한 풍경을 즐기기도 했거니와 아들이 그 대열에 있다는 것을 가슴 뿌듯해 했다. 아들의 군 입대를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아내가 고맙고 또 고마웠다.
아! 한국어
나는 1남 2녀의 자녀를 둔 다문화 가정의 가장이다. 26년 째 인도네시아에서 살고 있다.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인 아내와 그 사이에 큰아들 형빈, 밑으로 두 딸을 두고 있다. 한국군에 입대를 함으로써 집안의 자랑거리가 된 형빈이는 94년 인도네시아에서 출생하여 유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영어로 수업을 하는 인도네시아 소재 국제학교를 졸업했다.
형빈이가 주로 사용하는 언어는 영어다. 물론 인도네시아서 나고 자랐으니만큼 일상생활 많은 부분에서 인도네시아어를 사용한다. 형빈이가 영어사용에 아무 거리낌이 없어질 즈음부터 내게는 숙제가 생겼다. 어떻게 해서든 형빈이가 한국어를 잘 구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우선 자카르타에 소재한 한국어 학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방학 때마다 한국을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찾아 왕래를 했고, 아빠의 친구나 친척들도 많이 만났다. 한국의 유명한 곳을 함께 관광하기도 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K-Pop 등 공연을 관람하게 했다. 그 외에도 나는 형빈이가 한국어와 친해질 수 있도록 다각적인 노력을 했다. 하지만 나의 노력은 좋은 성과를 보지 못했다. 말 그대로 체험으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형빈이가 한국어 교육을 가장 실감나게 체험했던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다. 여름방학 3주 동안 경기도 일산 금계초등학교 「귀국 자녀 특별반」청강생이 되었을 때다. 그러나 그마저 형빈이의 한국어 실력 향상에 큰 계기가 되어주지는 못했다. 이내 본래의 환경으로 돌아와야 하는 상황에서 형빈이의 한국어 실력은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형빈이는 한국어 공부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학원도 중도 하차를 했다. 형빈이 친구 중에는 한국 국적의 학생도 여럿 있다. 그런데 그들과의 소통도 오직 영어로만 한다. 곧 한국인 누구와도 영어로 소통을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된 원인이 거기 있다. 그래서 형빈이는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한국어 질문까지도 대답은 늘 영어로 쉽게 처리해 버리곤 했다.
안타까워하는 아빠의 마음을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고 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아름다운 고국이, 풍부한 감성과 넘치는 감각의 한국문화가, 맛깔난 한국의 음식이 형빈이의 마음을 사로잡아 주기를 바라고 또 원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 나의 은근하고 그침 없는 한국어 배우기 권유가 형빈이에게는 짐이요 부담이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갈등 군 입대
형빈이에게 한국군 입대란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 나의 간절한 바람으로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형빈이의 한국군 입대는 그냥 소망으로 그치고 말 상황이었다. 크게 가로막은 언어의 장벽이 쉽게 뚫릴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미국 동부지역 인디아나 대학교(Indiana University)에 진학을 한 형빈이가 3학년이 되면서 스스로 한국군에 입대하고 싶다는 생각을 밝힌 것이다. 정말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었다.
그때 당황한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아빠인 나였다.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오히려 형빈이에게 신중하게 생각하자고 했다. 앞으로 형빈이가 한국에서 거주할 확률도 거의 없다는 핑계거리를 찾아내 다시 잘 생각해보라고 권유했다. 군 입대보다 한국에서 1년 과정의 리더십 교육이나 인턴십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고 다른 방법을 추천하기도 했다. 내가 그렇게 원하던 아들의 한국군 입대가 아닌가. 그런데 막상 아들이 입대를 하겠다고 나서니 나는 온통 걱정부터 앞섰다.
정말 고맙게도 형빈이의 생각은 확고했다. 육군 입대로 최종 결정하기까지 형빈이가 나보다 더 의연했다. 형빈이에게 최적지로 생각되는 카투사와 같은 근무지를 넘보는 나와는 각도가 달랐다. 2014년 12월 미국에서 날아온 형빈이와 나는 서울지방병무청의 신체검사와 인성검사 과정에 도전했다.
나는 형빈이의 입대를 걱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혹 형빈이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때때로 형빈이의 눈치를 살피며 최선의 보조에 공을 들였다. 주어진 시간 안에 부과된 문제를 풀어야 하는 인성검사는 나와 형빈이에게 고비이기도 했다. 한국어 능력 때문에 인성검사가 불가능했다. 다행히 감독관께서 내가 도와주는 것을 허락했다. 나는 컴퓨터 앞에서 인성검사 문제를 풀고 있는 형빈이 뒤에서 통번역을 해주고 형빈이는 문제를 풀었다.
최종 결과는 2급으로 현역병 입영대상이었다. 간절히 바라면서도 한편으로 걱정투성이인 형빈이의 군 입대는 점점 현실이 돼 가고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장애물이 나타났다. 형빈이의 언어 현실을 감안한 부대에 보내고자 하는 아빠의 마음을 전하자 상담사는 “그런 부대는 없다”고 하였다.
형빈이의 언어 능력을 감지한 상담사도 답답했을 것이다. 왜 굳이 입대를 시키려는지 안타깝다는 뉘앙스가 그의 표정에서 묻어나기도 했다. 그때도 형빈이가 더 단호했다. “특례는 필요 없다”였다. 정면 돌파를 하겠다고 했다. 어떤 부대에 배치가 되든 재외 영주권자 입영일자인 8월 10일에 맞춰 입대하겠다고 했다. 잠시 미국으로 돌아간 형빈이는 3학년 과정을 마치고 변함없는 마음으로 다시 입대 선상에 섰다.
내 아들이 변했어요
나는 대한민국 국군의 계급장이 그렇게 빛난다는 것을 형빈이를 통해서 새삼 깨달았다. 한국 군인의 걸음걸이가 그렇게 보무당당(步武堂堂)하다는 것을 형빈이를 통해서 새삼 확인했다. 휴가를 나온 형빈이는 말투도 달랐고, 걸음걸이도 달랐다. 들쳐 메고온 배낭 가득 한국 국군으로서 형빈이의 자부심이 건강한 맥박으로 뛰고 있었다. 형빈이가 스스로 그렇게까지 대한민국 국군임을 자랑스러워할 줄은 나조차도 상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반신반의 했을 아빠의 조국이 비로소 형빈의 조국으로 크게 자리매김 되어 있었다.
입대 초기 반복되는 생활에서 터져 나온 불만은 그새 좋은 약이 되어 있었다. 눈 치우는 일꾼, 빗자루질이나 하러 입대했냐고 토로하던 이등병 시절의 불만은 일병 계급장 안으로 녹아들어 정신의 살이 되어 있었다. 반복되는 훈련과 단순 노동 속에서 삶의 한 과정을 발견했다고 했다. 사색의 대상이 되더라고 했다. 정말 나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나의 감사는 여기에 그칠 수가 없다. 그렇게 바라던 형빈이의 한국어 실력이 군대 생활로 인해 일취월장한 것이다.
물론 형빈이와 나의 소통 언어는 아직도 영어다. 형빈이가 보내는 편지 또한 온통 영어다. ‘불침번, 소대장, 제식훈련, 화생방’ 등 말 그대로 표기해야만 이해가 분명할 단어를 제외하고는 다 영어로 쓰여 있다. 하지만 괜찮다. 형빈이가 한국어로 의사소통을 하는데 두려움을 떨쳐냈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안다. 그리고 그것은 형빈이가 군대 생활로 인해 얻을 그 많은 것들 중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그랬다. 형빈이는 가능성이란 어마어마한 선물을 이 아빠의 가슴에 턱 안겨주었다. 형빈이로 인해 나는 내 조국 대한민국에 지금까지보다 훨씬 큰 빚을 졌다.
형빈이도 새삼스러운 것이 많을 것이다. 두 여동생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고, 크나큰 자랑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이 말이다. 휴가를 왔을 때 두 딸이 오빠를 보는 눈초리는 예전과 달라도 많이 달랐다. 오빠의 말투와 행동에 대해 키득거리며 흉내를 내기도 했지만, 그건 분명 놀림이 아니었다.
두 딸은 한국어를 매우 잘한다. 특히 한국유치원을 졸업하고 한국국제학교를 다니는 막내딸은 한국 연속극을 보며 엄마에게 동시에 통역을 해줄 정도다. 형빈이가 겪은 한국어에 대한 어려움을 딸들마저 겪게 하고 싶지 않아 어려서부터 노력한 효과를 딸들은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그래서 딸들은 오빠랑 한국여행을 할 때면 훌륭한 가이드 역할을 했다.
그런 이유였을까? 딸들과 오빠와의 사이는 늘 ‘너냐, 나야’ 하는 친구 수준이었다. 내가 나무라듯 관계 정리를 해줄 때도 있었다. 그런데 형빈이의 군 입대로 인해 딸들의 오빠를 보는 각도가 한 방에 달라졌다. 이 새삼스러움을 형빈이가 즐길 것을 생각하면 나도 절로 웃음이 나온다.
형빈이의 한국군 입대는 우리 가족에게 새로운 문화를 형성시켜 주었다. 가족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장, 공동의 관심사를 제공했다. 가족애를 한층 더 강화시켜 주었고, 외가의 친척들에게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형빈이의 그 많은 다국적 친구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강렬한 한국문화 전파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대한민국 어디에나 무르녹아든 IT 환경과 그것을 창의적으로 활용할 줄 아는 한국인들의 지혜 때문이다.
연대 체육대회, 부대 단결활동 프로그램 미스터 태풍왕, 제식 경연대회, 새로운 부대원 전입과 전역, 개인 생일까지도 인도네시아에서 공유할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새롭고 놀라운 일인가. 훈련소 시절 소대원 카톡방을 개설해준 소대장께 거듭 감사드린다. 자대 배치된 후 포대원과 그 부모 모두를 묶어 하나가 되게 해준 밴드장께도 무한 감사를 드린다.아버지, 아들 바보나의 카카오톡 대문 사진은 형빈이의 훈련소 수료식 때 촬영한 한 컷이다. 아마도 이 사진은 아주 오랜 기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형빈이의 전역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그 사진은 때때로 나를 수다쟁이로 만든다. 그 사진으로 인해 아들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정말 기쁘다. 할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 대부분 다 아는 그 군대스리가 이야기다.
거기에 내 아들 이야기 하나를 더 보태는 것이 나는 즐겁다. 사실 아들을 군대 보낸 부모들이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가 “내 아들이 달라졌어요”다. 체력도 좋아지고 자세와 정신 상태도 달라졌다고 앞 다투어 이야기를 한다. 나는 거기에 갖은 이야기로 한술 더 뜬다. 그래서 혹자들은 내가 재외 영주권자 아들 군대 보내기 홍보대사라도 된 양 착각할 것이다.
재외 영주권자들이 한국군에 입대를 하기란 쉬운 결정이 아니다. 당사자는 물론 가족들까지도 실행하기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디에서도, 또 비싼 돈을 주고도 쉽게 체험할 수 없다는 점이다. 부계이건 모계이건 한국계라면 꼭 한번 체험해볼 가치가 있음을 나는 확신한다.
나는 형빈이의 아버지일 뿐이다. 그래서 그 귀중한 형빈이의 체험이 그의 일생에 있어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다만 형빈이의 입대로 인해 내게도 오래 기억될 소중한 순간들이 너무 많이 생겼다. 무엇보다 부자간의 가슴을 연 화끈한 소통들은 서로에게 자산일 것이다. 나는 지금도 훈련소 퇴소식 때를 잊지 못한다. 이등병 계급장과 태극마크를 달아주던 순간, 형빈이가 내게 붙였던 그 우렁찬 경례와 건강하고 믿음직한 눈빛을 손에 잡힐 듯이 기억한다. 세상의 어느 아버지가 아들의 그 모습을 잊으랴. 형빈아 고맙다! 네가 내 아들인 것이 정말 자랑스럽다. GO! GO!!(konas)
7포병여단 안창섭(일병 안형빈의 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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